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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과 태극, 태극기(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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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태극인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61.♡.34.2), 작성일 04-05-09 16:07, 조회 3,98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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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과 태극, 태극기(1/2)





태극(太極)이란 하늘과 땅이 처음 형체를 이룰 때를 말한 것이다. 이 태극이 움직여 양(陽)을 낳고, 움직임이 극에 달하면 고요해지며, 고요함은 음(陰)을 낳고, 고요함이 극에 달하면 다시 움직이게 되는데, 한면 움직이고 한번 고요함이 극에 달하면 다시 움직이게 되는데,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함이 서로 그 뿌리가 되어 음으로 분리되고 양으로 분리되어 양의(兩儀)가 존립하게 되는 것이다.


양이 변하고 음이 합하여 수, 화, 금, 목, 토 다섯 기운을 낳고, 이 다섯 기운이 순하게 퍼져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가 행하게 되니, 오행도 하나의 음양이요,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며, 태극은 무극에 근본한 것이다.


오행가운데 토는 주재자리이며, 춘하추동 사시는 다른말로 생장염장(生長斂藏)이라 하며 역철학으로 우주1년의 정신을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 한다. 사시(四時) 곧 사계절의 시간대 정신이 우주의 창조원리를 보는 핵심이다. 이 하늘과 땅의 4계절의 창조원리가 생장염장(生長斂藏), 즉 탄생 - 성장 - 성숙 - 휴식인 것이다. 천지의 만물창조의 유일한 법칙은 낳고(生)-기르고(長)-성숙(斂)-휴식(藏)하는 순환과정이다.



인류문명사는 지금 만물의 분열과 성장 시간대에서 대통일의 성숙시간대로 들어서는 제3의 가을대개벽기에 처해 있다.



오행의 낳음이 그 성질을 각각 하나로 했으나 무극의 진실함과 음양오행의 정밀함이 묘하게 합하고 뭉쳐 하늘의 도(道)는 사내를 이루고 땅의 도는 계집을 이루어 두 기운이 교감(交感)하여 만물을 화생(化生)하고 만물이 낳고 낳아 변화가 무궁한 것이다.


오직 사람이 그 빼어만을 얻어 가장 신령스럽고 형상이 이미 생기매 정신이 발하여 알며 인, 의, 예, 지, 신 다섯 성품이 느끼고 움직여 선악을 분별해 모든 일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성인이 바른 도리와 인의로써 정하고 고요함을 위주로 하여 사람의 법을 세웠다. 그러므로 성인은 천지로 더불어 그 덕이 합하고 해와 달이 그 밝음에 부합되며 사시가 그 차례에 합하고 귀신이 그 길흉에 영합하니 군자는 닦아서 길하고 소인은 거스려 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의 도를 세워 말하기를 음과 양이라 하고 땅의 도를 세워 말하기를 강함과 부드러움이라 하며 사람의 도를 세워 말하기를 인(仁)과 의(儀)라 하는 것이다.



이렇듯 태극이라는 말은 천지창조에서부터 사시의 운행, 만물의 무궁한 변화와 생성, 그리고 인간사 도덕윤리의 기본을 다 내포하고 있다. 콩을 상징하는 태(太)자와 법을 상징하는 극(極)자 두 글자일 뿐인데 말이다. 그러기에 조선시대에 학문을 가르치는 향교, 서원 등의 정문이나 효자, 충신, 열녀의 정문(旌門)에는 반드시 태극을 그려 이로써 만고불변의 진리를 표시하였다.


왜정시대 왜인학자들도 이 표시에 대해서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면서도 우리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태극이라는 말을 아예 입에 올리지도 못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태극을 형상한 그림이 크게 그려져 있는 향교 정문 앞에는 반드시 학교를 세워 그 그림이 감추어지게 하였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해방이 되고 나서야 그 그림이 바로 태극인 줄을 알았다고 한다.



태극기는 만고불변의 이치를 표시한 그림을 중심으로 네 모퉁이에 천(天:남편), 지(地:아내), 수(水:中男), 화(火:中女)를 상징하는 건(☰), 곤(☷), 감(☵), 리(☲)를 그려 만든 것이다. 즉, 옛 복희씨의 유법을 그린 갓집 밑의 팔괘에서 장남, 소녀, 소남, 장녀를 상징하는 진(☳), 태(☱), 간(☶), 손(☴)을 뺀 사괘만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이 네 모퉁이의 괘 배열에 문제가 있는 것은 바로 하늘과 남편 또는 군주를 상징하는 건(☰)괘가 윗 모퉁이에 있고 땅과 아내 또는 신하를 상징하는 곤(☷)괘가 맞은편 아랫모퉁이에 있어 역(易)에서 말하는 천지(天地)비(=不+밑변에 口)괘의 형상을 이룬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어 음양의 조화를 이루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역의 이치는 이와는 정반대이다.



천지비괘는 하늘을 상징한 양(☰)의 기운은 위로 올라가고 땅을 상징한 음(☷)의 기운은 아래로 내려가기 때문에 천지가 화합하지 아니하고 만물이 생육되지 못한다. 또한 인간은 위아래의 마음이 화합하지 못하여 덕이 높은 군자가 바른 도리를 행하려다가 소인이 항상 방해하므로 군자는 초야(草野)로 밀려난다. 때문에 소인의 도는 퍼지고 군자의 도는 없어져 나라는 멸망한다.


사람은 인(人)자의 형상처럼 마주 의지하여 서로 도우면서 살아가는 본성을 지니고 있는데, 천지비괘는 이러한 인간의 본성이 거부된 상태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이러한 천지비괘를 가리켜 무방(無邦), 불순(不順), 미완(未完)의 괘상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 천지비괘를 뒤집어 놓는다면 하늘이 아래에 있고 땅이 위에 있는 지천태(地天泰)괘가 된다. 이를 언뜻 생각하면 천지가 뒤집힌 형상이라 하여 매우 불길한 것으로 느끼기 쉽다. 그러나 역의 이치는 기운과 정신을 말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하지 않는 법이다. 즉 하늘과 땅의 무한한 기운과 정신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지천태괘는 글자 그대로 하늘의 마음이 땅으로 내려와 땅을 생각해주고 땅의 기운이 하늘로 올라가 하늘을 돕는 천지상교(天地相交)의 형상이다.



이를 인간에 비교하여 말하면 상하상교(上下相交)에 해당된다. 즉 군자가 핵심부에 있어 바른 도를 마음껏 펴나가고 소인의 도는 소멸되어 자취를 감추는 괘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가 융성하고 발전하는 가장 이상적인 괘상이다. 다시 말하면 나라의 운수가 꽉 막혀 비(不 +아래변에口)색(塞)한 형상을 말한 천지비괘와는 달리, 지천태괘는 나라의 운수가 물 흐르듯이 국민들의 뜻과 같이 되는 현상을 말한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운세를 태운(泰運)이라 이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태(泰)자는 바로 콩을 뜻하는 태(太)자와 그 발음이 같고 흔히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는 글자이다. 그래서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하라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이라는 말을 쓸 때에도 바로 이 태(泰)자를 쓰고 있는 것이다.



<참조 : 한자는 우리글이다(中)/박문기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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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강국이 될 수 있었던 배경??? - (청국장의 역사)




청국장의 역사는 고구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니까 1400년 정도 된다고 한다. 옛 고구려와 발해의 땅이었던 만주 지방에서 말을 몰고 다니던 우리의 선조들은 콩을 삶아 말안장 밑에 넣고 다니며 수시로 먹었다고 하는데, 말의 체온(37∼40℃)에 의해 삶은 콩이 자연 발효된 것이 청국장의 원조다.


이후 이 청국장이 한반도 전역으로 내려와 서민의 유용한 단백질 공급원이자 왕가의 폐백식품으로 널리 애용되었다. 우리나라 문헌상의 기록으로는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 '시( )'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다. 서기 683년, 신라의 제 31대 왕인 신문왕이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맞을 때의 폐백 품목에 이'시'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신라의 제 30대 왕인 문무왕이 서기 671년, 당나라의 장군 설인귀(薛仁貴)가 웅진도독부를 설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보낸 항의문에 "웅진 길이 막혀 염시(鹽 )가 바닥났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 염시(삶은 콩에 콩 누룩을 섞어 소금물에 담갔다가 발효시켜 말린 것)가 지금의 청국장이다.



청국장에 대한 또 다른 문헌 기록으로는 조선 숙종 때의 실학자 홍만선(洪萬選)이 1715년에 쓴 일종의 농업백과사전인 ≪산림경제(山林經濟)≫가 있는데, 이 책에는 '전국장(戰國醬)'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766년 조선 영조 때 유중림(柳重臨)이 ≪산림경제≫를 증보하여 펴낸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도 '전국장'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대두를잘 씻어 삶은 후 고석(볏짚)에 싸서 따뜻한 방에 사흘간 두면 실이 난다"고 하면서 청국장 만드는 법을 상세히 기술해 놓았다.


또한 고구려에서는 청국장이 '고려장(高麗醬)'으로 불렸고, 발해의 문헌에도 '책성시'라는 청국장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자료를 종합해볼 때 청국장은 우리 조상들이 삼국시대 이전부터 애용해온 전통식품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게 된다.



☞ 고구려가 강국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한 고찰



고구려의 주변국가나 민족의 침입시나 다물정신으로써 영토수복을 꾀할 때 벌였던 전쟁을 수행할 시 군량미 中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던 것이 콩과 전국장(戰國醬), 또는 고려장이라고 불리우는 지금의 청국장이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특별한 도구나 기술 없이 빨리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최고의 영양식이자 부식으로 인식되었기에 '전쟁이 있는 나라에서 먹는 장'이라는 의미의 '전국장(戰國醬)'이란 명칭을 붙였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전쟁과 밀접한 관련으로 전국장이라 불리웠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청국장이란 말을 지금 China의 동북부 지역(청국장 같은 비슷한 것이 없다)이나 일본(낫도라 함)에서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쓰는 유일한 말임을 상기할 때 청국장이란 말은 순수 우리말임을 알 수 있고, 또한 그 말은 처음에 전국장이라고 쓰였던 말이 음운변화를 일으켜 청국장이라는 말로 변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상 고구려가 강국이 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콩의 종주국이었다는 것에서 비롯되어짐을 알 수 있으며, 세계 최고수준의 기동력을 갖춘 기마군단과 그 기동력을 뒷받침해 줄 수 있었던 군량음식(이역시 기동력을 뒷받침해 줄 수 있었던 최고의 군량음식)이었던 콩『고려장(전국장 또는 청국장)』이 있었음을 살펴봄으로써 당시 동북아시아 최대강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됐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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