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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충만한 순간에 사는 법 --프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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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아름다운 마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8.♡.228.179), 작성일 09-01-03 12:14, 조회 4,28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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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충만한 순간에 사는 법









여러분은 화급한 마음으로 여기 오셨군요. 컴퓨터 스위치를 켜놓고 말입니다. 벗들이여, 자, 어떠세요. (지구에서의)휴가는 즐겁습니까? 모험을 하고 있는 겁니까? (한 신사에게로 돌아서며. 그는 멀리서 왔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은 잠들었군요.









아~ 네..









음 그것도 괜찮습니다. 잠이 들면 마음은 일상적인 길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니까요. 그래서 지성의 방해를 받지 않고 앎을 얻게 되지요. 몸이 개입하지 않을 때는 원하는 누구하고라도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일을 삶 속에서 실현하고 싶을 때, 내면에 그런 힘이 있다는 걸 지성적으로 알게 되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 이제 그것을 시험해봐야지”









그래서 소망을 내보내는데, 조금이라도 의심을 하게 되면 일을 전부 망치게 됩니다. 앎에는 의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의심이 있다면 그건 앎이 아닙니다. 그걸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당신들의 육체에 대해서, 건강에 대해서 얘기해 봅시다.



당신이 흥분으로 마음을 졸이면서 이 방에 앉아 있는 동안, 당신 몸의 모든 세포는 그 같은 흥분에 공명하게 됩니다. 당신 몸의 모든 세포는 그 자체의 통합성과 그 자체의 유쾌한 창조력을 갖고 있습니다



. 이러하므로 질병이나 허약함은 길 잃은 개처럼, 당신이 붙잡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몸의 질병은 가슴 속에 있는 질병의 반영입니다. 자, 이것을 지적으로 알고 있는데 몸은 여전히 조화롭게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난 몸의 질병이 마음의 질병임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









당신은 건강에 너무나 신경을 쓰면서 거기에 홀려 있습니다. 자신의 몸에 대해 너무나 집착하고 있습니다. 항상, 항상, 몸이 더 좋아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이여, 몸이 좀더 좋아지기를 바라고, 좀더 잘 기능하기를 바라고, 보기에 좋기를 바라고, 더 젊어 보이기를 바라고, 몸매가 좀더 미끈해지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판단하게 되면, 당신은 당신이 제어하기를 원했던 바로 그것을 창조하게 됩니다.









우리는 당신의 지성적인 앎과 내면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앎에 대해 누누이 얘기해 왔습니다. 당신의 몸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당신의 몸은 당신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당신이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에 더욱 더 힘을 부여하게 됩니다.



당신이 집착하고 있는 것을 당신은 자신에게로 끌어당깁니다. 당신은 조화롭지 못한 몸에 너무 집착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질병에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고통에도, 감정적인 고통에도,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질병에 대해 예방 접종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자신이 안전한 우주에 살고 있지 않으므로 무엇인가에 전염될지도 모르고 그것으로 한 생애를 마감할 수도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모든 생애는 실로 정거장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당신의 물리적 신체로 말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몇 백 년, 몇 천 년, 몇 만 년 동안 끌고 다니지 못합니다.









삶이란 모두 정거장 같은 거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삶이란 장엄한 환상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해야 할 기능을 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신체 부위에 대해 당신이 믿고 있는 신체 부위에 대해 당신이 갖고 있는 집착을 진실로 보아야만 합니다.



당신의 믿음이 어떻게 비롯되었고, 병을 창조한 당신의 감정적 상태가 무엇이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병이 계속된다면, 당신이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를 바라보는 것이 유익할 겁니다.









알약이든 물약이든, 약은 사실 유효합니다.



 그것이 효과가 있는 유일한 이유는, 그럴 것이라고 당신이 믿기 때문입니다.



 특이한 식이 요법이 효과가 있는 이유는 그럴 것이라고 당신이 믿기 때문입니다.



의사라는 사람들은 그러한 신념을 북돋아 줍니다.



우린 지금 의사를 찾아가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의사를 찾아 가는 것은 매우 유효합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집단의식 속에는 의사가 도움이 된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원한다면 의사를 만나러 가십시오.









그러나 당신은 그 안에 담긴 내용을 마땅히 보아야만 합니다. 당신 자신이야말로 그 안에 담긴 내용입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결국 당신에게 돌아옵니다.



당신의 우주, 그 중심에 있는 태양은 바로 당신입니다.



주권을 가지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권리도 바로 당신에게 있습니다. 당신이 그 길을 선택한다면 말입니다.



 벗이여, 육체에 대해 당신이 갖고 있는 집착심을 보십시오.



당신은 과연 생기발랄한 즐거움 속에서 육체를 사용하고 있는가요? 아니면, 생기 있는 기쁨의 표현을 억누르고 있나요? 좀더 나아지기 위한 의무적인 운동, 의무적인 긴장과 억압은 그다지 유익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운동 요법을 하고 있다면,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기쁨 속에서 한다면 그땐 정말로 놀라울 겁니다.



 당신의 몸 역시 참으로 신성의 표현이고,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몸이란 진실로 경이로운 것입니다.



 당신이 그 몸을 변하게 하고 싶다면, 물론 변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당신의 다른 모든 면과 마찬가지로, 오직 껴안음을 통해서만 일어날 것입니다.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수치스럽게 여긴다면 변화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자, 이제 질문하실까요?









당신은 우리가 병든 육체에 투자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기나요?









사랑하는 이여, 사람들 수만큼이나 그 배경도 갖가지입니다. 가정을 한 번 해보죠.



어떤 사람들은 병을 붙잡고 늘어집니다. 왜냐하면 정상 세계에서 제 기능을 하기가 두렵기 때문이죠.



 병으로 인해 사랑 어린 관심을 받기 때문에 병을 붙들고 늘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사랑 받을 가치가 없다고 느껴지기 때문이죠. 많은 배경들이 있습니다. 벗이여.









엄청난 육체적 도전을 해야 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일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장애에 관해 저 나름대로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가 온전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만큼이나 잘하고 있고, 그들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벗이여, 사람들 간에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지닌 사람들의 경우에는요. 거기에는 분명히 배워야 할 커다란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선 이 점을 명확히 해둡시다.



 질병이란 것 역시 절대적으로 유효한 것이라고요.



우린 온전치 못한 데 대한 당신의 판단에 대하여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육체적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 역시 그렇게 되기로 선택한 겁니다.



 그것 역시 그들과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공동으로 배움의 상황을 창조한 겁니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은 너무 자주 잊어버립니다. 이번 생애는 오직 한 단면이라는 사실을.



 수천 번 가운데 오직 한 번의 경험이라는 사실을. 3차원의 물리적 형체를 띠고 나올 때마다 매번 다른 경험을 하기 위해 다른 환경을 선택한 거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신체 모습이 전적으로 무능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모든 신체 기능을 하기로 할 때마다 보살펴야 하고, 옮겨 주어야 할 때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이런 육체는 끝장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육체를 지닌 삶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벗이여, 이런 일에 상처 받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것으로 인해 당신 마음이 무겁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남자가 울기 시작한다.)









우리가 얘기하려는 것은 그토록 무기력하고 그토록 무능한 이런 육체 안에는, 그런 경험을 하기 위한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과 상호작용을 하게 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커다란 배움을 주기 위해서 말입니다.



 여러분 모든 생물, 모든 인간, 모든 식물과 꽃, 모든 새 이 아름다운 행성에 살고 있는 만물은 진실로 신성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신성의 표현이니까요. 당신들은, 아니 인류 모두는 바로 자기 자신이 신임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물 안에 깃든 신성을 그렇게 알아차리기 어려운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당신이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며 자신을 진정으로 존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 같은 사랑과 존경을 모두에게, 당신네 행성에 있는 모든 것에게, 그리고 행성 그 자체에 나눠주는 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자기 자신이 신임을 아는 경지까지 활짝 꽃피우게 되면 당신의 진동 주파수는 널리 널리 퍼져나가 모든 것과 접촉하게 되고, 이런 식으로 당신은 변화를 창조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인류는 앞으로 다가올 변화의 길 준비해야 합니다. 그건 아주 간단합니다.



자신을 사랑하세요.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의 육체를 판단하지 말고, 장애로 인해 마음 뺏기지도 마세요. 오직 지금 이순간의 생기발랄한 기쁨에 마음을 집중하세요. 그것뿐입니다. 당신 자신의 신성 안에 존재하세요.









저는 인정하고, 판단과 하나가 되고, 느낌을 느끼는 수련을 하고 있습니다. 에너지가 해방되어 위로 상승하게 되면, 애초에 그것을 느끼지 않음으로 해서 야기되었던 질병에서도 해방될 수 있나요?









물론이지요. 사랑하는 이여, 그것이 바로 변형이라는 기적입니다.









그러면 병도 나을 수 있겠네요. 그 모두가 작동된다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벗이여, 우리는 본래 모든 것이 잘 작동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몰랐습니까? 당신은 제대로 알았군요. 당신의 말 그대로 작동됩니다. 마음이 열려있는 데 어떻게 그런 작용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 몸의 모든 세포가 그 기쁨에 공명하지요.









궁극적인 질문입니다. 어째서 그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거죠? 맨 처음에 어째서 무엇인가가 필요했던 겁니까?









벗이여, 당신의 질문 속에는, 당신이 인식하는 방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당신이라는 존재는 신의 한정된 모습입니다.









우리가 전체성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겠지만, 뭔가가 더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거면 됩니다. 분명 무엇인가가 있지요.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여기 존재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당신이 잘못된 건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잘못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성에 있어서도 잘못된 게 없지요.



 하지만 진실로 이 모든 활동은, 소위 ‘삶과 우주의 만물’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논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건 마음의 작용이지요. 그건 느낌에 관한 겁니다.



당신이 아무런 판단 없이 느끼도록 자신에게 허용한다면 당신은 신을 알게 될 겁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 분리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고, 해답은 논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가슴에 관한 것임을 이해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 바퀴벌레가 자꾸 들어와서요.. 전에 부탁했었거든요. 그들이 이곳에 있는 게 싫다고요. 그러나 듣지 않아서 약을 뿌려서 죽였지요. 같이 있어달라고 할 정도로 즐겨야 하나요?









당신이 선택할 문제이지요. 그러나 바퀴벌레가 당신에게로 오는 것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그들은 더욱 더 오게 될 거예요. 당신이 그들에게 약을 뿌리는 건 아주 타당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건 궁극적인 해결 방법이 아닙니다. 거기에 대해 아무런 판단이 없어야 합니다. 벗이여, 뉴 에이지라고 불리는, 이 ‘미친 짓’에 대해 모르는 누군가에게 당신의 이런 사정을 말했다고 합시다.









‘나는 바퀴벌레에게 약을 뿌리지 않고 그저 떠나 달라고 부탁했노라’고 말하면 그들은 아마도 당신을 미친 사람들을 가두는 곳에 데리고 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보세요. 어떤 생명체가 당신의 정원을 갉아 먹든, 당신의 집에 떼 지어 몰려들어 당신의 음식을 먹고, 당신을 끔찍하게 만들든, 근절이라는 방법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존경심과 경의를 표하며, 그 원치 않는 방청객에게 떠나가 달라고 부탁하세요.



 때로는 당신 집을 찾아온 그 방문객들처럼 말을 듣지 않을 때도 있지만, 당신이 판단에 빠져 들지 않는다면, 그들은 진실로 떠나갈 것입니다.









그들이 떠나기를 원한다면, 그들이 바람직하다고 이미 판단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벗이여, 판단과 분별을 혼동하지 마세요.



그들이 이 곳에 없는 편이 더 좋겠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이 나쁘다거나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건 선호의 문제이지, 판단이 아닙니다. 여기에 대해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판단 속에서 살아오다 보니, 판단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생각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벗이여, 우리들은 싱겁기 짝이 없는 어리석은 어리석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린 분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까? 인류와 당신네 행성을 위해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판단 속에서가 아닌, 경의와 존경 안에서, 분명히 분별하는 가운데, 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제가 집에 없는 동안, 누가 집에 침입했어요. 무엇을 도난당했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묻고 싶은 건 교훈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이제 당신 마음 가운데는 누군가가 집에 들어올지 모르니 방어책을 강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늘 들 겁니다. 그렇죠?









그래야 되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드는 건 아녜요. 제 집에 튼튼한 문도 없고, 뒷문을 열어놓은 채로 나가기도 합니다.









그래요? 문을 열어놓고 나가면서도 침입되지 않기를 바라나요? 도대체 무얼 하는 거죠?









제 집을 놓고 주문을 외웁니다. 그런데 전에 그것을 깜박 잊고 하지 않았었어요.









그렇군요. 참 특이하네요. 사랑하는 이여.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방어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그걸 믿어라.. 그 말씀이신가요?









벗이여, 우리는 어떤 것을 하라, 하지 말라고 주문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왜 당신이 그런 일을 하며,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당신의 행동 뒤에 있는 밑바닥 신념이 무엇이냔 말입니다.









벗이여, 당신들의 몸, 당신들 자신의 표현인 이 몸은 순간순간 어린아이처럼 생기 있고 즐겁게 반응합니다



. 지금 이 순간의 당신 자신은 고통 속에 살고 있고, 사랑을 갈망하며, 전체성을 염원하지요.



당신이 진실로 전체성 안에 머무르면, 본래의 당신 자신과 더불어 있으면, 당신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진실로 경험하면, 그땐 분리가 없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다른 모든 것이 따라 오게 되지요. 항상, 항상, 그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귀결됩니다.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거지요. 당신은 신성한 권리로 여기 존재합니다. 건강과 풍요로움과 기쁨과 사랑은 모두 신성한 권리로서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왜냐고요? 당신이 여기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당신은 신성하기 때문입니다. 우주 가운데서 당신이 갖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그 놀라운 것들을 갖기 위해서는, 당신 자신이 누군지를 알아야만 하며, 당신의 모든 면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이 모든 장황한 이야기 속에는 구슬을 꿰매는 실처럼 그 모든 것을 꿰뚫는 공통된 실이 있음을 눈치채셨나요?  약동하는 건강은 당신이 믿기만 하면, 당신의 권리입니다.



 건강치 못한 것 또한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의 신성한 국면으로서 유효한 겁니다.









프타아, 바퀴벌레 얘기로 돌아가서 바퀴벌레 중에는 독을 퍼뜨리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어떤 분별을 해야 하나요? 또 털 파리는 어떻고요?









우리들의 여인(자니 킹-저자)도 그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은 털 파리를 사랑하는 게 좋겠습니다.









편지를 쓰는 게 도움이 될까요? (폭발적 웃음, 이 방법은 자니 킹이 그녀 집에 살고 있던 쥐에게 쓰던 방법인데 그 쥐가 정말 집을 떠났다.)









그 방법이 쥐에게 효과가 있었다면 털 파리에게 효과가 없으리란 법은 없지요? 자, 이 점을 또한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당신 몸 위에 앉으면, 당신은 물리지 않으려고 하겠지요.



 전에 쥐에 대해 말씀 드렸던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무엇인가가 당신을 물고, 상처 주고, 할퀴고, 독을 퍼뜨린다고 믿으면, 그땐 정말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연의 일치라는 것은 없으니까요.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독인 줄 모를 때는 어떠한가? 그것들이 물었다는 걸 모를 때는 또 어떠한가?”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건 배워야 할 가르침입니다. 안전한 우주에 대해 배워야 할 가르침이지요.



몸의 반응과 정서적 상태에 관해 배워야 할 가르침입니다.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건 모두 다차원적인 겁니다. 어느 한 차원에서 보면 대답이 아주 간단하지요.



하지만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일은 또, 또, 또 반복됩니다. 어떻게 배워야 할지, 무엇을 창조해야 할지, 판단하지 마세요. 당신이 불러들인 모든 것을 축복하세요.









아직도 석연찮은 구석이 있습니다. 제가 바퀴벌레들에게 가라고 요청하면 그들이 갈 거라고 믿긴 합니다. 하지만 효과가 없습니다. 뭔가 빠진 것 같아요.저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나요?









벗이여, 당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면, 그때는 바퀴벌레 또한 사랑하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곳 허공에서 바퀴벌레들에게 요청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그들이 갈까요?



물론이지요. 멋진 실험을 한 번 해보세요. 바퀴벌레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당신이 바퀴벌레가 되는 거지요. 당신 정원에 있는 화초나 나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동식물의 의식, 그들의 영혼과 하나가 되어 그 생명체에 축복과 격려를 보내면 그들은 번성할 겁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바퀴벌레에게 축복을 보내면서 함께 살고 싶지 않으니 다른 곳에 가서 더 호의적인 거주지를 찾아보라고 말하면 그들은 떠나갈 겁니다.









거기에 대해 요령을 좀 가르쳐주시겠어요?









벗이여, 우리는 꽤 오랫동안 거기에 대해 말해 오고 있습니다. 벗이여, 우리는 항상, 항상, 같은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안 그래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당신은 존재하는 것에 대한 경이로운 수업을 해야 합니다.



당신의 집안에서, 우리가 전에 말했던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관대해지세요.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세요. 그 상태가 되었을 땐 당신은 자신이 꽃피어나기 시작했음을 알게 될 겁니다.









네. 그래요. 하지만 듣기 보단 어려워요.









그렇지 않아요.









어려워요! 









당신은 날 놀라게 하는군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즉각 알아들었는데요. (웃음)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모든 것은 제 자리에 있습니다. 당신은 위대한 발견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그렇게 있으면 됩니다.









저에게는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병이라는 것에 너무 신경을 쓴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저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긴장이나 한계 상황에서 해방되는 것을 느낄 때는 가슴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뭔가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것 같은데, 올바른 태도를 알고 싶습니다.









당신이 전체성에 마음을 빼앗기면 빼앗길수록 내면에 더욱 더 전체성을 반영하게 되고, 자기 바깥의 세계에도 그것이 나타납니다.



이해하시겠어요. 건강은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존재의 문제요, 가슴의 문제입니다.



치유라는 것에 마음을 빼앗긴다는 것은 괜찮습니다. 치유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치유를 촉진 시키는 것은 분명 큰 기쁨입니다. 우린 그 같은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질병을 만들어 내는지, 그런 것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스스로 비추어보라는 겁니다.









저는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저 자신을 그 같은 상황에 밀어 넣고, 온전히 두려움을 느껴야 하나요? 아니면 제가 두려워하는 상황을 끌어들인 건가요?









두려움을 느끼면서 그것을 껴안으세요.





껴안으라고요?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느껴야지요.



 자, 이 점을 분명히 하도록 합시다. 당신은 두려워 ‘해서는’ 안 됩니다.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다.



그 같은 두려운 상황을 창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판단 없이 인정하고 껴안음으로써 두려워하는 상황을 물리적 현실에 불러들이지 않고도 두려움을 변형 시킬 수 있습니다



. 사랑하는 이여, 이것이야말로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매우 조화로운 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리적 현실에 그 모든 드라마를 창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같은 감정을 껴안으면 두려움이 사랑으로 변합니다. 어떤 것을 함으로서가 아니라 그저 판단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인정하고 껴안음으로써, 그 두려움 안에 보석이 있음을 앎으로써 말입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군요. 제가 어떤 것을 두려워하는 데,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끼려고 한다면, 저는 그 두려움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이잖아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어떤 것을 두려워할 경우 우선 제가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두려워하는 것도 괜찮은 것임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려움의 감정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두려움을 거부하지 않고 껴안기 위해, 우리는 무엇인가를 우리 자신에게로 끌어왔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우주에는 두 가지 표현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는 사랑이고, 또 다른 하나는 두려움이지요. 둘 다 유효합니다.









우리는 둘 다 껴안아야 합니다.









그렇고 말구요.



그럼 뱀에 대한 처방도 내려주시죠.









당신은 뱀을 두려워하는군요. 그렇다면 다시 가정적으로 얘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당신을 심하게 괴롭히지 않는 것에 대해선 말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자, 극적이고 병적인 두려움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론적으로는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이 뱀에 대해 병적인 두려움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그러한 두려움을 표출할 수 있는 상황을 당신에게로 끌어당기게 됩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어떠한 두려움이든, 그것 역시 유효한 표현임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당신이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이든, 당신은 거기에 힘을 부여하고 당신에게로 끌어당긴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해하시겠어요?









그러니 뱀에 대한 이러한 두려움을 직시하고,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해 보십시오. 밤에 침대에 누워, 손을 뻗어 책을 집어 들었는데 그 책 바로 밑에 뱀이 있다면 어떨까요? 이 같은 시나리오를 상상할 때, 당신은 가슴 속의 느낌, 즉 두려움을 창조하게 됩니다. 이제 당신이 할 일은 그 두려움을 엑스터시로 바꾸는 겁니다.









그런데 방법이 뭐냐고요? 책임을 지십시오. 그 판단과 하나가 되십시오. 이런 경우에는 그런 두려움을 가질 만큼 약했던 자기 자신에 대한 판단과 하나가 되어야 하고, 뱀이 갖고 있는 판단과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머리를 떼어내어 겨드랑이 아래에 넣어두고 그 느낌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비명을 지른다든지 하는 상황이요.









벗이여, 그것이 소위 표현이라는 것이지만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느낌에 대한 문제니까요. 느낌이란 억누르는 것도 아니고, 표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둘의 중간 지점이지요. 왜냐하면 느낌이란 진실로 중립적인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대해 좋다, 나쁘다고 하는 것은 바로 판단입니다. 당신이 판단 없이 그 느낌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에너지, 그 느낌은 더욱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더 이상 그 드라마를 물리적 현실에 끌어들일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것이 빛이 될 때까지 계속 느낌 속에 있어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그것을 껴안고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왜 이걸 느끼려고 애써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 때까지 느껴야 한다. 뭐 이런 뜻인가요?









음, 언제 그걸 멈춰야 할지는 저절로 알게 됩니다.



 이 점을 말씀 드려야겠군요. 무엇인가 두려워하는 게 있다면 그 경험을 모나지 않게, 아주 부드럽게 하고 싶다고 말해보세요. 그건 무엇인가 하는 게 아니라 수용하는 겁니다.



 수용이란 소위 여성 에너지입니다. 그건 무엇인가를 하는 게 아닙니다.



행위는 소위 남성에너지로서 인류가 역사 이래로 운영해 온 에너지입니다.



 남성에너지를 부정하려는 게 아닙니다. 여성 에너지를 불러들여 균형을 잡고자 하는 겁니다.



지성과 감성, 긍정과 부정의 균형 말입니다. 그건 판단이 아닙니다. 하나는 옳고 하나는 그른 게 아닙니다. 둘 다 똑같이 유효하니까요.









불균형을 창조하는 건 바로 판단입니다. 따라서 수용하는 겁니다.



두려움을 변형 시키는 것에 대한 수용, 두려움 그 자체에 대한 수용, 두려움을 억누르지도 말고, 굳이 표현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껴안고 당신 자신의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 이제 분명해졌습니까?









당신이 이것을 직접 요리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케이크를 만드는 일과는 다르니까요. 먼저 이해를 해야만 합니다. 어느 방향으로 그저 따라가는 것과는 다릅니다. 자기 자신의 지혜와 더불어 터득하게 되어 있는 것이군요.









정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매우 간단한 요리법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알라. 자신이 신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모든 것들은 저절로 따라 오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참으로 자신을 사랑하게 되면,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될 것이니까요. 당신이 곧 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당신 밖에 있는 모든 것이 신성의 반영임을 알게 됩니다.









나의 에고가 너는 완전치 않다거나, ‘너의 이런 나쁜 면을 보라’고 다그칠 때는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









벗이여, 당신 자신의 모든 면이 당신이라는 신의 표현임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 자신의 모든 국면은 신성의 표현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니까요. 옳고 그른 것은 없습니다.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저는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선입견을 갖고 있고, 거기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모든 문제가 거기서 발생해요.









사랑하는 이여, 당신은 완전합니다.









나의 에고가 완전하다고요? 내 모든 면이 완전합니까?









벗이여, 그것이 완전함에 대한 인류의 한계입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완전함에 대한 당신들의 정의는 완성된 대상을 뜻하고, 원래 완성되어 있는 것을 뜻하지요.



 하지만 우주에는 완성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존재하지도 않을 겁니다. 심지어 신조차도 말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우주 안에서 경이로운 춤을 추면서, 자신이 모든 것임을 이해하는 과정으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당신은 여성이면서 동시에 남성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한 겁니다.



사랑을 주는 것은 소위 남성 에너지라 불리는 것이고, 사랑을 받아들이는 건 여성 에너지입니다. 당신들은 대부분 주기보다는 받아들이는 것을 더 어려워합니다.







보다 높은 진동 주파수를 지닌 존재가 보다 높은 수준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수준의 높낮이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기술적, 과학적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들의 세계가 4차원으로 진입해 감에 따라 더 높은 주파수로 들어서게 되면, 물리적 밀도는 더 옅어지게 됩니다. 옅은 밀도를 지니게 되는 거죠. 더 높은 주파수는 점점 빛이 되고, 그리하여 지구의 변형이 일어나게 됩니다.



모든 원자와 분자가 보다 옅은 밀도를 지니게 될 것이고, 그 안에 빛을 창조하게 될 겁니다. 이런 일은 인간에게만 국한 되지 않고, 식물이나 동물 할 것 없이 지구 전체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은 공명 현상을 변화 시켜, 더욱 더 빛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됐나요, 사랑하는 이여?









어느 정도는요, 그러나 충분치는 않습니다.









그렇겠죠. ‘당신은 지금 이 순간 빛의 존재’라고 할 때, 우리는 당신 자신의 다차원적인 국면을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지금 당시에 모든 것이니까요. 당신들이 사용하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단어는 시공 연속체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시공 연속체 밖에서는 그것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그러니 당신이 진동 주파수라고 부르는 자아의 여러 국면들은 과거, 현재, 미래와 더불어 존재합니다.



당신의 다차원적인 국면들은 시공 밖에 있다고 이해하실지 모르지만, 좀 다른 방향에서 보면 그건 시공 안에도 존재합니다. 당신의 본질은 모든 방향을 다 포함합니다. 당신은 한 순간에 모든 방향으로 다 퍼져있으며, 한 순간에 모든 시간의 범주에 다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제 좀 충분해졌나요?









정말 맘에 드는군요.









음, 그럴 겁니다. 당신이 과거, 현재, 미래에 참여하는 방식도 그와 같습니다. 당신은 다차원적인 진동 주파수의 여러 국면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더 가볍고, 더 빛나는 진동주파수에 말입니다.



 당신은 또한 소위 실현 가능한 현실들에 참여하기도 하고, 다른 모든 시공 연속체의 실현 가능한 자아들에 관여하기도 합니다. 당신은 매우 바쁜 존재인 것입니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다른 모든 국면에 대해 지나치게 관심을 쏟을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만 알면 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인류의 다차원성을 지적으로 이해하면 할수록, 이 세상엔 분리된 게 없음을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프타아, 아무런 분리가 없는 것 같긴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물리적 현실에선 뿔뿔이 분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말이에요. 저는 저와 분리된 다른 사람들을 봅니다.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이해하는 건 너무 어렵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이 지금 하는 일은 변혁에 대비하여 자신을 준비시키는 것이고, 언젠가는 진정으로 하나됨을 느끼는 순간이 올 겁니다.









프타아, 어느 날 눈을 떠 보니 제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기억이 났어요. 이제 막 시간도 공간도 없는 곳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걸 느낄 수 있었어요.









사랑하는 이여, 사실 당신이 온 그곳의 광대함은 시공을 완전히 초월합니다. 소위 본래의 나, 신이라 할 수 있는 볼텍스의 안쪽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이 여러분이 돌아가야 할 곳입니다. 물론 여러분 모두는 그곳에 존재합니다. 이것이 바로 패러독스지요.









에너지, 그것이 전부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만물은 자신의 특정 주파수로 에너지가 전환된 것이군요.









어떤 진동수라도 전환이 가능합니다.









어떻게 이 근원으로부터 아이덴티티, 정서, 그리고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이 나올 수 있습니까?









그건 그저 측량할 수 없는, 가늠할 수 없는 에너지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이 세상엔 당신네 물리학자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형태의 에너지가 존재합니다. 신도 에너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에너지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영혼도 에너지입니까?









그렇습니다. 벗이여.









그렇다면 영혼은 에너지의 운반자이고, 정신은 에너지이겠네요.









그렇습니다. 









다른 진동 주파수입니까?









모든 것이 다 에너지입니다.









정신이란 무엇입니까? 에너지입니까? 특별한 에너지?









그렇습니다. 모두가 다 특별한 에너지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신, 전체성, 근원으로부터 왔으니까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진실로 분리된 건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그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인 것뿐입니다. 그 모든 걸 자기 자신의 작은 상자에 가둬놓고 있는 셈이죠.









저는 꿈속에서, 감옥에 갇혀서 그 감옥을 탈출하려고 시도하는 꿈을 꾸곤 합니다. 그런데 항상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근본 원인을 찾아보려고 해도 일상 속에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이미 정답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 몸에 갇혀 있는 죄수이고, 거기서 빠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당신 스스로 빠져 나오기를 바라는 것들이 있으니, 당신은 죄수임이 분명합니다. 사랑하는 이여, 나는 당신이 어서 빨리 죄수라는 사실을 껴안기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프타아, 이건 다른 여인의 질문인데 그가 어려워해서 제가 대신 물어보는 겁니다. 만사가 순조롭게만 진행되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이럴 경우 어떻게 하면 그 불행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지 말씀해 주세요.









놀라운 합작품이 아닌가요? 당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모든 것을 다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사고가 닥치다니 말입니다. 삶을 창조하는 당신의 방식은 경이로워서, 때로는 당신으로 하여금 ‘도대체 내가 이 일을 무엇 때문에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왜 이 일을 당해야 하지?’라고 반문하게 만드는 상황을 곧잘 만들어 냅니다.









당신은 날이면 날마다 진정 무엇을 창조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신의 신념 체계와 정서적 반응의 차원들 위에는 칸칸이 또 다른 차원들이 있다는 것, 그것을 당신으로 하여금 명백하게 깨닫게 하기 위한 상황들을 스스로 창조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숨 한번 들이쉬고 내쉬는 것에도 다차원적인 진실이 포함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게 되기까지 그 여정을 스스로 창조하는 겁니다.



그래서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의문 부호를 창출하는 일을 겪게 되는 겁니다.



사고를 당하게 되면 ‘내가 왜 이 일을 당해야 하지? 어떤 의미가 있는 거지?’하고 스스로 묻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죠. ‘그걸 어떻게 느껴야 하죠? 이 사고로 저는 무엇을 느껴야 하나요?’



이 세상에 사고란 없습니다. 사고란, 여러분의 이해력의 껍질을 벗겨서 앎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여,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가르침을 배워나가는 데 있어 그렇게 심각해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상기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절박한 상황을 창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벼운 기분으로 대하도록 하세요.



 그리 심각하지만 않다면, 사고를 당하는 것이 건강에 적신호를 받는 것보다 더 낫습니다.



제 말을 이해하시겠어요? 삶은 그토록 심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심각하기를 원한다면 저는 별로 상관없습니다. 심각한 것도 절대적으로 유효하니까요.









자, 이제 여행을 떠날 시간이군요. 그렇다고 영원한 작별은 아닙니다. 여러분을 만나는 게 매우 즐겁고 다음에 또 만날 것을 고대합니다.



모든 것이 신이고, 여러분 또한 그렇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축복하세요.



왜냐하면 여러분은 본래 우주 전체에 빛을 발하는 광휘의 반영입니다. 여러분도 곧 본래 자신이 신임을 알게 될 겁니다. 우리는 단지 여러분이 인내심을 좀더 발휘하여 수련해 주기를 청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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