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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를 입지않은 의식에너지로부터의 메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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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Bartholomew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11.♡.37.156), 작성일 03-12-27 12:08, 조회 3,92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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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메시지의 발원지는 바톨로뮤(Bartholomew), 즉 지상에서 육체를

입고있지 않은 의식에너지적 존재로서 '우주 근원의 한 줄기 은빛'이라 하겠다.

이 메시지를 전달한 채널은 마거릿 무어로 미국 뉴 멕시코 타오스에 거주하며

15년간 바톨로뮤 에너지와 협동해 일하고 있다.


번역은 후기 기독교 신학 연구소('지금여기' 1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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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모임 초기에 저는 상존하는 에너지의 모습을 묘사해 보았습니다. 다양한 색깔을 지닌 채, 기묘한 소리 또한 딸린 파도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 색깔은 투명하고 강력하며, 소리는 상상을 넘어가는 생동감과 깊이를 지녔습니다. 그리고 이 장엄하고도 놀라운 에너지 파도 속에는 수십억의 광점(光點)이 들어차 있습니다.



이제 이 파도는 어떤 매질(媒質)을 통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 '어떤 것'이란 순수지각 (pure awareness)을 말합니다. 순수 지각은 파도가 아닙니다. 파도는 순수한 의식적 지각입니다. 무슨 차이가 있느냐구요? 순수지각에는 형태가 없습니다. 어떤 모양도, 형태도 없는 까닭에 허공이라고 불립니다. 그 때문에 공(空)이라, 잠재력이라고도 합니다.



이 허공 한복판에 장엄하고도 광대한 파도가 놓여있어, 형태가 없는 허공 속으로 뻗어나가며 또한 그것에 의해 떠받쳐 있는데 여러분들은 바로 파도의 한 부분입니다. 이 허공을 하느님이라는 말로 부르는 것은 제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신관(神觀)을 형성하고는 그의 모습과 그의 음성과 그에 관한 느낌을 저마다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느님은 형태가 없는 게 아니죠. 무형적인 실체를 인격화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인격화된 실체란 높은 자아라 부르는 것으로써, 내가 안전과 보호를 얻기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로해주고 이해해주는 어떤 형체와 이어졌다는 감을 얻기 위해서 찾아가는 낯익은 처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형태를 지닌 것을 논할 때, 우리는 순수한 의식적 지각에 관해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인격화된 하느님은 한 형체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가 말하는 에너지의 파도도 한 개의 형태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두 경우를 다같이 순수한 의식적 지각이라고 치는 것입니다. 반면에 순수 지각은 모든 것이 평형상태에 있어 완전 정지에 놓여있는 처소입니다. 그곳은 잠재력의 총화를 내포하고 있는 곳이며, 이 말은 그 적막한 '어떤 것' 내부에 의식의 '모든' 잠재력이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이 잠재력이 그 어느 태초에 움직임과 색깔과 소리와 차별성과 뻗어나감과 움츠려 터짐 등을 경험하고 싶을 때 의식이 출현했습니다. 순수 지각 안으로부터 파워(power)의 폭발이 일어났던 것이지요. 그 이래로 여러분들은 이 흥겨운 의식의 파도를 타고 있는 중입니다.


친구들이여, 여러분들께서 올라선 이 여정은 결코 작은 여정이 아닙니다. 그 폭발이 스스로를 인식하기 위한 여러 상이한 방식을 창조해냈듯이, 이제 그 의식의 개별적인 부분도 저마다의 잠재력, 생명, 실재성, 정체성을 창조해 낼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간혹 이런 과정의 놀라운 희열과 경이를 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것이든 창조는 하나하나가 똑같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들께서 살아가고 있는 삶은 각자의 눈에 어떻게 보이든 간에 창조된 다른 이의 삶과 똑같이 중요하고 가슴 설레는 것이고, 확대돼 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의 일은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경험할 수 있는가에 관한 직선적이며 굳어버린 개념들을 깨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시공 연속체에 사로잡혀 있는 연유로 해서 사람들은 눈앞에 놓인 현실이 바로 자기가 매순간 창조해내는 것이라는 섬광적인 인식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를 바라볼 적마다 서로를 창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진술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타인을 창조하는 것이고 타인에 대한 나의 반응 뿐 아니라 나에 대한 타인의 반응마저 내가 창조하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여러분들은 순간순간의 창조에 연계된 신기함을 잃어버렸습니다. 반복되는 패턴에 고착되어버렸기 때문이지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지난날에 일어났던 사건에 관한 기억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고 그 일들을 떨쳐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에너지 파도에 떠있는 미물 중의 하나로 인지하고 있습니다. 남은 시간동안에 제가 여러분에게 바라는 것은 그 미물의 협소하고 제약적인 시야로부터 인식의 초점을 거두어들이고, 다른 분야의 의식으로 옮겨놓는 수완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와는 판이한 그 무엇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와 묵상과 관조가 모두 실효를 거두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지요.



이 가운데 어느 것이든 충분한 시간을 들여 해본다면, 작은 자아라는 인식을 벗어버리고, 대신 그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 자체로 화할 뿐입니다. 의식적으로 자신의 인식을 작은 자아로부터 떼어내고, 의식적으로 보다 넓은 인식 영역에 놓음으로써 그 영역 내부에 있는 것들과 자기정체성의 보다 넓은 부분을 경험하게 됩니다.



의식의 모든 영역, 심지어는 잠재력의 지극히 고요한 중심부분에 있는 순수지각까지 지금 여러분에게 열려 있습니다. 거기에는 한계란 없습니다. 물론 스스로 지어낸다면 모르지만. 그러므로 어떤 제약으로부터도 언제고 내 의식을 거두어들이고, 보다 큰 데로 옮겨놓아 큰 자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아무리 많은 제약을 창조해도 무방합니다. 밤중에 사막이나 산 속이나 바다에 떠 있을 때 별들을 쳐다본다면 가끔 자신이 그 모든 것의 한 부분으로 느껴지지 않습니까? 홀연히 자신에 대한 몰두로부터 벗어나, 넓은 의미로 보다 광대한 에너지의 장(場)속으로 몰입하게 됩니다.



이런 일이 '타의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지는 모른다 해도, 임의로 이런 전환을 경험했으면 하고 바랄 것입니다. 지난 번 두번의 모임에서 우리는 의식의 확장이라는 것을 해보았습니다. 각자의 의식을 벽에 닿게, 그리고 벽 너머로 가게끔 늘리는 것을 해보았습니다. 이렇듯 작은 스케일로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는 순간, 큰 스케일로도 못할게 없구나 하는 생각에 미치면, 가슴 설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기초적인 의식 기술을 연마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의식이 어디에 맞추어져 있든지 그것을 거두어들이고, 보다 광대한 공간에 맞추는 것을 연습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별개의 공간을 느끼십시오. 거의 자동이 되도록 계속적으로 연마하십시오. 생각할 필요도 없어질 때 가서는 여러 생각에 맞추었던 주의를 멈추고, 광대함 자체에 주의를 집중시키십시오.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을 즐기는 것은 어느 순간이겠습니까? 예술가의 존재가 개입되지 않을 때 예술이 일어납니다. 곧 붓놀림이라든지 색깔에 대한 생각이 없는데도 창조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순간에 예술가는 보다 광대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별개의 공간에 빠져드는 능력이 크면 클수록, 그 작품은 그만큼 위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 고흐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는 그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머리가 혼란을 일으켰던 것은 사실이지요. 그가 '별이 빛나는 밤'과 같은 그림을 그리던 경험으로부터 현실로 재돌입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의 기본적인 신념은 지구 차원의 삶이 고통스럽고 재정적으로 낙망스럽다는 것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제약적인 신념으로부터 자신의 의식을 별이 있는 영역으로 옮겨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우주의 운행을 체험했고 또한 다른 이들도 그것을 '볼 수 있도록' 재창조했습니다. 이것이 의식전환의 선명한 예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 모두들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일까요? 여러분 모두는 이미 매순간 예술가들입니다. 그러니 눈앞에 진행되는 것은 무엇이거나 내가 창조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에 가슴 설레어 보십시오. 자신의 의식을 붓처럼 잡고 순수지각이라는 물감에 담궜다 창조의 붓놀림으로 매순간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그림이 어떻게 보이길 바라십니까? 원하시는 대로 창조하십시오. 무엇을 사용하시렵니까? 의식과 순수 지각을 사용해서 형태를 산출할 것입니다. 뭇 공식 중에서 가장 간단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 지각 + 집중된 의식 = 형태.



여러분 자신은 인식의 매체입니다. 지각이 의식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 바로 여러분들이지요. 이 둘의 차이를 인식하고 자신 안에 있는 두 실체를 느껴보도록 하십시오. 그렇다고 지각을 알기 위해 의식을 떠날 필요는 없습니다. 의식으로 창조된 어떤 것도 이미 지각이라는 질료를 사용했기 때문이지요. 부디 다음과 같은 순차를 따라 보십시오. 개개의 창조는 여느 창조와 동일한 양의 지각을 그 안에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선한 창조인가 악한 창조인가, 좋은 생각인가 나쁜 생각인가고 계속 판단한다면 요점을 놓치고만 것이다. 요지는 날로 더 나은 창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창조할 수 있는 전적인 능력을 지니고서, 이 순간에 존재한다는 희열과 순발적인 기쁨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도 여러분은 제 말을 믿지 않으시겠지요? 그러니 몇 가지 난제를 다루어보기로 합시다. 가령 여러분에게 어떤 물리적인 잘못이 있다고 칩시다.



이제 제가 나타나 여러분 스스로 그것을 단숨에 변화시킬 수 있다고 알려준다면, 응당 이렇게 대꾸하겠지요: '내 의견이라든지 반응 또는 감정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는 압니다. 허나 매우 구체적인 이 자연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킵니까?' 제약을 경험하는데 있어 주된 한 요인은 시간과 공간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구차원에 오기로 선택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 기본적인 사실 때문입니다. 이곳에서는 사물을 자라게 하는데도, 없애버리는데도, A지점에서 B지점에 닿는데도 시간이 걸립니다.



이렇듯 물리적 차원에 있는 창조물은 시간을 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루하지 않은 전체 인간적 여건에 관여된 주제곡, 곧 '시간은 실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들 믿지 않습니까?



누구나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고 내가 말한다면, 여러분은 '이동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고 하면서 한사코 내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먼저 방법을 배워야 할 텐데, 그러는데도 시간이 걸린다'며 수긍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문제를 좀더 가까이서 살펴봅시다.



눈을 감고 잠시 시간을 들여 각자가 실생활에서 창조해내고 싶은 물상을 속으로 지어내 보십시오. 아무리 세속적인 항목이라 하더라도 개의치 않겠습니다. 바퀴 네짝에 경적이 달린 자동차도 좋습니다. 그 물건이 무엇이든지 잠시 시간을 들여 그것을 정말로 손으로 만지듯이 하십시오.



규칙 제 1 조 : 각자가 선정한 바를 창조해 낸다는 생각에 가슴 설레어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더러 창조가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진정한 열정이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상당한 양의 열정 없이는 어느 것도 창조할 수 없는 법인데, 이는 창조가 바로 열정적인 사태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여러분은 제게 이렇게 말하겠지요. '난 암을 창조하는데 열정적이지 않았소!' 허나 십중팔구 암을 초래할 제약적인 생각들을 지어내는데 매우 열정적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창조의 본질적인 소재입니다. 그러니 기억해 두십시오, 열정을! 그러면 보다 큰 열정을 어떻게 일으킵니까? 원하던 정황이 사실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 어떤 기분일까하고 눈으로 그려보고 느끼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 그것은 어떤 모습, 어떤 기분일까하고 날마다 형상화해 가야 합니다. 시공적인 제약 때문에 이런 일은 한번 해 가지고서 즉시 일어나길 기대할 수 없는 사항입니다. 연마하셔야 합니다.



입버릇처럼 내게는 그것이 없지 한다면 그 없는 상태를 창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말하는 대신 다음부터는 아래와 같이 말하십시오 : '몸이 완쾌되어 해변을 거닌다면 그 기분이 어떨까? 그 느낌에 젖어들어 보겠다.' 눈으로 그리고 알알이 느끼십시오! 이제 그 다음 부분을 이해하는 것이 요체입니다. 상이한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상이한 에너지 영역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에 사랑이나 건강과 같은 것을 창조하려 했을 때, 여러분의 대다수는 양극적인 에너지라 불리는 데를 향해 간 것입니다. 사랑을 있다가도 없고, 사물은 창조하는데 시간을 요하며, 모든 육체는 나이를 먹을 수밖에 없고, 상실은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보는 에너지 폭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가 떠날 때나 돈을 창조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때 또는 병에 걸릴 때 이상할 게 없습니다.



양극적인 것 (질병과 건강, 사랑과 이별) 보다 큰 어떤 것을 창조하길 원한다면, 보다 광대한 에너지가 가용될 수 있는 주파수에 자신을 맞추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그 창조에 사용할 수 있는 '질료'입니다. 수년간 저는 여러분에게 앉아 고요히 있으라고 말해 왔습니다. 육체와 정신과 감정 일체의 메커니즘을 잠잠하게 할 때 순수 지각인 이 별개의 창조적 에너지를 인지하게 됩니다.



그것은 세포와 정신과 감성 내부에 있어서 매순간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그것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할 리 만무입니다. 이것이 바로 청컨대, 여러분이 떨어져 들어가야 할 다른 종류의 에너지입니다. 한 순간에 아무 생각 없이, 어떤 차별이나 형태 없이 순수지각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런 에너지 장(場)이 사랑과 건강에 관한 '새로운'느낌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어떻게 이 에너지 장에 접근합니까? 멈추고, 순수지각 속으로 떨어지고, 느껴야 합니다. 한 시간 동안에 할 수 있는 한 여러번 이 과정을 되풀이하십시오. 멈추고, 떨어지고, 느끼란 말입니다! 이 열망을 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지니고 산다면 하느님의 작고 고요한 목소리라는 것을 듣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음성은 고요할 수 밖에 없겠지요.



그리고 그것이 작은 듯한 이유는 육체의 소리, 감정의 소리, 정신의 소리에 주위를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이르는 길은 끊임없이 멈추고 그 안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옳게 하는 방식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하십시오! 그런 과정 중에 창조가 일순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편집자주

메시지의 발원지(source) : 바톨로뮤(bartholomew) - 지상에서 육체를 입고 있지 않은 의식 에너지적 존재로서 우주 근원의 한줄기 은빛 음성으로 전달한 매체(channel) : 메리 - 마가렛 무어(Mary-Magaret Moore) - 미국 뉴멕시코 타오스에 거주하며 15년간 바톨로뮤 에너지와 협동해 일해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