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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길

글쓴이 : 호루스의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8.♡.198.202) 날짜 : 2017-01-07 (토) 07:16 조회 : 932
사람들은 누구나 깨달음을 통해서 자신을 구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아직도 깨달음은 사람들 속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누구도 깨달음에 대한 충분한 이해나 정확한 가르침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깨달음 그 자체가 삶의 중요한 목표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만일 삶 자체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소중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살아야 할 하등의 이유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옛날부터 깨달음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허비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정작 깨달음을 완성했다는 기록은 수천 년 전에 한 사람이 나타났을 뿐이다. 이러한 일은 인간의 세계에 깨달음을 위한 길이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기인되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러한 좋은 가르침이 사람들을 통해서 세상에 전해질 수 없었는가. 사람은 의식에 의해 조종을 받으며, 의식에 의해 활동을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기 의식에 맞지 않는 일은 받아들이지도 않고 제대로 볼 수도 없으며 제대로 전할 수도 없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누구나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없게 하는 문제점이었다.

왜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를 축복하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가?

우리가 인간을 영적인 사고를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동물이나 식물에서는 그 영적인 사고가 인간처럼 뛰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적 동물이라 함은 하나의 의식에 의해서 알고, 느끼고, 받아들이고, 거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계획하고, 판단하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은 의식의 지시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식 속에 선업이 없는 자는 깨달음에 대한 가르침을 보면 거부해 버린다. 이것은 세상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4대 성인의 삶을 통해서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발견될 수 있고, 또 불교에서 전해지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왔던 달마대사(達磨大師)의 삶에서도 얼마든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아무리 '깨닫고 싶다, 깨닫고 싶다' 하더라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깨달음은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의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 속에 있는 일을 이해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일이 사람에 따라서는 잘 안 된다.

이런 일은 과거로부터 자기 속에 있던 일에 의해서 거부되기 때문이다. 인연이 없으면 부처도 중생을 구하지 못한다는 말을 석가모니는 남겼다. 그러니 아무리 좋은 가르침도 인연이 없는 자는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 있다.

그것은 자기 속에 본래 좋은 인연이 지어지고 있지 않으니 좋은 인연과는 연이 닿지 않는다는 말이다.

과거의 세상에서도 깨달은 자가 나타났지만 그 깨달은 자의 옆에는 사람이 오지 않았다. 일반 대중은 그를 알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깨달은 자는 82살이 되어 길 위에서 죽을 때까지 걸어 다니면서 깨우치려 했다. 문명의 혜택이 없었으니 나그네의 행보를 계속하면서 도보로만 여행을 해야 했던, 그 시절 설마 부처가 가마를 타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그런 대접은 못 받았을 것이다.

그의 곁에는 항상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끝없이 나그네의 여행을 계속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깨우치려 했던 그 이외의 사람들은 대부분 인간의 손에 의해 해침을 당했다. 소크라테스나 예수는 사약을 받던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어야 하는 극형에 처해졌으며 노자는 일생동안을 떠돌아다니다가 죽어야 했다.

그런데 왜 후세의 사람들이 그들을 성인이라고 말했겠는가? 그것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그 가르침 속에 진리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성인이라고 평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성인의 대접을 받게 된 것은 그들이 죽고 난 먼 훗날이었다.

그들은 살아서는 성인이 아닌 가장 외로운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다.

우리가 인간의 세계에 깨달음을 주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외로움과 고통을 느끼게 한 것은 인간 세계에 진리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진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 속에서 일어났던 현상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에 대하여 보다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함으로서 깨달음을 통해서 자기를 구원하거나 또는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알아보자.

우리가 깨달음을 가까이 하고, 깨달음을 위한 가르침을 가까이 하고자 하는 이유는 진실에 대한 눈을 뜨기 위해서 이다. 그러니까 진실을 알려고 노력하는 자만이 이 깨달음에 가까이 갈 수가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깨달은 자가 나타났을 때 공통되었던 일은 근원의 세계를 보았다는 사실이다. 이 근원의 세계에는 업을 가지고는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다.

업이 모두 소멸되었을 때 근원의 세계에 이르게 되는데 이 근원의 세계는 바로 모든 것이 죽고 태어나는 자리이다. 이 근원의 세계를 본 자는 이 세상에 태어난 자 중에 단 두 사람뿐이다.

한 사람은 석가모니이다. 그러니까 깨달음을 얻은 자가 공통적으로 보게 되는 세계는 바로 이 근원의 세계였고 해탈의 세계이었다. 해탈을 한 자만이 그 근원의 세계에 들 수 있으므로 해탈을 한 세계가 바로 근원의 세계인 셈이다.

쉽게 말해서 진실이라는 것은, 완전한 진실을 얻게 된다는 것은 모든 거짓에 물들어 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해탈할 수 없다.

해탈을 하지 못한 사람은 절대 깨달을 수 없다. 즉 마지막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 완전한 진실의 눈을 뜨기가 어렵다.

깨달음이란 자기의 가정을 버리고 입산 수도를 해야 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가정을 가지고도 얻을 수 있고, 또 입산 수도를 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깨달음은 바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를 이해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가족을 버리고 입산수도해서 히말라야 산맥 같은 곳에서 오랫동안 노력했던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고 자기를 버리는 행동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속에 업을 가지고 있는 가운데 그 업을 버리지 않는 상태에서 깨닫기를 원했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기를 죽이는 일을 한 것이다.

업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깨달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의 사고를 있게 하는 모든 분별력은 우리 속에 있는 과거의 일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 자기 속에 쌓아두었던 업을 떼어버리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깨달을 수가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깨달은 자가 나오기란 절대로 불가능하다.

세상에 입산 수도를 해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사람들이나 또 어떤 수행, 진리의 방법이 아닌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그들은 더 큰 업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남을 속이고, 남을 해치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들을 했다고 본다. 이는 오늘과 같은 사회에서 어디를 가도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어떤 사람들의 욕망이나 희망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바로 가르침 속에서 얻어지는 것인데 지금까지 그 가르침이 명확하게 전해지고 있지 않다고 하겠다.

석가모니는 깨달음을 성취하고, 남도 깨닫게 할 수 있는 길을 알고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석가모니도 사람들에게 "있는 일을 보아라!, 있는 일을 배워라!, 있는 일을 알아라!"라고 밖에 가르친 것이 없다.

그리고 있는 일에 대해서 물으면 있는 일을 석가모니 자신이 본 대로 설명했다. 바로 그 있는 일이 사람들을 깨우치는 길이었다. 그래서 그는 있는 일을 가르친 것이다.

제자들이 스승의 임종 앞에서, "스승이 죽으면 이제 우리는 누구를 통해서 배워야 합니까?" 하고 물었을 때, "자기를 통해서 배우라" 했다. 그리고 "나는 아무 것도 나의 것을 가르친 것이 없다"고 했다.

그 말은 바로 세상에 있는 것을 말했을 뿐이라는 것이고, 세상에 있는 것 그 자체가 깨달음을 보게 하는 길이라고 말한 것이다
.

"내가 잘못했을 때 나는 그로 인해서 당연히 그 업보를 받게 되는 것이고, 내가 잘 했을 때 나는 당연히 거기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받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인과응보이다. 응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 인과응보이다."라고 하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