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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의 비밀]- 윤회로부터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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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北斗七星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61.♡.132.5), 작성일 04-12-12 23:38, 조회 4,288,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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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ar Cayce (1877-1945) - "The Sleeping Proph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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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의 비밀(속편)/장경각 (1990)



에드가 케이시 (*미국의 영적 능력자, 1877.3.18-1945.1.3.)는 자기최면투시의 상태에서 환자의 육체적 병의 원인을 알아내 의학적인 처방에 대한 확실한 진단을 하는데, 이것을 피지컬 리딩 Physical Reading 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육체의 질병만이 아니라 온갖 삶의 고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를 투시함으로써 그 고난의 원인이 현생(現生)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먼 전생(前生)에서 비롯된 카르마 (Karma, 業) 때문임을 밝혔는데, 이것을 라이프 리딩 Life Reading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윤회의 비밀 Many Mansions"이라는 저서는 에드가 케이시의 라이프 리딩에서 저자인 지나 사미나라 Dr. Gina Cerminara 박사의 조사 연구서입니다. 이 책에서 “윤회로부터 탈출”을 같이 봅시다.




윤회로부터 탈출



서구인인 우리들에게 윤회설은 새롭고도 낮선 개념이다. 동양인들에게는 윤회란 해가 뜨고 지는 것만큼이나 오래고, 자기 집 문턱만큼이나 친숙한 개념이다.


특히 힌두교와 불교라는 두 개의 고대 전통종교는 윤회설에 대해 가르쳐오고 있다. 우리가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상당히 많다. 힌두교와 불교 두 종교는 권위 있는 두 권의 책에 근거한다. (그중 힌두교의 성전은 불교의 성전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그리고 그들 성전은 그것의 신봉자들 편에서도 해석상 이견이 있어왔다).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그 책들은 믿는 사람들의 역사와 성격에 따라 변색되어 왔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두 믿음 사이에는 윤회설에 대한 기본적인 가르침에 있어서 차이점이 많이 있을 것이라 예상하게 된다. 그들과는 기질이 다르고 역사적 내력이나 종교적 배경이 다르며 그들과는 별개의 중요하면서도 새로운 과학적 지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의 가르침을 적용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음을 우선 알아야 한다.


힌두교와 불교의 유사점과 차이점에 관한 연구에는 엄청난 매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중요한 점, 즉 자연적이고 궁극적인 영혼의 문명에 관한 그들 간의 관전 상의 차이 이외에는 여기서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힌두교에서는 아트만 Atman 이라 부르는 영원한 실체를 믿는다. 그들은 이 아트만이 긴 일련의 윤회를 거친다고 말한다. 아트만은 낡은 옷을 벗어버리듯이 헌 육체와 개성을 벗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트만의 궁극적인 운명은 완벽, 환희, 기쁨이라는 것이다. 크리쉬나는 바가바드기타에 있는 그 유명한 구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현명한 자들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다. 나는 단 한번도 존재하지 않을 때가 없다. 당신도 그렇고 또 어떤 왕도 역시 그렇다. 우리에게 끝나버릴 미래는 없다. 육체는 죽는다고들 한다. 그러나 육체를 소유하는 그것은 영원하다 .... .” 이런 견해와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불교의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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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자들은 신체나 사고나 감정을 포함하여 우주 안의 모든 것은 변화의 상태에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즐겨 영혼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변화하기 마련인 습관과 애착의 혼합물이다. 그러므로 불멸의 영혼 같은 것은 실제로는 없다고 불교 신자들은 말한다. 욕망과 애착 때문에 환생을 하고 또 차례가 되어서 환생할 다른 자아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그 자체의 개성도 없이 전체 안에서 궁극적으로 상실되고 마는 그런 현상을 계속 이어가는 망상적인 자아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존재의 목적은 이런 자유와 이런 재흡수 상태를 달성하는 것이다.


케이시의 관점은 이 점에 있어서 불교신자보다는 힌두교도들의 견해에 더 가깝다. 힌두교도들처럼 케이시도 연속적인 각 화신(化身)의 일시적 개성을 초월하고 그보다 오래 사는 실체, 또는 자아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영원한 실체에 그는 “실재(entity, 實在)” 혹은 “영적 자아(soul-self)"라는 이름을 붙였다.


더구나 실재로서의 우리의 운명은 “신의 동료이자 신과의 공동 창조자”가되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마침내 신과 하나가 되고 완전성을 이룬다 할지라도 우리는 바로 그 시간의 끝까지 혹은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의 끝까지 개성을 유지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듯하다. 우리는 삶이라는 바다와 하나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바다에서 우리를 상실한다기보다는 바다가 우리 안으로 들어 왔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바다에 어떤 방해물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각 영혼의 유산은 그 영혼 자체가 바로 영혼이라는 것과 또 신이라 부르는 창조력과 동일한 것임을 아는 것이다”라고 케이시는 말한다.


여가서 케이시의 견해는 기독교 정설과는 상반된다. 그렇지만 불교신자들보다는 기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더 인정을 받는다. 이것은 우리의 기독교 전통이 암암리에 개인의 영원성 쪽으로 기울도록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기 때문인 것 같다. 아니면 우리가 기질상 자아의식에 꽤 많이 집착해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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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우건 케이시의 견해는 불교도들보다는 더 행동적이고 야심적인 기질을 가진 서구세계의 우리들에게 더 긍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불멸의 실체에 대한 생각은 우리가 느끼는 고통이나 분투가 쓸모없고 헛된 것만은 아니라는 확신을 준다. 그리고 우리의 목표를 계속해서 추구할 용기를 준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한 실체를 믿건 믿지 않건 피할 수 없고 부인할 수 없으며 계속해서 우리를 따라 다니는 한 가지 사실, 즉 인간이 고통 받는다는 사실만은 남아있게 된다. 우리는 인간 생활의 특징인 고통과 좌절로부터 벗어나서 결국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을까? 출구(出口)는 어떤 것일까?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사회적 해답이 있다. 기술가 정치, 사회주의, 공산주의 같은 체제가 있다. 이런 체제는 좀더 공정한 사회적 경제적 분배 질서를 통해 인간의 고통을 종결지을 수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 체제에 대해 편견 없는 연구를 해보면, 그 체제는 각기 이론상 여러 장점을 갖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런 체제들이 각기 주장하는 것을 모두 실행할 수 있다고 가정할 지라도, 그리고 보편적인 안전과 보편적인 교육의 축적된 심리적 결과를 위해 최대한의 시간을 그 체제를 위해 허용할지라도 그들이 정말 그들의 약속을 이행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그것이 의문시되는 것은 인간의 비극이 전적으로 물질적 성질의 것이 아니며 보편적인 풍요로움이 인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세계에서 허영스럽고 오만하고 게으르고 무책임하고 천박하고 시기하고 악하고 탐욕스럽고 무절제하고 아량 없고 성미 급하고 잔인하고 앙심에 차있고 소유욕 강하고 권력에 굶주리고 지배적이고 우둔하고 근시안 적이고 이기적이고 째째하고 게걸스럽고 위선적이고 불안전한 인간인 한, 우리는 차고 안에 두 대의 차와 한 대의 왜건을 가지고 있고, 도시와 시골에 집이 있고, 먹고 싶은 온갖 음식이 있어도 우리 자신과 남에게 서로 비극만을 안겨줄 것이다.


위대한 종교적 지도자들은 이런 심리적 문제를 알고 있었고, 위대한 종교체제도 동시에 그러한 심리적 체제였다. 내면세계를 완벽하게 하지 않으면 외부세계를 절대 완벽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비극을 벗어나는 출구는 결국 우리의 고통의 근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것이다.


예수도 그렇게 가르쳤다. 석가도 그랬고, 크리쉬나도 그러했다. 불교나 힌두교의 심리적 체계의 골간을 이루는 윤회법칙을 우리 시대를 위해 재론(再論)하는 것이 에드가 케이시의 위대한 사명이었다. 동시에 길과 진리와 인생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교양 있는 세대에게 논리적으로 재확인시켜 주는 것도 케이시의 사명이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이것이 기독교 정신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인데, 케이시는 윤회와 카르마의 법칙에 대한 지식이 우리의 해방과 구제에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또 윤회와 카르마의 법칙이 삶을 분명히 바라보고 전체적으로 바라보는데 있어서, 그리고 우리를 자유롭게 할 진리를 알게 하는 데에도 중요하고, 이 짧고도 흔히 이해하기 힘든 인생에 대해 적절하고 총명한 시각을 갖도록 하는데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윤회에 관한 초기의 리딩에서 간결하게 말했다.


“어떤 한 사람은 어떤 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였기 때문이다” 윤회에 관한 또 다른 초기 리딩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삶은 본질적으로 정신적인 힘이며, 그것은 계속성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똑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정신성은 계속적인 경험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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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의 어느 구절은, 석가의 제자였던 아난다와 석가 간에 오갔던 카르마를 주제로 한 대화를 보여준다. “이 인과의 법칙은 얼마나 깊은가! 그것은 얼마나 깊어 보이는가!..... .” 아난다가 외치자 석가는 대답한다.


“그렇게 말하지 말게나, 아난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구. 이 인과의 법칙은 정말 깊지. 깊게 보이기도 하구. 허지만 그것은 알지 못해서 그렇고,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고, 세상 사람들이 실타래처럼 뒤엉키게 된 이 인과의 법칙을 꿰뚫지 못해서 그렇고, 고행의 길을 건너지 못하고 또 끊임없이 돌고 도는 환생을 넘어서 지나가지 못한데서 그렇다”


석가모니처럼 케이시도 윤회와 카르마에 대한 무지(無知)가 정신적 진보에 방해가 된다는 것과 반대로 윤회와 카르마에 대한 지식이 굉장히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는 듯 했다. 이런 지식 없이는 고상하고 아름답고 유익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신앙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윤회에 관한 지식 없이, 혹은 윤회를 모르거나 믿지 않으면서도 위대하고 성스럽기까지 한 삶을 영위해 왔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진화의 어떤 단계에 이르면 인생과 인간을 전반적으로 완벽히 이해하기 위해서 윤회에 관한 지식이 꼭 필요한 것 같다. 자아의 궁극적인 회계는 과거의 찌꺼기를 궁극적으로 걸러내고 또 과거를 의식적으로 변질시키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러한 지식이 꼭 필요한 역사적 단계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여러 곳에서 드러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케이시가 이 지식을 중요시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분명한 추론으로 더 명료해진다. 즉 케이시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안 치료사로서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의 문제에 그러한 정보와 조언을 해주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사실은 또한 케이시가 윤회에 대한 지식이 단지 지식이라는 가구의 한 부속품으로써 중요하다든가,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의 카르마에 대해 아는 것이 단지 한가로운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직접적인 인용문에서 분명해진다.


“당신이 살다가 죽어서 당신의 할머니의 정원에 있는 벚나무 아래 묻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내는 것이 단신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이웃, 시민, 아버지, 어머니로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전생에 불친절하게 말하고 그 때문에 괴로워하고 현재에 고칠 수 있다면 그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는 1937년 행한 리딩에서 날카롭게 말했다. 이 같은 의미 있는 말은 윤회의 진실을 믿고 자신의 전생에 대해 무언가를 알아내려고 몹시 애쓰는 많은 사람들에게 의미심장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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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자기 전생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1). 최면술, 회상, 자유연상, 이산화탄소 요법 등을 사용해서 과거를 재현하거나 회상하는 것이고, (2). 투시나 영매를 통해 그것을 아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방법 모두 각기 장점과 단점, 강점과 약점이 있다. 그 어느 쪽에도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 또 심리적인 이익은 물론 심리적인 해도 있을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은 착각이나 기만, 두 가지 가능성은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정보의 입수 방법이야 어떻든 어떤 전생에 관한 그럴듯한 정보의 신빙성과 가치를 판별하는데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이것이다. 즉, 내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현세에서 수정할 방법을 보여주는, 아니면 자기 자신을 보다 깊이 이해하도록 하는 일련의 우연한 사건들이 자료 속에 분명히 있는가?


개성이란 전생의 옷은 확실히 중요하다. 승복(僧服)은 그것을 입은 사람에게 어릿광대가 입은 옷과는 다른 영향을 미칠 것이고 다른 경험의 영역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 개인의 심리다. 현재의 삶을 복잡하게 만들고 현재의 삶의 특징을 이룬 그 성격의 핵심을 모른다면, 한 인간이 고급 매춘부였는지 왕이었는지, 혹은 미시시피강의 사공이었는지 알사스 로렌의 농부였는지 또는 캄보디아의 사원 무희였는지, 캘리포니아 금광 채굴업자를 아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어느 누구건 사람들은 자기가 영웅이거나 악한이 된 사랑, 배신, 복수, 후회, 횡사, 그리고 인간의 흥망성쇠의 오페라 줄거리를 생각해 낼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전생과 현세간의 도덕적 인과 관계의 관점에서 보는 심리적 타당성이 없다면 즐거운 환생의 연극 이상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통찰력을 얻는데 더하여 그 통찰력을 나날의 생활 속에 끓여 넣으려는 의지가 없다면 이것은 어떤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가치는 없다.


케이시는 한 인간이 카르마의 속박에서 자유로와 지는 방법으로써 이 생활의 행동을 강조했다. 그런데 이 행동은 우리의 이상, 목표, 생각, 일, 식사습관, 음주습관, 말, 사람을 대하는 태도 같은 삶의 각 분야와 관계가 있다. “그의 신분이 무엇이었느냐가 아니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하여 무엇을 했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케이시는 자신의 과거지사에 대해 지나치고 헛된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실, 케이시는 이보다 할 발 더 나아가서 지식, 그 자체는 악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살아있지 않는 지식은 죄가 됩니다” 그는 반복해서 말했다. “기억하십시오. 지식 혹은 지혜의 나무(에덴동산의 중앙에 있고 그 열매를 아담과 이브가 먹었기 때문에 낙원에서 쫓겨났음)를 찾는 것은 죄악입니다. 당신이 아는 것을 신의 영광을 위해 이용하는 것, 그것이 옳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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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지식과 올바른 행동으로 그 것을 응용하는 것은 우리가 처해있는 혼란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중요한 두 요소가 된다. 전자는 마음의 요소이고, 후자는 의식의 요소이다. 우리는 세 번째 중요한 요소가 영혼 혹은 사랑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의 생각이 옳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노니 너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예수가 강조한 말을 따라 케이시는 사랑이란 이 세상의 슬픔, 망상, 유혹들로부터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것임을 주장했다. 케이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혹은 “예수의 이름으로” 혹은 “예수를 위하여” 또는 “그리스도 의식으로” 무엇인가 하려는 사람들에게 이런 표현을 썼다.


그런 표현들은 동물적인 이기심을 초월하여 남의 이익을 앞세우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즉 그런 표현들은 동물적인 이기심을 뛰어넘어 모든 피조물에 대한 사심 없는 사랑을 쏟아야 한다는 생각을 “신비롭게” 혹은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이었다.


우리는 이제 충분한 호기심을 가지고 신성한 삼각형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세상에서 자유를 얻고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힘, 즉 원래부터 우리가 타고난 세 가지 속성들을 이용해야 한다. 또 과학도 추구해야 한다. 무지나 맹신은 인간들에게는 가치가 없다. 우리는 의지를 가지고 우리가 발견한 그 법칙과 우리 자신 사이의 지혜로운 조화를 이룩해야한다. 그러나 영혼으로서는 사랑을 추구해야한다.


만약 찾기만 하면, 우리는 이런 개념과 불교와 힌두교에서 발견한 구원 개념사이에서 흥미로운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물론 사랑이란 기독교에서는 물론이고 힌두교나 불교의 성전에서도 직간접적으로 발견된다. 사실상 사랑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기독교에서보다 힌두교나 불교에서 더 많이 실행되어 왔다. 불교도들은 그들의 오랜 역사를 볼 때 기독교도들이 범한 이단자 탄압이나 “마녀”박해나 종교전쟁과 같은 잔학행위를 저지른 적이 없었다. 동물학대방지협회란 단체는 힌두교 국가나 불교국가에서는 들어 본적도 없고 또 필요하지도 않은 말일 것이다.


그러나 정신력으로서의 사랑, 힌두교나 불교신자들이 해방을 얻으려고 애쓸 때 성취하는 것과 매우 비슷한 영혼의 태도를 우리가 궁극적으로 취하게 된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만약 우리에게 사랑이 있다면 헌신적인 힌두교가 일하는 것과 똑같이 세계의 일을 시작하는 우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각대신 예수의 생각으로 대치하여 모든 일을 한다면 우리는 석가의 표현대로 비애의 수레바퀴와 끝없는 탄생과 사망의 굴레에 우리를 묶고 있는 자기 집착이라는 망상적인 틀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위의 세 가지 신앙 간의 유사성을 발견하면서 무한히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침착하지 못하고 호기심 많은 마음이 동양의 양대 종교와 기독교 간의 해방 기술이 비슷하다는 것은 일단 서로 확인한 데서 만족하고 나면 보다 큰 과제가 우리 앞에 놓이게 된다. 즉 오늘날 이런 방법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우리 생활에 적용하는 문제, 다시 말해서 어쩌면 특히 사랑을 적용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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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시스에 관해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그가 어느 날 정원에서 괭이질을 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묻기를, 만약 세상이 그날 밤으로 끝나버릴 거라면 무엇을 하겠는지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성 프란시스는 잠시 동안 생각하더니 이윽고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 정원을 계속 일구고 있을 겁니다” 성 프란시스가 이탈리아의 햇빛이 비치는 어느 비탈에서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끔직한 지구 파멸의 위협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의 침착한 말을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세계 대전, 수소 폭탄, 자연 재해, 대륙 붕괴. 이런 것들은 생각만 해도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을 인생 무상에 빠져들게 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


외부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나는 여전히 관리인, 즉 나의 내면세계의 유일한 관리인인 것이다. 내 생각이나 감정, 그리고 행동은 전적으로 나의 영역인 것이다. 행운이나 불운에 대한 나의 반응, 또는 전쟁과 평화, 결핍과 풍요, 미혼과 기혼, 남성과 여성, 그리고 성공과 실패, 아름다움과 추함, 승자와 패자, 지배적 인종과 피압박 인종, 약한 체격과 강한 체격, 내성적 성격과 개방된 성격, 그 어떤 경우건 이들 모든 경험은 기회이자 시험이자 내가 구원을 얻기 위해 사용해야하는 재료인 것이다. 우리들 모두는 의심의 여지없이 이 같은 서로 반대되는 한 쌍을 거쳐 지나가는 긴 여행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조상 대대로 유산이다. 이 상황은 우리의 정원이다. 우리들은 부지런히 그것을 일구고 가꾸어야 하는 것이다.



<출처: 행성활성화 커뮤니티/ 박남술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