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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1부~1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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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별하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9.♡.199.19), 작성일 08-01-31 19:24, 조회 7,392,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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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게재했던 기독교에 관한 글입니다

세계적 기독교 미래학자 레너드 스윗 인터뷰 [중앙일보]

2007/06/01 00:55



미국에선 매년 1월 '가장 영향력이 큰 크리스천 리더 50인'(처치 리포트 조사)을 발표한다. 세계적인 기독교 미래학자 레너드 스윗(60.드루 신학대 석좌교수) 박사는 올해 8위에 올랐다. 10위권 안에서 신학자는 그가 유일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11위, 한국에서도 유명한 릭 워렌 목사가 16위였다. 1위는 베스트셀러 '긍정의 힘'의 저자인 조엘 오스틴 목사가 차지했다.

지난주 방한한 스윗 박사를 23일 그의 숙소에서 만났다. "올해 8위에 올랐네요"라고 인사하자 그는 "단순한 수치일 뿐이다. 일종의 인기 투표라고 생각한다"며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처치 리포트'(미국 기독교 월간지)의 순위는 20만 명이 넘는 미국 기독교인이 참여해 결정된다. 신뢰성이 높은 투표 결과다.

-당신은 기독교 미래학자로 불린다. '미래'를 말하기 전에 '현재'를 말한다면.



"나는 종종 교회와 스타벅스를 비교한다. '스타벅스에 따른 가스펠(Gospel according to Starbucks)'이란 책까지 썼다. 스타벅스는 단순히 커피를 파는 곳이 아니라, 커피에 대한 '경험'을 파는 곳이다. 자세히 보라. 스타벅스에는 참여가 있다. 소비자가 원하는 걸 골라서, 원하는 블렌딩을 한다. '내 커피'를 고르는 것이다. 소비자는 수동적으로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 그럼 교회는 어떤가.



"지금껏 교회는 너무 지도자 중심적이고, 신도들은 너무 수동적이었다. 이제 교회의 주도권을 평신도와 세상에 돌려줘야 한다. 이제 교회가 '우리의 문화 속으로 들어오라'고 하던 패러다임은 끝나야 한다. 앞으로는 세상이 바라는 모습으로, 세상이 요구하는 모습으로 교회가 변해야 한다."



- 어떻게 변해야 하나.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미래란 성경에 나타난 교회 본래의 모습(Original Operating System)을 말한다.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도, 미국도 마찬가지다."



- 미래를 말하지만, 젊은이들은 갈수록 종교에 흥미를 잃지 않나.



"그렇지 않다. 교회에 대한 관심을 잃은 것이지, 예수님이나 성경에 대한 관심을 잃은 것이 아니다. 교회를 컴퓨터에 비유하면 불필요한 소프트웨어와 바이러스가 너무 많이 들어가 있다. 교회 자체가 문제이지, 예수님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 예를 든다면.



"내게 열여섯 살 된 아들이 있다. 그 아이가 입고다니는 티셔츠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더라. '주여, 제발 당신을 따르는 일부 사람들로부터 저를 구원해 주세요. (Please, Jesus save me from some of your followers)' 그게 젊은이들의 정서다."



- 그럼 어디에서 간격이 벌어졌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왕국(God's kingdom)이 온다'고 했다. '하나님의 왕국=하나님의 꿈'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꿈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길 바랐다. 그런데 교회는 '하나님의 꿈'을 '우리의 꿈, 혹은 나의 꿈'으로 바꾸어 버렸다. 성지를 빼앗고자 숱한 피를 흘렸던 십자군 전쟁이 대표적인 예다. 하나님의 성지, 하나님의 영토가 도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바로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꿈'은 어떻게 찾을 수 있나.



"예수님은 '나의 가르침을 따르라(Follow my teaching)'고 하지 않았다. 대신 '나를 따르라(Follow me)'고 했다. 예수님은 '가르침'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주러 온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원리와 원칙, 주장과 교리에 집착하면서부터 예수님 말씀에서 멀어진 것이다."



- 다시 가까워질 수 있나.



"있다. 하나님께선 인간에게 동.서양적인 마인드를 함께 주셨다. 그러나 서양에선 예수님 말씀을 쪼개고, 나누고, 분석하고, 해체했다. 늘 이원론적인 방법으로만 접근했다. 선과 악, 밝음과 어둠, 높음과 낮음으로 나누었다. 이런 서구적인 방식을 통해선 한계가 명백하다. 동양적인 마인드가 열쇠다."



- 동양적인 마인드란 뭔가.



"동양적인 마인드는 원형적이다. 시작과 끝이 하나다. 예수님은 늘 동.서양적 마인드를 함께 던졌다. '나는 가장 큰 자요, 또 가장 작은 자다' '나는 평화를 주러 왔고, 동시에 칼을 주러 왔다'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라'고 했다. 예수님 말씀은 철저히 반(反)이원론적이다. 그 반이원론적인 정서와 토양이 바로 동양에 있다."



- 서구의 설교는 그렇지 않나.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이해를 못 했다. 요즘에 예수님처럼 설교하는 이가 있다면 설교학 강의에서 'F학점'을 받을 것이다."



스윗 박사는 '새'를 예로 들었다. "우리 딸아이는 숲 교실에서 새를 봤다. 날아가는 새를 따라가고, 우는 소리를 듣고, 자연의 서식처에서 살아 움직이는 새를 봤다. 그런데 실험실의 생물학자가 보는 새는 다르다. 죽은 새를 올려놓고 생물학적 지식을 총동원해 해부한다. 과연 둘 중 누가 '새'를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죽어있는 새보다 살아있는 새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는 '건전지' 얘기도 덧붙였다. "건전지에는 음극과 양극이 있다. 둘이 만나야만 에너지가 생긴다. 떨어지면 아무런 힘도 못 낸다. 음과 양, 이런 식의 사고는 서구적인 사고가 아니다. 서구에선 참과 거짓 등 늘 상반된 사고가 있었고, 둘 중 하나를 가려내야 했다."





-그럼 동양은 문제가 없는 건가.



"그렇지 않다. 기독교 역사는 오랫동안 서구가 주도했다. 그리고 동양은 서구 교회를 받아들였다. 동양의 교회도 서구 교회를 닮고 있다. 이건 심각한 문제다. 동양도 동양을 발견해야 한다."



- 우리는 일상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란 말을 자주 한다. 그럼 '믿는다'의 의미는 뭔가.



"'믿음'의 원어는 그리스어로 '피스티스(pistis)'다. '신뢰'란 뜻이다. 그건 철저히 '관계적'인 의미다. 그런데 많은 교회가 그걸 믿어야 하는 신앙의 원리로 바꾸어 버렸다. 사람들은 기독교 '교리'만 믿으면서 '믿는 사람(신자)'이라고 말한다. 지적(知的)으로 아는 것은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 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관계를 맺는다'란 무슨 뜻인가.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이건 남편이 아내를 아는 것과 같은 의미다. 두 사람이 가지는 가장 긴밀한 관계를 안다는 것이다. 히브리어에 '야다(yada)'란 말이 있다. 부부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서로 알 때 쓰는 말이다. 바로 이처럼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게 신앙이다. 그럴 때 '믿는다'라고 하는 것이다."



- 예수님을 찾아야 관계를 맺을 수 있지 않나.



"물론이다. 예수님은 오늘도 살아 계시다. 우리 안에서, 우릴 통해서 살고 계시다. '내가 거기에 있었는데 예수님은 안 나타났다'고 말하는 건 오만한 얘기다. 내가 어딜 가기 전에 예수님은 가 계시고, 내가 누굴 만나기 전에 예수님은 그 안에서 이미 살고 계시다. 중요한 건 예수님이 살고 있는 걸 발견하는 것이지, 내 생각 속으로 예수님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다."



- 관계의 단절은 어디서 시작됐나.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에게 하나님이 물었다. '어디에 있느냐'. 아담과 이브는 '우리는 숨어 있습니다'라고 했다. 인간과 하나님의 단절, 그게 첫 번째 단절이다. 또 우리 자신과의 단절, 그게 두 번째 단절이다. '선악과는 왜 먹었느냐' '이브가 시켰습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단절, 그게 세 번째 단절이다. '이브야, 왜 먹었느냐' '뱀이 시켰습니다.' 이게 네 번째 단절이다. 인간과 창조물과의 단절, 즉 자연과의 단절이다. 이 4가지 단절을 회복시키려고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다."



- 당신은 종교와 과학을 함께 말한다.



"물론이다. 양자역학이나 현대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한 마디가 뭔가. 바로 '관계(Relationship)'다. 하나님도 그렇게 존재한다. 관계적으로 존재한다."





백성호 기자VANGOGH@JOONGANG.CO.KR



◆ 레너드 스윗 박사 = 교회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다. 미국 뉴저지주 드루 신학대의 부총장을 지냈다. '소울 츠나미' '아쿠아 처치' '소울 살사' 등 30여 권을 책을 냈다. 특히 '소울 츠나미'는 미국에서 50만 부가 팔렸다. 100개가 넘는 논문, 600여 개의 설교문도 출판했다. "미국에서 레너드 스윗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교회 지도자를 상상할 수 없다"는 수식어가 따라다닐 정도다. 





  [공개토론] 도올 김용옥 Vs 기독교 신학자  

2007/05/14 11:17



[한겨레] 김광식 교수 “도올이 말하는 것은 짝퉁” 반박

원로 신학자 “이런 열기는 처음 본다”



새로운 성서 해석을 제기해 기독교계 안팎에 파문을 빚어온 도올 김용옥 세명대 석좌교수가 저명한 기독교 신학자들과 공개 토론회를 열었다.



11일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 감신대 백주년기념관 1·2층 홀은 신학토론회가 시작된 오후 3시 전 이미 방청객 700여명으로 복도까지 가득 차 출입문을 봉쇄해야 할 정도였다. 토론회에 온 신학계 원로 유동식(85) 전 연세대 교수도 “반평생 넘게 신학토론회를 다녀봤지만 이런 열기는 처음 본다”고 했다.



토론에선 그동안 교계에서 금기시된 쟁점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외국과 달리 보수 교계의 입김 때문에 자유로운 성서 해석 논쟁이 억눌려 왔던 한국에선 드문 일이었다.



▶ 도올 발제문: “종교는 더이상 ‘이해없는 신앙’강요 말라”



▶ 이정배 교수 토론회를 열면서: “예수에 대한 뭇 해석에 열려진 태도 필요”



“도올은 짝퉁” - “그런 생각이 교회 망쳤다”

도올-기독교 신학자들 공개토론회 ‘후끈’



도올이 먼저 자신의 주장을 발제하자 원로 신학자 김광식 박사(전 연세대 교수)가 그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김 박사는 ‘믿음’보다는 ‘이해’를 강조하는 도올의 주장을 두고 “설교자의 목적은 신자들을 지혜롭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게 하려는 데 있다”며 “(도올과 같은 주장은 이미) 독일의 칸트와 18~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에도 있었다”고 말했다. 김 박사는 “도올이 말하는 것은 짝퉁이고, 다시 한 번 더 보니 싹둑 잘라내어 버리는 ‘싹둑 복음’이다”라고 공격했다.



이에 도올은 “김 교수와 같은 생각이 교회를 망쳤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에 새로운 계기가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런 신학 체계는 너무 나이브하다”고 했다. 젊은이들은 과학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고, 억압할 수 없는데 그런 식으로 하면서 건물만 지으니 교회가 공동화되어 간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 여러 신학적 담론을 수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올은 “‘역사적 예수’도 ‘이것’이라고 한마디로 얘기(규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제 말을 ‘싹둑 복음’이라면서 왜 저라는 사람을 (다른 면은) 싹둑 잘라버리고 규정해버리느냐”고 언성을 높였다.



토론은 ‘인간과 신성(神性)’을 둘러싼 대목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는 “한국 기독교는 문자적으로만 해석해 신이 33년간 (인간의) 몸으로 살다가 본래로 돌아갔다고만 하는데, 그것은 고대엔 흔해 빠진 논리였다”며 “다른 인간과 달리 예수만이 신의 화육(몸을 빌려 옴)이라는 교리가 예수에 대한 이질감을 불러온다”고 했다. 그러자 김광식 교수는 “그럼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고 김경재 교수의 주장에 이의를 달았다.



이에 도올은 “저도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다 100%씩 갖고 있다고 인정하지만 (예수뿐 아니라) 인간도 100%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요한복음의 하나님은 인격체가 아니라 진리로서의 하나님이이서 깨달을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100%로 본다. 그런 진보적인 측면까지 해석하지 않는다면 신학자가 아니며, 솔직히 말해 그런 것을 수용해도 하나님 앞에 겸손해질 수 있다”며 김경재 교수 편에 섰다.



현장에서 방청객들은 도올과 신학자들이 발언할 때마다 박수를 보내며 토론에 열띠게 참여했다. 한국 신학계의 숨통이 열리는 날이었다.







▶ 도올 발제문 전문: “종교는 더이상 ‘이해없는 신앙’강요 말라”



1. 나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나는 한국인이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공화국이며 민주시민사회의 모든 원칙을 준수한다. 나는 민주사회의 한 시민이며 개인이다. 내가 말하는 기독교는 매우 단순한 이런 전제들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대한민국에서 살고있는 사람들의 기독교의 이해방식에 관한 것이다.



개인적이고 내면적이지만 사회적 가치도 거부 안해



2. 그렇다고 나의 기독교에 관한 논의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나 어떤 국적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나는 종교와 국가의 어떠한 유기적 관계도 거부한다. 종교는 오히려 그러한 국가적 질서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개체의 내면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종교는 궁극적으로 사회적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것이며, 제도적이라기보다는 내면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종교가 사회적 가치, 즉 보편적 가치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한 시민의 실존의 선택이나 결단 대상일뿐



3. 나의 기독교에 관한 논의는 매우 단순한 나의 실존적 사실, 즉 내가 민주시민사회의 한 시민이라는 원자적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즉 기독교는 어떤 종족이나 국가의 이해를 대변하는 구속적인 제도가 될 수가 없으며 나 개인의 실존의 선택이나 결단의 대상일 뿐이다. 대한민국이 한 종교의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있을 수 없으며 오로지 대한민국사람이 구원을 얻을 뿐이다. 그 사람은 개인이며 시민이다. 시민사회는 인간 개인(individual)의 존엄을 지상의 가치로 삼는다. 개인이 신이라는 존재자에게 복속되는 제도적?법적 권위는 전무하다.



기도는 집단적인 게 아니라 나의 실존과 하나님이 만나는 것



4. 종교의 초기 제식행위는 대부분이 집단적인 것이었다. 부족집단의 춤(tribal dance) 같은 것이 가장 보편적인 형태였다. 아프리카의 민속춤이나 우리나라의 영고(迎鼓)·무천(舞天)이 모두 그런 류의 것이다. 그러나 현재 기독교의 핵심적 신앙행위는 기도이다. 기도는 집단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며 그것은 나의 내면 속에서 나의 실존과 하나님이 만나는 것이다. 예수도 기도를 가르쳤다. 기독교는 이미 출발부터 개인적인 것이었다.



기독교가 구약적 율법주의 따른다면 유대교의 아류일뿐



5. 기독교는 민족종교가 아니다. 유대민족의 모든 제식(할례, 절기 준수 등)이나 혈통주의적 관습의 강요를 거부하는 데서 출발했으며, 이방선교를 통해 초대교회를 구축했다. 그것은 “예수”라는 신념을 선택한 개인들의 공동체운동이었다. 그리고 기독교는 출발부터 유대민족의 율법주의를 거부했다. 어떠한 종교도 율법주의를 거부하지 않고서는 위대한 종교가 될 수 없다. 공자도 기존의 의례(儀禮)의 권위를 거부한 사람이었고, 불타도 베다의 권위를 거부했다. 기독교가 이제 와서 구약적 율법주의를 직접적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유대교의 아류일 뿐, 기독교가 아니다.



교회는 교리가 아닌 사랑 믿음 소망 생존의 공동체운동



6. 나는 교회를 공동체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이 공동체운동의 기본이념은 교리가 아니요, 사랑, 믿음, 소망, 생존과 같은 아주 보편적 정서(emotion)이다. 교회운동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배타성(exclusiveness)이다. 그들이 받아들이는 교리 이외의 어떠한 종교적 신념도 다 배제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교리라는 것은 대부분 후대의 역사적 정황 속에서 형성된 것이며 성서적 근거가 박약하다. 이것이 조직신학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독교의 배타성도 유대인의 다이애스포라와 유사한 피박해집단의 역사적 특수상황에서 비롯된 아폴로제틱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이 곧 기독교의 본질은 아니다.



유교·불교·토속 무교 등 종교신념체계와 공존해야



7.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오늘 여기에서의 나의 실존을 생각할 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공동체는 기독교라는 교리집단에만 국한될 수는 없다. 유교, 불교, 천도교, 원불교, 토속 서낭당 무교, 이슬람, 여타 다양한 종교신념체계와의 공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들 모두가 인간 내면의 고독(solitude)을 해결해가는 나름대로의 방식을 보유하고 있다. 만약 한국의 기독교가 이러한 공존을 배제하는 독존만을 고집한다면 나는 그러한 기독교에는 일순간도 나의 에너지를 할애할 수 없다.



종교는 나쁜 것이며 악한 것 일 수 있다



8. 종교는 반드시 좋은 것이라는 아주 단순한 발상이나 강박관념을 우리는 버려야 한다. 종교는 나쁜 것이며 악한 것일 수 있다. 종교는 인간의 모든 야만성의 마지막 보루일 수도 있다. 종교가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아름다운 사회일 수가 있다. 단지 우리가 이러한 사회를 꿈꿀 수 없는 이유는 종교를 통하여 형성되어온 인류문명사의 기나긴 관성 때문이다. 그러나 어차피 종교는 인간세를 장악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해가고 있다. 그러한 거대한 추세 속에서 인간세는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가 고려사회를 장악하고 유교가 조선왕조를 장악하고 기독교가 20세기 우리민족의 식민지역사를 장악한 그러한 강력한 장악성을 21세기부터는 기대할 길이 없다.



어느 한 시점에서의 성서 정본 존재하지 않아



9. 기독교는 2천 년 동안 서서히 형성되어온 것이다. 이 말은 곧 어느 한 시점에서의 기독교의 모습이 기독교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형성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1세기의 기독교, 4세기의 기독교, 16세기의 기독교, 21세기의 기독교가 모두 동등한 자격을 지니는 기독교일 뿐이다. 성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한 시점에서의 성서의 정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4세기말에나 모습을 드러낸 27서체제의 성서나 20세기 한글판개역성경은 동일한 자격을 지니는 신약성서의 다른 판본일 뿐이다. 신학도들이 기준으로 삼는 희랍어성서도 19세기말에나 그 모습이 갖추어진 것이다. 희랍어성서 자체가 2천 년 동안 진화해온 것이다. 현재의 27서체제의 성경이 기독교의 유일한 기준이라는 생각도 매우 유치한 발상이다. 가톨릭은 아직도 성서에 근거가 없는 많은 후대의 추가전승을 교리로 신봉하고 있다.



종교적 합리화의 재소통 거부하면 사기꾼의 횡포



10. 나는 기독교의 “이해”(Understanding)를 위하여 상기의 책 2권을 썼다. 이해를 전제로 하지 않는 “믿음”은 간편하고 또 아름다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위태롭다. 그러한 믿음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믿음을 가능케 하는 역사적 환경이 필요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더 이상 핍박받는 종교가 아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이 기독교를 발생시킨 그러한 절박한 상황의 강도를 계속 유지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제식으로부터 출발한다. 반복적 제식은 특별한 감정을 수반하며, 그 감정은 신앙을 유발한다. 그리고 제식은 신화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신화는 합리화된다. 이 합리화단계에서 우리가 말하는 조직적 종교가 발생한다. 그런데 모든 종교적 합리화(Rationalization)는 인간의 체험에 관한 정보를 선택적으로 수용하며 그 정보에 대하여 독특한 권위를 부여한다. 나는 이러한 합리화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의 자유로운 지식의 장 속에서 무전제적으로 다시 소통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을 거부하면 그것은 천박한 독단일 뿐이다. 현대시민사회에서 독단을 중세세기방식의 도그마틱스로서 유지하려는 것은 사기꾼들의 횡포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 새롭게 활성화시키는 촉발제 역할 자부



11. 나의 “이해”의 노력은 한국의 기독교를 새롭게 활성화시키는 촉발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자부한다. 21세기의 종교가 “이해없는 신앙”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양아치적 권위의식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시민사회의 논리에 의하여 무기력하게 될 뿐이다. 나의 “이해”가 많이 대중에게 읽힐수록 21세기의 한국기독교는 희망이 있다. 성서는 이제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이다. 이해 속에서 우러나오는 믿음만이 21세기를 버텨낼 수 있다.



교회가 신학자의 신념과 언어체계를 콘트롤하면 안돼



12. 나는 기독교에 기웃거리는 이방인이 아니다. 나는 한국기독교의 핵심 인사이더로 살아왔으며 기독교의 가치를 체화한 패밀리 전통 속에서 성장해왔다. 나는 나의 진리탐구가 이 사회의 많은 건강한 기독교운동을 촉발시킬 수 있기를 염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신학계가 자유로운 담론의 장을 확보해야 한다. 교회는 신학자들의 신념이나 언어체계를 콘트롤해서는 안된다. 교회라는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현실적 관심이 신학의 자유로운 개화(開花)를 질식시켜서는 아니된다. 모든 교회는 훌륭한 신학자를 양성하는 데 교육장학금으로서 최소한 십일조를 내어야 한다. 그것은 교회 존립의 이유며 양식(良識)이며 의무다. 그리고 교육헌금에 대하여 일체 이념적 클레임을 해서는 아니된다. 한국교계의 생명력은 오직 자격있는 신학자와 수준높은 목회자의 양성에 있다고 나 도올은 굳게 믿는다.



도올 김용옥

2007년 5월 11일 밤

駱閒齋에서 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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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김경재 교수가 본 ‘도올-한기총 신학 논쟁’ 기독교 제대로 알기 

2007/03/03 01:27

“구약폐기론 잘못이지만 뜻 받아들여야”

김경재 교수가 본 ‘도올-한기총 신학논쟁’

“보수교계 정치참여, 하나님 빙자한 강자 동조

‘거듭나기’ 도올주장에 교권 흔들려 음모 몰아”





  조연현 기자 장철규 기자 



 



»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장철규 기자



 



우리나라 기독교 신학계의 대표적 지성인 김경재(67) 한신대 명예교수가 지난 21일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최근 도올 김용옥 교수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논쟁에 대해 입을 열었다. 최근의 논쟁은 김 교수가 〈교육방송〉 인터넷 요한복음 강의와 〈한겨레〉 인터뷰 등을 통해 보수 교계의 정치참여 행태를 비판하고, 성서적으로는 구약 폐기를 주장하면서 촉발됐다. 이에 한기총은 “교회 매도 음모”라며 도올의 주장을 맞받고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보수·진보 가릴 것 없이 기독교의 정치참여를 경계하되, 최근 보수 교계의 정치참여 행태를 “하나님을 빙자하며 강자에게만 동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보수 기독교 ‘정치적 메시아주의’ 강하게 비판

“시시콜콜 시비 말고 큰틀에서 비판 받아들여야”



도올이 제기한 구약 폐기론에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보수 기독교계가 시시콜콜한 것을 시비삼지 말고, 큰 틀에서 한국 기독교의 생명력을 살려 한국 기독교와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크게 기여하는 종교로 거듭나게 하려는 (도올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개방적 성찰’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지 않고 “현재의 모습을 고수하겠다면 결국 한국 기독교도 죽고, 한민족도 불행해지고, 세상에도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문일답이다.



»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장철규 기자



-도올은 기독교인들이 거대한 압력단체를 만들려 한다며 기독교의 정치 참여를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나 보수 기독교는 진보 쪽이 70~80년대에 참여한 것은 로맨스고 우리가 하면 불륜이냐고 반박하기도 한다.



=70~80년대엔 약자들을 아무도 대변하지 않았다.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런 비상한 상황이 끝나면 종교인들은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자의든 타의든 논공행상에 참여했다. 그것은 옳지 못하다. 또 우파들은 안보를 위해 한-미 동맹이나 자유시장 경제 체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등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며 강자에게만 동조하고 있다. 이것은 특정 이데올로기이지 성서의 정신이 아니다.



-도올이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 구약의 야훼는 수없이 사람을 죽이고, 질투하고 화낸다. 예수가 신약에서 ‘아버지’라고 한 분과 구약의 야훼가 같은 분인가. 이런 질문이 신학계에서 있어 왔는가?



=당연히 있었다. 도올이 질타하는 것은 오직 유대민족만을 위해 타민족을 죽이는 부족신 개념에 대한 맹신일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예언자들은 ‘야훼는 그런 분이 아니’라고 수없이 얘기했다. 자식 열둘 가진 부모가 있다고 치자. 정상적인 부모라면 가진 것도 없고, 장애를 가진 자식에게 가장 마음이 쓰이게 마련이다. 유대인들이 나라를 잃고 애급의 노예로 끌려가 그토록 고초를 받을 때 그들을 긍휼히 여긴 것이다. 그들만이 특별해서가 아닌 것이다.



-그래도 신의 편벽한 모습이 성서에 비침으로써 반목과 전쟁의 역사를 부채질한 것이 아닌가?



=구약도 솔로몬과 다윗 등 왕권이 성립된 뒤 편집된 것이다. 제왕 전승이 자리를 잡으면서 그런 제왕적 모습을 부각시켰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도 야훼의 전지전능성, 제왕적인 모습을 강조하는 게 현실 아닌가?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도 야훼야말로 진짜 신이니, 환웅, 환인, 제석신,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등 다른 신을 모두 쫓아내고 이 땅을 야훼가 제패하는 것처럼 묘사한 게 사실이다. 한국 기독교가 하나님의 종교로서 선교 사명을 갖고 있다는 정치 메시아니즘도 구약을 밑바닥에 깔고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것으로, 그런 잘못된 신관(神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야훼는 어떤 신인가?



=야훼는 제왕적 신이 아니다. 야훼란 말의 뿌리를 추적해 보면 ‘긍휼히 여기는 모성적 고통, 산고의 진통에 동참하는 이’다. 한반도의 초기 백성들이 교리적 도그마가 아니라 아무런 선입관 없이 성경을 읽다 보니 어렴풋이 그런 어머니 같은 하나님이 느껴져서 마음속으로 공감해 이를 주체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모두가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은 것이다.



-제왕처럼 하늘 위에 앉아 지배하는 하나님이 아니란 말인가?



=섬김과 봉사를 통해 정의와 평등을 이루는 분이다. 일제나 미국 극우주의자들처럼 침략하고 세상을 제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견강부회하며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메시아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신관이다.



-도올이 예수와 한반도 초기 올곧은 기독교인들의 정신을 회복하자는 것이라면, 보수 기독교가 왜 이처럼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인가?



=신관이 중요하다. 신관이 바뀌지 않으면 기독교가 바뀌지 않고 세상이 바뀌지 못한다. 그래서 도올의 〈요한복음 강해〉로 인해 기존의 신관과 교권이 흔들리는 데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교회를 파괴하려는 음모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정치적 우파들과 결속하는 것에 대한 방해라고 여긴다. 약자와 함께하고 그들을 섬김으로써 예수의 사랑을 실현하려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며, ‘정치적 메시아주의’를 통해 세상적 힘을 갖기를 원한다. 그래서 젊은 지성인들이 도올의 강의를 듣고 깨어나서 ‘정치적 메시아주의’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한기총 이용규 회장과 최희범 총무는 기자들과 만나 ‘철학자가 성서를 해석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철학과 신학은 같지 않다. 그러나 지성과 이성을 배제한 신학은 없다. 초자연적 신을 얘기하는 보수적 신학도 교리들을 보면 대단히 논리와 합리적 구조를 갖추고 있다. 신이나 구원도 논리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계시적 진리다, 영이다, 신앙이다’라며 신성의 보자기로 감싸는 ‘경계 침해의 논리’는 교권 보호를 위해 상대를 침묵시키기 위한 것일 뿐이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카르 바르트는 “신학도 인간이 하는 학문적 시도”라고 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계시된 신학이란 없다는 얘기다.



-그들은 ‘신앙은 신앙의 눈으로 봐야 열리지 지식과 과학으로는 안 된다’고도 주장했다.



=‘신앙=반지성주의’로 몰고 가는 것이 제대로 된 것인가. 그것은 몽매주의다. 상당수 기독교 지도자들은 신도들을 그런 교권주의와 권위로 다스려 전근대적 복종의 미덕만을 강조해 오면서 무지한 맹신이 진짜 신앙인 양 호도했다.



-기독교에서 도올의 주장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질 것으로 보는가?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아야 한다. 낡은 부대는 신축성과 유연성이 없어서 새로운 것을 담아내기 어렵다. 담으면 터져버려서 술도 상하고 부대도 상한다. 한국 기독교는 과연 어떤 부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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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폐기론 반대이유

평등·존엄 담은 헤브라이즘 약화



김경재 교수는 “어떤 맥락인지 들어봐야 하겠지만 구약을 폐기하라고 했다면 이는 잘못”이라며 도올의 구약폐기론엔 반대를 분명히 했다. 그리스철학에 뿌리를 둔 헬레니즘과 히브리사상이 만나면서 신약의 정신세계가 형성됐는데, 구약을 제거해버리면 도올이 소중히 여기는 인간 평등과 존엄성 등을 담은 헤브라이즘이 빠져버린다는 것이다.



예수 이후 최고의 인물로 꼽히는 사도 바울도 히브리사람이긴 하지만 헬레니즘적 배경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아 용어와 내용에 두 요소가 함께 포함돼 있다고 한다.



그는 “구약을 빼면 율법주의에선 자유로울지 몰라도 기독교답게 하는 (헤브라이즘) 정신이 약해져버린다”고 경계했다. 그는 또 “구약과 신약은 서로를 비춰주는 빛”이라고 했다. 또 “기독교가 이스라엘에서 탄생했는데, 그 뿌리를 제거해버리면 기독교가 천박해진다”고 주장했다.

 

 엘리자벳과 마리아는 이 두 현자의 성림(聖林)의 구도장에서 사랑, 생명의 통일, 두 개의 자아, 삼위일체의 신(神), 도신(道神), 브라만교, 유대의 성서, 석가부처의 교훈, 페르시아의 종교 등에 대하여 3년간의 영적 교육을 받은 후 다시 유대로 귀국한다.(『보병궁의 성약』, 7∼12장)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후 소년시절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유대의 여러 예언을 명쾌하게 해석하고 또한 진리에 두루 정통하여 율법학자들과 막힘 없이 논하기도 하자, 어떤 이들은 소년 예수를 하느님이 보낸 예언자이거나 그리스도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어느덧 자라 12세가 된 예수는 목수가 되어 아버지 요셉을 돕고 있었다. 이 때 남부 인도 오릿사 주(州)의 왕족인 라반나가 유대의 제례(祭禮)에 참석하러 왔다가 성전에서 만난 예수의 총명함에 반하여, 예수의 부모를 찾아가 그에게 동양의 지혜를 배우도록 인도 유학을 청원한다.(『보병궁의 성약』, 21장)



예수가 동양의 지혜를 배웠다는 구도의 편력은 『보병궁복음서』 외에도, 러시아의 역사가이며 고전학자인 니콜라스 노토비치(Nicholas Notovitch, 1858~?)가 인도 북부의 케시미르 지방에 있는 헤미스 사원에서 라마승으로부터 전해 받은(1887년) 예수에 관한 두 권의 기록을 바탕으로 출간한 『이사전』*에도 자세히 나와 있다.





이사(예수)가 아버지의 집을 은밀히 빠져 나와 예루살렘을 떠나 상인들과 함께 신드(Sind)로 향했던 게 바로 그 때였으니 이는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스스로 자신을 완전히 하고 대붓다(the great Buddha)의 법을 연구하기 위함이라.



  ‘해뜨는 방향’을 향해 떠난 예수는 남부 인도 오릿사 지방의 쟈간나스의 절에 들어가 4년간 수행하면서 『베다』성전과 『마니』법전을 배우고 승려 라마스와 깊은 우정을 나눈다.



쟈간나스의 광장을 걸으면서 라마스가 “유대의 선생, 진리란 무엇이라 생각하오?”라고 물었을 때, 예수가 말한다.



  예수는 라마스와 함께 갠지스 강 주변 마을의 노예(수드라), 농부(바이샤)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그들에게 인류는 한 동포라는 것과 만민평등, 인간의 절대평등을 가르친다.



  이사(예수)께서 주거나웃, 라자그리하, 베나레스 그리고 다른 성지에서 6년을 지내셨더라. 그가 바이샤와 수드라에게 경전을 가르치시고 또한 그들과 함께 평화롭게 거하시니 모든 이들이 그를 사랑하였더라.(『이사전』 5:5/ 『예수의 잃어버린 세월』, 181쪽 재인용)



갠지스 강변의 마을 베나레스는 브라만교의 성지로서 문화와 학술이 고도로 발달된 곳이었다. 예수는 인도의 의술(醫術)을 배우기 위해서 당시 인도 최고의 의원이었던 우도라카의 제자로 입문한다. 우도라카의 한 줄기 시 같은 가르침의 요지는 이러하다.



자연의 법칙은 건강의 법칙입니다. 이 법칙대로 살면 결코 병에 걸리는 일이 없습니다. 이 법칙을 어기는 것은 죄이며, 죄를 범하면 병에 걸립니다.



인간은 현악기와 같아서 그 줄이 너무 느슨하거나 너무 팽팽하게 되면 악기는 정상적인 소리를 내지 못하듯 인간은 병이 들게 됩니다.



한편 자연계의 물상(物像)은 모름지기 인간의 요구에 응할 수 있게 되어 있으므로 모두 의료의 비약(秘藥)이 됩니다. 물론 인간의 의지는 최고의 의약이니까 … 따라서 스스로의 힘으로 병을 고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하느님과 자연과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면 권능(power)의 거룩한 말씀을 알게 됩니다. 이 성언(聖言)은 모든 상처의 진정제가 되고, 생명의 온갖 병을 치료합니다.



치료인이란 신앙심을 심어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영혼이 위대한 사람은 힘이 있는 사람으로, 그는 다른 사람의 영혼 안에 들어가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하느님, 자연, 인간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자에게 믿음을 심어줍니다.





  예수는 우도라카, 승려, 학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주신(본체신)은 한 분이고, 신(인격신)은 ‘한 분 이상’이어서 모든 것은 신(개체화된 인격신), 모든 것은 하나이다(본체신과의 관계).



하나님의 향기로운 숨결에 의하여 생명 전체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모두 한 분의 하나님을 모시지만 아무도 하나님(우주자체의 조화신)의 모습을 볼 수는 없다. 이 우주신은 지혜, 의지, 사랑이시다.



  인간의 절대평등을 주장하던 예수는 인도의 신분제도(카스트)를 파괴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을 정죄하려는 승려들을 피해, 라마스의 도움으로 네팔로 피신하였다. 농부, 노예, 상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히말라야의 큰 봉우리에 있는 가빠비츄 사원에 들어간 예수는 그곳의 주지 비쟈빠찌 성자와 함께 앞으로 오는 시대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시 예수는 험난한 고원을 넘어 티벳의 랏사에 있는 사원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요동(遼東)의 최고 성현으로 이름이 나있던 멘구스테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이 사원에 소장되어 있던 수많은 고전(古典)을 읽었다. 예수는 이 곳을 떠날 때 ‘광명의 부처’, ‘살아있는 신탁(神託)’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조국으로 향하는 길에 페르시아에 들러 자신이 태어날 때 찾아준 마기(magi)들을 만난다. 이 때 예수의 나이는 24세였다.



  그 후 예수는 유프라테스 강까지 페르시아의 성자 카스파아의 배웅을 받은 후, 자신의 선조 아브라함의 고향인 앗시리아의 갈데아 우르로 찾아가서 그곳 최고의 성자인 아시비나와 함께 야산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이며, 다가오는 시대에 어떻게 봉사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보병궁의 성약』 43:16)



이윽고 요단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온 예수는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어머니의 애정어린 환대를 받았으나, 동생들로부터는 혼자 잘난 체하며 헛된 명성을 구하는 자로 비난을 받았다. 사랑하는 어머니 마리아와 여동생 미리암에게만 지난 날 구도의 과정에서 겪었던 사연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곧 희랍으로 떠났다. 아테네에 이르러, 희랍의 성자인 ‘아폴로’의 인도로 다른 현인들을 만나 희랍의 정신세계에 대해 듣고, 또한 희랍의 여러 교사들을 가르치기도 했다.(『보병궁의 성약』, 44장, 46장)





  이듬해에는 이집트 조안에 가서 엘리후와 살로메를 만난 뒤, ‘헬리오폴리스(해의 도시)’로 가서 성자들의 모임인 형제단 입회를 허락받았다. 예수는 이들 성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는 지상생활의 길을 널리 더듬을 생각입니다. 널리 학문적으로 추구하고 싶습니다. 누군가가 오른 높은 곳에 저도 오르고 싶습니다.



누군가가 고통받은 일을 저도 경험하고, 이것으로 내 동포의 비애, 실망, 시련, 유혹을 알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보병궁의 성약』 47:12∼13)





  이 ‘비밀 형제단’의 서약을 받아 ‘성실, 공정, 신앙, 박애, 의열, 성애(聖愛)’라는 여섯 단계의 시험을 진실과 용기로써 극복하고 거룩한 스승의 제자가 되어, 애굽 밀교의 비밀과 생사의 문제 그리고 태양계 바깥 세계에 대한 비밀을 배웠다. 예수는 사자의 방에서 시험을 마친 뒤에 보랏빛 방에서 일곱 번째의 마지막 시험을 이겨내고 마침내 ‘그리스도(하느님의 사랑)’라는 최고의 법명(法名)을 받았다.



  이어 당시 사상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파일로의 집에 세계의 일곱 성현이 모였는데, 예수도 이 모임에 참가하여 명상에 잠겼다. 중국의 멘구스테, 인도의 비쟈빠찌, 페르시아의 카스파아, 앗시리아의 아시비나, 희랍의 아폴로, 이집트의 맛세노, 희랍사상의 대가 파일로, 이렇게 모인 7인의 성자들은 세계의 근본원리에 대해 토론하고 예수도 이들에게 진리를 설하였다. 다음은 멘구스테의 말이다.



때의 바퀴는 한 번 돌아 인류는 ‘보다 높은 사상의 단계’에 서 있습니다. 때가 무르익었습니다. 인류를 위하여 알맞은 옷을 만들지 않으면 안됩니다. 인자들은 좀더 커다란 빛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죽음에서 살아난 사랑의 표현이로다.(『보병궁의 성약』178:26)





  그리스도란 말의 어원은 희랍어의 크리스토스(Kristos)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뜻하는데, 그 의미는 히브리말의 메시아(Messiah)와 같다. 그리스도라는 말 자체는 특정한 사람만을 부르는 고유 호칭이 아니며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면 모두 그리스도가 된다. 즉, 그리스도의 진정한 뜻은 ‘인간을 영원히 구원하려고 하는 신(하느님)의 사랑’을 말하며, 그러한 ‘사랑을 구현시킬 수 있는 인격자’를 말하는 것이다.



  과거 각 시대마다 그리스도가 있었다. 구약시대의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이었다. 그는 아브라함 시대의 살렘왕[평화의 왕, 의(義)의 왕]으로서, 희생을 통하여 참 생명에 이르는 길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인간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그리스도였다. 4,000여 년 전의 이 신비의 인물은 구약성서의 「창세기」와 신약성서의 「히브리서」에 조금 언급되어 있는 정도이지만, 멜기세덱은 구약시대의 그리스도로서 제사장이었다.



  지금까지 알아본 바와 같이, 인도 유학 시절 예수는 모든 인간의 해탈의 가능성을 철저히 가르치는 불교에 매혹되어 승려가 된 후, 베나레스, 녹야원, 부다가야, 헬리오폴리스 등지에서 오랜 수도생활을 하였으며 티벳을 마지막으로 29세 때 귀국을 하였다.





인도 및 티벳 등지에서 예수에게 심령 치료의 비법을 전수해 준 밀교계 고승인 우도라카와 멘구스테 등 예수의 스승들은, 예수에게 도술을 이타적으로 쓰되 남용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귀국 후 예수는 유일신교인 유대교파들에게 모든 인간의 절대 신성을 부르짖으며 여러 가지 초월적 이적을 행하고, 군중을 모아 신의 사랑과 평등 사상을 전파하였다.



  결국 예수는 유대교 성직자들의 질시와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되었는데, 이 때 예수는 제자 요한에게 모친을 부탁한 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Eli Eli Lama Sabachthani: ‘하나님 왜 저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 한 마디를 크게 소리친 뒤 혼절하였다. 그런데 예수가 외친 이 최후의 말씀은 티벳 라마불교의 진언(眞言)인 ‘엘리엘리 라마 삼약 삼보리(Eli Eli Lama Sammach Sam Bori)’라는 다라니[Dharani=총지(總持)=주문(呪文)]로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극도로 탈진하여 생에서 사로 넘어가는 마지막 순간에, 모든 장애를 뛰어넘어 한량없는 복덕(福德)을 지어내는 권능이 있다고 전해지는 라마불교의 주문(다라니)을 암송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예수의 제자들은 이 주문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수가 죽은 뒤 수십 년이 흐른 후 예수의 언행을 정리하기 시작했을 때, 마지막 말씀의 의미가 잘못 기록된 채 번역되어 후세에 전해졌다.



  예수가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둔 극한상황에서 라마불교의 진언을 암송했다는 이 충격적인 사실은 예수의 인도·티벳의 구도생활을 밝혀 주는 결정적 증거의 하나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아들이다. 사람들이 ‘신령한 생활’을 보내면 언제나 하느님과 편히 쉰다.(『보병궁의 성약』 91:35)



인간은 지상에 하느님의 의지를 행하기 위한 ‘하느님의 사자’이다. 그리고 인간은 병자를 고치고 하늘의 영(靈)을 관리하고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다.그래서 ‘인간은 지상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숭배하는 자는 사람을 숭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는 아버지와 자식이 한 몸인 것과 같이 한 몸이기 때문이다.(『보병궁의 성약』 91:41)



예수께서 12사도에게 말하기를 이 전능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대들은’ 만유와 하늘의 모든 힘을 통어할 수가 있다.(『보병궁의 성약』 89:8)



만약 그대들이 죄를 범하지 않으면 그대들은 자유롭다. 그러나 그대가 만약 사상, 언어, 혹은 행위로 죄를 범한다면 그대는 노예로다. 진리 말고 너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도다.(『보병궁의 성약』 135: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



자아, 하늘에서 천국을 구하는 것을 그만 두시오. 오직 마음의 창을 여시오. 그러면 빛이 환히 비쳐들 듯, 천국이 와서 무한한 환희로 넘치게 해 줍니다.(『보병궁의 성약』 33:10)



인간은 우주의 놀라움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온갖 생명의 단계를 지나온 생명이기 때문입니다.(『보병궁의 성약』 32:4, 바라타의 말씀)





  인간에 대한 이 놀라운 선언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나타나 있는 내용과 조금도 모순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한 지상의 유일한 존재이므로, 인간은 지상의 하나님이며, 육체라는 옷을 입고 있는 신인 것이다. 인간(성자)은 성부와 성신의 조화가 결합하여 화생된 우주 최상의 신비와 조화로 가득 차 있는 존재이다. 「요한복음」 10장 30절에서 35절까지를 보면 이와 같은 인간에 대한 가르침이 더욱 뚜렷해진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10:30)





이에 유일신 관념의 노예였던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예수를 치려 할 때(31절), “내가 하느님의 진리의 선한 일을 너희들에게 많이 보여 주었는데 그러한 나를 왜 돌로 치려 하느냐?”고 예수가 항변한다(32절).



  이 때 이 무지한 유대 군중들이, “그런 이유가 아니라 그대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느님이라 하는 참람(僭濫)함, 즉 신에 대한 불경 때문이다”라고 자신들의 정죄행위를 정당화한다.



이에 예수는 다음과 같은 옛 이야기를 들추며, 인간 자신의 신성과 존엄성을 완전히 잊어버린 채 무지의 광기로 분노하는 폭도들의 맹신을 이렇게 힘있게 깨우쳐 준다.



하느님 예수 그리고 야훼 기독교 제대로 알기 -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치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한 5:43>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오, 나를 내려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한 6:38∼39>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 7:21>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한 8:28>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리라.    <요한 12:44>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요한 12:49,50>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함이로다.    <요한 14:31>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요한 16:28>





이처럼 성경의 많은 구절들에서 예수는 하나님과 자신의 주종관계를 분명하게 구분지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 기독교의 교리에서는 하나님을 성부, 성자(예수), 성신의 3위 일체로 존재하시는 분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중 성자가 인간으로 화육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의 길을 걷다가 다시 하늘로 되돌아가 하나님의 지위로 원상회복 되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러한 교리는 첫째 우주 창조원리의 바탕을 모르는 서구의 신학으로 잘못 해석되어, 체(體: 본체)와 용(用: 작용)의 상호연관성이 무시된 채 성립되었기 때문이며, 역사적으로는 AD 381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2차 종교회의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만일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기독교 교리가 허물어지고 믿음에 혼돈이 생겨, 교회의 권위가 파괴되어 분열을 일으킬 것이며, 결국 로마제국까지 흔들리게 될 것이라는 판단하에 결정된 작의적인 성경 해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인간과 땅과 하늘이 생겨난 하나의 근원자리(성부)만을 보고 성부가 태초에 우주를 무한히 진화해 가는 생성과정에서 그 열매로 태어난 개개 인간이 우주정신의 주체이자 성부의 대행자-성자-가 됨으로써 객체(客)가 우주의 주체(主)로 바뀌는 우주 창조의 목적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부 : 우주의 주재자 하느님.

성자 : 천상의 성신이 지상에 태어나 인류를 위해 크게 헌신

성신 : 천지에 가득한 신들. (성신은 천상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지상의 역사 발전에 깊숙이 관여.)





단지 생각하기 쉽게 단순논리에 빠져서 이 우주는 유일신의 창조의 성업으로 이루어진 것으로만 생각할 뿐 인간이 우주의 유일한 주체이며 우주의 주인자리에 서있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서구 기독교 신학은 아직까지도 인간을 그저 신의 피조물로 인식하는 이원론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전의 기독교가 지닌 민족 종교로서의 성격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또 그가 원한 것은 진정한 하나님(우주 주재자)의 진리를 전하는 것이었지, 일개 민족신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의 어디를 뒤져보아도 예수가 절대자를 ‘하나님’ 또는 ‘아버지’라고 불렀지, 한 번도 ‘야훼(여호와)’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점이 이를 입증하는 좋은 예입니다.



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게 못할찌라 그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하고..."    <사무엘상 5:8-9>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더하여 여러 큰 재앙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찌라."    <출애굽기 7:4.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애굽기 20: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레위기 18:1,2>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물이 되게 하였으니 이는 아론 자손이 아닌 외인은 여호와 앞에 분향하러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함이며..."    <민수기 16:40>





이처럼 구약성서 속에서 묘사되고 있는 여호와의 모습은 관용과 사랑의 절대자보다는 전쟁과 질투의 신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즉 자기 민족(이스라엘)에게는 자비와 사랑의 신으로, 타민족에게는 복수, 전쟁, 질투의 신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 영어성서 번역자들이 성서를 바라보는 태도



그러면 과연 영어성서를 번역한 번역위원들은 성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다음은 성서의 영어번역(RV,ASV,NASV,RSV,NRSV,NIV)에 참가했던 번역위원들의 교리적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다음의 내용은 정석광씨의 석사학위 논문 <현대 영어성경 번역본의 신학적 입장 및 번역위원에 관한 연구>를 참조하였음)



중요 교리

  번역 위원



성경의 무오성 혹은 영감성을 믿지 않음

  B. F. Westcott (RV) F. J. A. Hort (RV)  Vance Smith(RV) George A. Buttrick (NCC-RV)Edgor J. Goodspeed(RSV) Clarence T. Craig (RSV) Frederick C. Grant (RSV) James Moffatt (RSV)  Julius A. Brewer (RSV)



예수의 처녀탄생을 믿지 않음

Harry Emersion Fosdick (NCC-RSV)



예수의 대속적 죽음을 믿지 않음

  F. J. A. Hort (RV) Vance Smith (RV)  Henry Sloane Coflin(NCC-RSV)  Harry Emersion Fosdick(NCC-RSV)

Edgor J. Goodspeed (RSV)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믿지 않음

B. F. Westcott (RV) Edgor J. Goodspeed (RSV)

Clarence T. Craig (RSV)



예수의 육체적 재림을 믿지 않음

  B. F. Westcott (RV) Vance Smith (RV) 

Clarence T. Craig (RSV)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지 않음

  B. F. Westcott (RV) Vance Smith (RV) 

Edgor J. Goodspeed (RSV) Henry F. Cadbury (RSV)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함

  Vance Smith (RV)



성경에 기록된 기적을 믿지 않음

  B. F. Westcott (RV) Edgor J. Goodspeed (RSV)  Henry F. Cadbury (RSV) Walter Rusell Bowie (RSV) Fleming James (RSV)



문자적 의미의 천국을 믿지 않음

  B. F. Westcott (RV)



문자적 의미의 지옥을 믿지 않음

  F. J. A. Hort (RV)



마귀의 인격성을 부인하거나 존재여부를 의심

  B. F. Westcott (RV) F. J. A. Hort (RV)

  Edgor J. Goodspeed (RSV)



침례 중생을 믿음

  F. J. A. Hort (RV)



오직 믿음이 아닌 다른 방법에 의한 구원 인정

  James Moffatt (RSV)



진화론을 인정함

  B. F. Westcott (RV) F. J. A. Hort (RV)





이들 번역위원들 중에서 대표적으로 두 사람만 살펴보자.



⊙ 웨스트콧 (Brooke Foss Westcott, 1825-1901)



웨스트콧은 창세기 1-3장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오늘날 어느 누구도 창세기의 첫 세 장이 문자 그대로의 역사를 제공한다고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눈을 뜨고 그것을 읽는 사람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 난 이해할 수 없다. 게다가 그 세 장의 말씀들이 우리에게 복음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지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모세나 다윗도 시적 인물들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며, 성경에 나타나는 기적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의 성경 안에 있는 기적들에 대한 입장은 다음의 말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나는 기적 이야기 같은 것은 읽은 적이 없으나 직관적으로 그런 것은 일어날 성싶지 않은 일임을 느낀다. 그리고 그 이야기 안에서 그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발견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성경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천국을 글자 그대로의 장소가 아니라 단지 어떤 상태로 믿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천국은 장소(place)가 아니라 상태(state)이다". "천국은 우리 안에 놓여 있다. 그리고 생각, 회상, 동경을 위하여 조용한 휴식을 취함으로써, 우리는 좀 더 거룩한 상태(즉 천국)를 계속해서 신선하게 지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습관적으로 그것을 숨쉴 수 있다". "우리는 인내, 확고한 결심, 믿음, 그리고 노력을 통해 우리 주변의 천국 즉 우리의 지상생활의 영광을 희망하는 바이다".



그는 성경이 오류 없는 책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는 호르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편지를 쓴 적이 있다. "나는 성경 전체를 뒤덮고 있는 성경의 무오류라는 단어를 부인하오".



웨스트콧은 예수 그리스도 사역의 속죄의 효능은 그분의 죽음에 기초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의 모든 삶"에 기초해 있다고 믿었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선재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의 신성을 부인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자(the Son of man)를 반드시 '그리스도'와 동일시할 필요는 없었다. 성경은 예수가 자기 자신을 영화롭게 한 적이 없으며, 다만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예수는 결코 직접적으로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는다."



⊙ 호르트 (Fenton John Anthony Hort, 1828-1892)



그는 웨스트콧과 마찬가지로 성경이 오류가 없는 책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는 "만일 당신의 협조를 얻기 위해 신약성경의 절대적 무오류성이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고 확신한다면, 유감스럽게도 나는 당신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는가 하면 "난 당신이 성경의 절대 무오류성을 지지하는 한, 당신과 함께 갈 수 없소."라고 말했다. 호르트는 성경 사본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원문들"은 국부본(Local Text)과 일치하며, 이 국부본은 4세기에 안티오크에 있는 시리아교회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바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보편적 본문(Universal Text)이라고 했고, 이러한 보편적 본문이 교회의 공회에 의해 사람들에게 강요되었다는 이론을 주장했다.



그는 또한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을 거부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공의가 각 개인의 죄에 의한 고통 없이 어떻게 만족될 수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또한 "널리 알려져 있는 대속의 교리(the doctrine of substitution)는 비도덕적이며 유물론적인 위조품"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호르트는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가르침들을 이단으로 생각했다.



"확실히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기까지 고통 당하셨다는 것보다 더 성경적이지 못한 것은 없다. 정말로 그것은 거의 보편적인 이단의 한 측면인 것이다". 그는 또한 죄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지불을 하나님보다는 사탄이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나는 사탄에게 지불된 속죄 값이라는 그 원시적인 교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혐오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렇지만 속죄 값에 대한 교리가 변호되어질 수 있는 다른 형태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어떤 것도 아버지에게 지불된 속죄 값의 개념보다는 낫다".



호르트는 에덴동산의 실재를 부인한다. "나는 '에덴동산' 같은 곳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아담의 타락도 영국의 시인이었던 콜러리지(Coleridge)가 정확히 지적한 것처럼 그의 후손들의 타락과 전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그는 글자 그대로의 영원한 "지옥"에 대해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연옥에 대한 개념을 받아들였다. 다음 글이 그 사실을 설명한다. "나는 모리스가 말로써 연옥을 부인했다는 것을 당신 마찬가지로 유감스럽게 여긴다... 회개의 힘은 현생에만 제한되어 있지 않다". "나는 불에 의해 깨끗하게 되는 연옥에서의 정화라는 개념이 성경이 내게 가르쳐주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벌(Divine chastisements)과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기독교인들의 성서를 보는 잘못된 태도



왜 영어성서 번역자들은 성경의 무오성 혹은 영감성 등을 믿지 않았을까?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의 성서를 보는 네 가지 태도를 알아야 문제가 풀리게 된다. (아래의 네 가지 태도에 대한 글은 인하대 정동수 교수의 글을 참조했음)



A) 자유주의에 속하는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에 관해서 사람들이 쓴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성경에 기록된 창조와 이적들은 믿을 수 없는 것이며, 동정녀 탄생과 피의 속죄, 부활 등의 근본적인 믿음 자체도 수용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아닌 인류의 4대 성인 가운데 한 사람정도로 여긴 슈바이처나 도올 김용옥 등이 아마 여기에 속할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성경을 단지 세상의 고대 문서와 같이, 또는 조금은 다른 가치를 부여하는 정도로 판단한다.



B) 신정통주의에 속한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또 그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앙의 문제를 제외한 역사적, 과학적 진술은 오류를 지니고 있으며, 각각의 구체적인 사실 진술에 있어서도 오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성경은 모든 문제에 있어서 판단의 절대기준이 되지 못하며, 권위를 지니지 못한다.



C) 보수주의에 속한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역사적, 과학적 사실뿐만 아니라 초

아름다운 마음님의 댓글

no_profile 아름다운 마음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9.♡.199.19,

  도올님의 지성과 이성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글이네요. 맹종이 아니라 참다운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그리고 진정 내가 누구인지를 간절히 알고자 하는 마음을 낸다면 , 시간이 걸리고 돌아서 그 길에 이르게 될지라도 그 길을 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느낍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신의 의식, 빛의 의식으로 함께 깨어날 수 있도록 우리 연구회 회원들이라도
간절하게 함께 마음내주세요. 올려주신 글 너무나 감사한 마음으로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