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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석가는 마음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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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히란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18.♡.52.140), 작성일 07-06-06 18:55, 조회 5,653,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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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석가는 마음의 고향(다카하시 신지의 '우리가 이 세상에 살게 된 7가지 이유'에서 발췌)




사람은 왜 태어나서 살다가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일까. 슬픔과 괴로움이 많은 인생! 다정한 사람들과의 결별, 싫고 미운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고통, 경제적인 어려움, 원망, 시기, 질투, 노여움, 독점 욕망.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마음이 고독한 사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유명한 사람들의 오만, 육체적 불구에 대한 고민, 종교를 사리사욕의 수단으로 삼는 위선자, 주색에 대한 욕망, 지위 명예욕, 인종 차별에 우는 사람, 동족끼리의 권력 다툼, 종파 싸움, 주의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투쟁과 파괴, 노사 분쟁, 고부간의 갈등 등등 일일이 기록해 가자면 끝이 없는 이 혼란한 인생! 그런 슬픔과 고통의 원인은 모두 중용의 마음을 상실한 행동에 있다. 많은 사람들은 욕망의 와중에 자신을 매몰시켜 거기서 빠져나올 줄 모르며 빠져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인생에 실망하여 인간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채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은 결코 풀 수 없는 숙제는 아니다. 다만 풀기가 어려울 뿐이다.


이 난해한 인생을 가장 알기 쉽게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설명한 빛의 천사가 있다. 그가 바로 인도의 석가모니와 이스라엘의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나 그들의 설법도 오랜 역사를 거쳐 오는 동안 많은 승려와 학자들의 지식과 의지에 의해 변질되었다. 철학화, 의식화, 심지어는 상업화로 타락하고 말았다.


기독교도 불교도 학문화, 철학화, 상업화되었기 때문에 그 가운데에서 신리를 찾기 힘들게 되었다. 즉 이치는 알고 있는데 생각과 실천 방법이 모호해졌다. 마음이 없는 종교, 실천이 없는 종교가 현대 사회를 왜곡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지식이나 의지로 도금된 불교와 기독교를 버리고 본래의 붓다와 예수의 가르침을 되찾는 길이다. 학문 종교, 관광 종교, 의식 종교로써는 현대 사회의 인간의 마음을 구제할 수 없다. 타락된 종교로는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깨닫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제멋대로의 인생을 밟고 물질 경제의 노예가 되어 본성을 잃은 사람들을 수없이 만들어 낸다. 신리의 철학화, 종교의 전문화에 의한 타력 신앙, 이익주의 종교의 탈바꿈, 신불의 대량 생산화, 이런 것들이 종교의 왜곡상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래도 대중은 마음의 주거지를 찾아 헤맨다. 종교를 왜곡시킨 지도자의 죄는 무겁다. 경문은 일상생활의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석가와 예수의 가르침은 신리이며 인류의 마음의 고향이다.



우리는 이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 인간은 육체 조상의 관습이나 종교적 관례에 따라 생활하고 있으므로 자기의 종교가 정법(正法)인지 사법(邪法)인지 확실하게 구별조차 못하고 있다. 그래서 신사, 사찰, 교회를 신불이 존재하는 곳, 기도하는 장소로 착각하여 어느새 기복 신앙, 즉 복이나 비는 종교로 타락하고 말았다. 신사, 사찰, 교회는 살아 있는 인간에게 신불의 자녀로서의 자각심을 일깨워 주고 신리를 실생활에 실천하도록 가르쳐 주는 교실이어야 한다. 석가도 예수도 신불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우상을 세워 중생에게 예배하도록 하는 짓은 결코 하지 않았다.



라쟈구리하 교외의 벨르베나라는 죽림정사나 시바바스티 교외의 제다베나의 기원정사, 그밖의 많은 정사(精舍)들은 여러 나라의 왕이나 부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었지 교단에 의해서 세워진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정사는 비구와 비구니들의 숙소요 신리를 설법하는 전당이었지 결코 신불에게 제사 지내거나 우상을 받드는 곳은 아니었다. 때로는 그리그랏드의 산정이나 공원의 광장 등이 설법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한편 이스라엘에서 진리를 가르친 예수 그리스도도 신불이나 우상 앞에서 공양 예배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예수는 사명감에 따라 병든 중생에게 사랑의 손길을 뻗어 요르단강에서 때로는 나사렛언덕에서 혹은 헤르몬산에서 하느님의 뜻을 얘기했다. 그 신리는 오늘날에 와서도 불멸의 신리가 되었으며 우리들은 석가나 예수 당시의 원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거기에 진짜 마음의 진리가 있으며 경문의 바른 정신이 있다. 종파 싸움이나 파벌의 추한 투쟁을 버리고 신리의 큰 길에 종교를 올려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않아 중생들의 버림을 받게 된다. 종파의 고집은 나 자신을 구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파멸로 몰고 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신리의 실천이 따르지 않는 학문 종교는 지식에만 머물 뿐 마음이 없기 때문에 일상생활의 행위는 위선이 되기 쉽다. 행위와 신리는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인간으로서 태어난 목적과 사명 나 자신의 인생의 가치를 스스로 알게 된다.



석가와 예수가 설법한 신리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변질되었으며 마침내 말법(末法)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중생은 마음을 상실하고 부조화한 생활의 늪에 빠져 사회 혼란의 원인을 만들고 있다. 물질 경제 지상주의의 현대 사회가 과연 인간에게 마음의 평안을 줄 수 있을까?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중생은 신불을 찾고 있으며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 헤매고 있지 않는가. 말법 시대이기 때문에 상업 종교, 타력 신앙을 광신, 맹신하여 본성을 잃고 있다. 어떤 사람은 신불의 존재를 부정하고 유물 사상에 심신을 빼앗겨 인간 사회는 계급 투쟁을 거쳐서 발전해 가는 것이며 물질문명도 거기서 번영해 간다는 사고방식에 젖어 있다.


그런 지식과 의지에 의한 인간의 사상은 동물적 본성으로 약육 강식적 투쟁과 파괴의 사회를 만들어 내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들의 사상과 행동은 현대에도 계승되어 물질 우선의 폭력에 의한 피의 혁명을 실행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이 설령 일시적인 성공을 거둔 적이 있다하더라도 바른 마음을 가진 인간까지는 도저히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결국은 깨닫게 될 것이다. 권력이나 폭력에 의해 일시적으로 사상을 통일하였다 하더라도 자유를 욕구하고 평안을 갈구하는 인간의 마음을 억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음을 상실한 지식과 의지만으로 무장된 지도자에게 세뇌된 사상은 어디까지나 겉에 바른 칠에 불과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칠이 벗겨져 인간 본래의 불성인 알몸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괴로움의 원인은 신리를 거스른 생각과 행위가 만들고 있다.


부조화한 사상은 투쟁과 파괴를 불러일으켜 괴로움과 슬픔의 현상으로 나타나 순환한다. 왜냐하면 투쟁에 의해 쟁취한 것은 언젠가는 투쟁에 의해서 상실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조화한 사상으로 마음의 괴로움을 해결할 수는 없다. 인간의 마음은 무한대로 넓으며, 지식과 의지의 산물인 좁은 사상의 올가미로 묶어 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상상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자유자재이며 그 누구도 제약할 수 없으며 그 누구로부터도 제약받을 수 없는 것이다. 제약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 이외에는 없다. 선인가 악인가의 판단은 신리인가 아닌가에 의해서 결정된다. 나 자신의 올바른 마음을 충실하게 지니고 인생을 영위하고 있는가, 그리고 자기중심이 아니라 남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중립의 척도로 생활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선악은 결정된다.


신의 섭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으며 인간의 지식이나 의지로는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신리는 신불의 지혜요 마음이며 뜻이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인류는 오랜 역사의 과정에서 조화와 파괴가 동거하는 사회를 만들었으며 오늘날의 물질적 사고방식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 버렸다. 이 사고 방식은 큰 잘못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며 신불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하는 마음을 잊어버렸다.



대자연의 만물은 모두 상호 작용에 의해서 존립하며 조화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들의 육체에 있어서도 한 개의 세포가 이상해지거나, 또는 한 기관이 조화하지 않으면 여러 변화가 나타난다. 즉 질병이라는 현상이다. 그러면 우리들은 병원이다, 의사다, 약이다 하고 당황한다.



조화는 질병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인류의 수행 목적의 으뜸가는 과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투쟁 운운하는 이 현실 사회의 양상으로 과연 인류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부조화한 행위가 인류를 행복으로 이끌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물질 경제 지상주의에는 마음이 없으므로 진정한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는 것은 가망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폭력으로 항거하는 사람들의 인생에 과연 진정한 자유와 평화가 존재하는 것일까. 어제의 동지는 오늘날의 배신자라는 말처럼 남을 믿지 못하는 마음은 지옥의 아수라계에 통하고 있으며 그런 인생은 실로 어리석은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런 결과를 초래한 것은 지배 계급의 횡포가 대중의 불만을 불러일으켜 생겨난 것인 만큼 지배층은 잘 반성해야 한다. 설령 자신의 노력으로 이룩한 경제력이나 지위라 할지라도 거기 만족할 줄 모르고 보다 많고 높은 것을 탐내고 없는 자에게 베푸는 자비심도 없으며 자아 아욕, 자기 보존의 권화가 된 인간은 참으로 불쌍하고 저속한 자들이다.



사회에 이런 인간들이 많으면 혼란이 그칠 날이 없다. 원인과 결과,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은 대자연의 신리이며 우리의 육체뿐만 아니라 의식에도 작용한다. 신불의 자비 즉 육체 보존을 가능하게 하고 있는 자연의 환경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을 가진다면 그것을 행동으로 표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행위가 은혜를 갚는 일이다. 인간 사회의 조화를 위해서 자기의 능력 범위 내에서 봉사하는 것이 인간 상호의 신리를 다질 수 있으며 조화와 평안의 사회를 구축하는 원동력이 된다. 인간은 원래 누구든지 평화를 원하고 있다. 슬픔이나 괴로움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인간은 눈앞의 현상에 집착하여 마음을 잃고 스스로 슬픔과 괴로움의 원인을 짓는다.



마음이 없는 지적 사고방식이 부조화한 사상을 낳고 표면적인 물질 경제의 추구에 몰두하게 되면 인간 본래의 목적과 사명을 잃고 있다. 그래서 괴로움과 아픔의 불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불행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와 같이 물질 경제가 근본이라고 생각하는 한 인류는 조화의 틀이 잡힌 사회를 완성할 수 없다.



물질문명은 생활의 지혜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정신문화나 마음의 진화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현대인은 물질 경제에 사로잡혀 여러 방면으로 욕망의 노예가 되었다. 이 노예에서 해방되는 것이 인간으로서 신성(神性), 불성(佛性)을 되찾을 수 있는 첫걸음이다. 신리에 따라 인상을 엮어가는 것, 이것이 행복으로 통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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