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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 그레일(聖盃)의 숨은 역사 1~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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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피란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2.♡.203.73), 작성일 06-01-29 10:44, 조회 9,21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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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 | 출처: Leonardo da Vinci 作



홀리 그레일(聖盃)의 숨은 역사 1편

로렌스 가드너 / 주혜명 옮김


계보학자인 로렌스 가드너 경은 라는 책을 썼다. 올해 글로벌 사이언스 회의에서 발표된 자료이기도 한 이 내용은 기독교를 비판하거나 기존 질서에 해를 입히기 위함이 아니라 좀더 객관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볼 수 있게 할 것이다. 덧붙여 성배의 진정한 의미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성배(聖盃)의 혈통(Bloodline of The Holy Grail; The Hidden Lineage of Jesus Revealed)이란 책은 내가 의도하여 쓴 것은 아니다. 그 책은 우연치 않게 쓰여졌다. 나는 지난 10년간 역사학자였으며 33개의 왕가(王家)를 위한 계보학자였다는 것 때문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영국 왕가와 그들의 자손에 관한 기록을 조사했던 것이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왕가에 대해서 대략은 알고 있었지만 자세한 것은 모르고 있던 일들을 모아서 연대에 따라 적어 내려갔다. 그 때문에 영국과 유럽에서 성서에 대한 사실을 조사하는데 훨씬 적은 시간이 걸렸다. 많은 왕가의 옛 기록에 그것이 나와 있기 때문에 내 책이 출판될 무렵에는 예수가 결혼을 했으며 후계자가 있었다는 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스코트랜드의 여왕 메리에 의해 쓰여지고 출판된 글과 1688년에 퇴위한 제임스 2세의 기록에 이에 대해 자세히 쓰여 있다.


여러 세대에 걸쳐 내려오는 단편적인 기록들을 종합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 일을 시작할 때는 다른 사람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예수의 자손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었다. 나는 18세기 이후에는 아무도 볼 수 없었던 자료들을 입수할 수 있었다. 그것은 수백 년 전에 쓰여진 문서들이었다.


이 책은 우연한 계기로 쓰여지게 되었다. 10년이나 20여년 전부터 한동안 나는 여러 왕가들을 위해 계보를 정리하는 일을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그 왕가들이 어떤 한 곳에 집중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계보를 정리하는 일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리는 일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맨 윗쪽에 많은 왕족들이 있고 그것이 한 점으로 모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점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뭘 발견했는지 알아요? 나는 이것이 1세기의 유대 가문에서 나왔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러자 그들이 말했다. "네, 우리는 모두 알고 있어요.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일반인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어요. 이것을 책으로 펴내도록 합시다." 그렇게 해서 이 책이 나오게 되었다.

더욱이 나는 지난 육년간 켈트 교회의 왕립 직책을 맡고 있었다. 그래서 AD 37년의 켈트 교회에 대한 기록을 접할 수 있었다. 왕족들과 가까이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전 수호 기사단의 기록도 만날 수 있었다. 이 기록은 신전 수호 기사단에 의해 1128년 유럽에서 쓰인 것이다. 교회 설립에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오늘 밤 우리는 유서 깊은 기사의 모험을 시작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궁극의 모험이라고 한다. 물론 그것은 성배를 찾기 위한 모험을 말한다.

모험은 그 성격상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역사적 연구는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준다. 그러나 역사적 연구에서 발견해낸 것이 현재에 적용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다. 미래를 위한 씨앗을 뿌릴 수 있을 때에만 그것은 유용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는 기록된 경험일 뿐이다. 그리고 대개 그것은 승자의 경험이다. 과거의 경험에서 배운 것이 상식을 만든다. 역사 안에는 미래의 정치, 사회, 문화, 도덕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성배는 우리가 '메시아의 코드'라고 부르는 것을 뒷받침한다. 이것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었을 때 예수에 의해 시작된 사회적 관례의 코드이다. 그것은 주고받는 의식과 관계된다. 즉 민중에 의해 선출된 사람들은 사회를 대표한다는 자신의 권위를 내세울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이것은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로 정의된다.

이에 우리는 탐험 길에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했던 여러 가지 이들에 대해서 아주 다른 관점에서 살펴볼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땅을 밟는 것 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이전에도 존재해 왔던 땅이다. 단지 기득권층에 의해 포장되고 숨겨졌던 것 뿐이다. 그 포장을 걷어낼 때 우리는 성배를 위한 탐험에 성공할 수 있다.


'성배의 혈통'이란 책은 '메시아 혈통의 책'으로 묘사되었다. 그것이 그렇게 불린 것은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였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적절한 설명이었다. 그 책의 부제가 '다시 밝혀진 예수의 숨겨진 가계'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가 아이를 가졌으며 물론 결혼도 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예수가 결혼을 했다고? 아이가 있다고? 그렇다면 그 자손은 어떻게 됐는지 우리가 알 수 있을까? 오늘날 그 후손이 살아 있을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이다. 우리는 그의 가족에 대해 살펴보고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각세기를 따라갈 것이다. 그것은 메시아의 코드를 오늘날까지 전하기 위해서 몇 세기를 통해 고군분투해 온 예수 자손들의 이야기이다.


오늘밤의 이야기는 음모에 관해서이다. 폭력, 박해, 암살, 정보의 차단에 관해서이다. 그것은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에 관해서이며, 나라를 사랑하는 왕의 통치가 어떻게 폭정과 독재의 통치로 대체되었는지에 관한 설명이다. 이것은 기록은 되었으나 말로 전해지지는 않은 역사이다.


Magdalena Maria

예수님의 부인인 막달라 마리아 | 출처: www.archimadrid.es


성배란 무엇인가? 성배는 예수의 자손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예수에게 자손이 있었다는 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러나 불과 몇 백년 전인 중세 말까지 영국과 유럽에서는 이것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중세에 메시아의 자손은 프랑스 말로 Sangreal이란 말로 정의되었다. 이것은 Sang과 real 이라는 두 단어에서 왔다. 그리고 이 말은 '왕의 혈통'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유대 왕가의 혈통이며 예수와 그의 자손을 통해 발전해 온 다윗왕의 혈통이기도 하다. 영어 번역으로 Sangreal은 'San Greal'이 되었는데 이는 '샌' 프란시코의 'san'과 같다. 온전히 다 쓰면 이는 'Saint Grail'로서, 'Saint' 물론 'Holy'와 관련이 있으며 이것은 후에 'Holy Grail(성배)'라는 말로 발전하게 된다.


중세로부터 영국과 유럽에는 메시아의 혈통에 관련된 기사의 법이나 군법이 있었다. 시온 왕국의 법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 법들 중 가장 명성있는 것은 성배의 기사단- Sangreal의 통치법이었다. 이것은 스코틀랜드의 왕가인 스튜워드 가의 법이기도 했다.

상징적인 의미로 성배는 예수의 피를 담고 있던 술잔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것은 포도주로 대신되기도 한다. 성배는 영적 친교를 위한 모임의 한가운데 놓여졌고 그 안에는 영원한 예수의 피를 나타내는 포도주를 담고 있었다.


그리스도 교회가 고대의 영성체 의식(儀式)을 보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의식의 진정한 의미나 기원은 무시하고 사람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다. 심지어 성배와 포도주의 신성함이 상징하는 궁극적인 의미에 대해 궁금히 여기는 사람들조차 그리 많지 않다. 사람들은 그저 이 의식이 최후의 만찬과 관련된 종교적 행위일 뿐이라고 막연히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의 영원한 피의 중요성을 의미한다. 예수의 피를 어떻게 영원할 수 있는가? 그것은 가계와 혈통에 의해서이다.


그러면 왜 교회는 성배의 중요성을 무시하려 했는가? 그들은 영성체는 지켰다. 왜 교회는 지금까지 성배가 상징하는 것을 이단으로 간주했는가?

모든 정부와 모든 교회는 기득권층의 역사와 신조를 가르친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제한된 지식만을 접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르쳐지는 것은 우리가 알아야 하고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대부분은 정부나 교회가 알리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도그마로 굳어지게 되고 보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에 도전하지 않는다.



성배와 포도주에 대한 원래의 의미가 사제들에 의해 재해석 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것은 예수에게 자손이 있었으며 그가 여자와 관계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재해석된 것은 성체 의식뿐만은 아니다. 복음 자체가 남성 중심의 로마 교회에 맞도록 왜곡되었다. 이것은 영화 제작자의 이해에 맞도록 자신이 원하는 테잎만을 편집하는 영화 편집자가 하는 일과도 흡사하다.

우리 모두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복음에 대해서는 익숙하다. 그러나 빌립보, 도마, 마리아, 막달레나의 복음은 어떠한가? 신약 성서가 만들어질 때 교회가 승인하지 않은 많은 복음과 서간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왜 그들은 이것들을 제외시켰을까?

신약 복음서에는 두 가지 기준이 있다. 그것은 397년 카르타고(역주: 아프리카 북부의 고대 도시 국가)의 심의회에서 결정되었다. 첫 번째 기준의 예수 직계 제자의 이름으로 쓰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한 마가는 예수의 제가가 아니었다. 누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후대 성 바울의 동료였다. 반면 복음서에서는 제외되었지만 도마(토마스)는 열두 제자 중에 한 사람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많은 다른 복음서가 신약에서 제외되었다.


그래서 중세를 통해서 도마와 다른 승인되지 않은 복음서가 사장되었다. 최근에서야 이것들 중 일부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중에는 땅속에 묻혀진 지 1,500년이 지난 후인 1945년에 이집트의 네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것도 있다. 이 책들이 최근까지 발견되지 않았지만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널리 알려졌었다. 위에서 언급한 복음서를 포함한 일부 복음서들은 초기 교회 성직자들의 글에도 나와 있다.

왜 다른 복음서들은 채택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신약에 채택되는 데에는 훨씬 더 중요한 기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완전히 여성을 처벌하는 기준이었다. 교회나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높이는 어떤 것도 제외되었다.


이것을 바탕으로 교회 자체의 규약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교회에서 여성이 가르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여성들은 기도를 하고 가르침을 받는 것만이 허용된다. 예수가 열두 제자를 거느렸을 때 거기에 여성은 한 명도 없었다. 여성의 머리는 남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몸이 머리를 통치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수 십개의 복음서가 채택되지 않은 이유이다. 이 복음서들은 예수 곁에 많은 활동적인 여성들이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 막달레나, 마사, 헬레나 살로메, 메리 제이콥 클레오파스, 죠안나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예수의 제자였을 뿐 아니라 나자렛에서 예배를 집행했던 성직자들로 기록되고 있다.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성 바울의 서간에서 그는 그를 돕는 여성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면 그가 교회의 자매라고 불렀던 포에베와 쥴리아, 교회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프리스실라 등이 그들이다. 신약에는 여성 제자들이 언급돼 있지만 교회는 그것들을 모두 무시했다. 예수의 제자들에 관한 교회의 설명이 좁혀졌을 때 그들은 말했다. "여성이 교회에서 연설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남성이 하는 일을 맡아서도 안된다."


교회는 여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독신에 대한 규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1138년에 그 규정은 법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 규정을 가능하도록 만든 것은 성직자들의 여성에 대한 편견이었다. 여성은 아내이고 연인이 되기 때문이다.


모성이 가진 성격은 혈통의 영속화이다. 모성과 혈통은 교회에서 금기시하는 주제이다.


이 이미지는 예수의 이미지와도 분리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성서는 독신에 대해 거론한 적이 없다. 성 바울은 티모시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주교는 한 여성과 결혼해야 하며 아이들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가족을 거느려본 사람만이 교회를 돌보는 일도 훨씬 더 잘할 수 있다고 했다. 로마 교회가 성 바울의 가르침을 특별히 지지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이 목적한 바를 위해서 그가 명백히 말한 것을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예수가 결혼했다는 사실은 전략적으로 무시될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의 독신주의, 결혼하지 않는 예수의 이미지는 그 시대의 다른 글들에서는 완전히 반대되었다. 450년 전인, 영국에서 헨리 8세가 죽었던 해인 1547년까지 결혼하지 않은 예수의 이미지는 공개적으로 반박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복음서들을 살펴보자.

예수의 탄생이란 주제에 관해 계속 이야기할 때, 우리는 연대에 관해서 살펴봐야 한다. 연도 또한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의 탄생을 다루고 있는 두 가지 복음서가 연도에 대해 완전히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마태 서에 의하면 아기를 살해하도록 명령한 해롯 왕 통치시에 태어났다. 그런데 해롯은 BC 4세기에 죽었다. 따라서 가장 권위 있는 성서와 역사 책들을 보면 예수의 탄생은 BC 5세기라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누가 서에서는 완전히 다르게 적고 있다. 누가는 헤롯 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누가는 예수가 시레니우스의 시리아 통치시에 태어났다고 적고 있다. 시레니우스는 AD 6세기에 시리아 통치자로 임명되었다.

그래서 예수는 BC 4세기 이전에, 그리고 AD 6세기에 태어났다. 이것은 기록상의 실수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실은 여기서 두 개의 다른 출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두 복음서 모두가 정확하다. 이들은 예수의 육체적인 출생과 제2의 탄생인 성인식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왕가의 자손들에게 적용된다. 제2의 탄생은 일정한 의식에 의해 거행되었다. 그들은 포대기에 싸여져서 어머니의 자궁에서 다시 태어나듯이 의식이 거행되었다. 제2의 탄생의식은 12세 때 거행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가 AD 6세기에 열두 살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불행히도 후에 누가서를 번역한 사람들은 이 사실이 갖는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었다.

예수가 AD 6세기에 열두 살이었다면 BC 7세기에 태어났다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가 해롯 왕의 통치 말기에 태어났다고 하는 마태의 설명과도 일치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또 다른 기이한 일을 발견한다. 누가가 복음서 뒷부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열두 살 때에, 그의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이 그를 예루살렘에 데려 갔으며 하루동안 걸어 여러 사람들과 집에 돌아왔을 때 예수가 없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 예수가 박사들과 '아버지의 사업'에 대해 의논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하지만 어떤 부모가 사막을 건너 오면서 하루 종일 열두 살 짜리 아이가 없어진 것을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이 문장의 전체 요점이 사라지고 말았다. 열두 살 짜리(twelve-year-old) 소년은 13세의 생일을 맞을 때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 의식을 치뤘으며 1살(first year)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현대의 바르미츠바(역주: 13번 째 생일 직후에 있는 유태교의 성인식)의 기원이 되었다. 그의 공동체의 성인(成人)이 되는 의식은 9년(in ninth year) 후인 21세에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21세 때의 순례 여행의 계기가 되었다. 그 후 많은 사건이 있었고 중요한 일은 12년 째 되는(in his twelfth year) 24세 때 일어났다. 예수가 12살(in his twelfth year) 되던 해에 사원에 남아 있을 때 그의 실제 나이는 24세였다. 그가 사막을 헤메고 있지는 않으리라고 부모가 생각해도 놀랄 나이는 아닌 것이다.


그가 박사들과 의논하던 것은 자신의 다음 단계에 관해서였다. 그때 그는 공동체의 영적인 아버지와 이 일을 의논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의논한 것은 아버지의 사업에 관해서 였다. 이 시기 공동체의 영적인 아버지는 에세네 학파의 시메온이었다. 누가서의 앞 몇 구절을 살펴보면 그 사람이 예수를 법적으로 인정한 공정하고 신앙심 깊은 시메온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복음서를 신뢰할 수 있는가? 그렇다. [요점]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복음서를 신뢰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신뢰할 수 없는 것은 그것들이 서로 얽키고 설켜서 왜곡된 방식이다. 그리고 처음 적혀 있던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서 우리가 가르쳐졌다는 것이다.


현재의 영어 복음서는 17 세기 초기의 영국의 스튜워드 가(家) 제임스 1세 때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독립을 선언하기 165년 전에 발행되었다. 초기 교회의 복음서들은 2세기와 3세기에 그리스말로 처음 쓰여졌고 성서 전체와 함께 4세기에 라틴 말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영어로 번역된 것은 1000년 이상이 지나서이다.


그당시 성서번역은 위험한 일이었다. 14세기의 개혁가인 죤 위클리프는 성서를 영어로 번역한 것 때문에 이단으로 비난 받았다. 그의 책들은 불태워졌다. 16세기 초에 벨기에에서 윌리엄 틴데일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 때문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 후 틴데일의 제자였던 밀레스 코버데일은 새롭게 영어번역을 시도했다. 당시 교회는 분리가 되어서 코버데일의 번역판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로마 교회의 눈에 그는 여전히 이단이었다.

문제는 성서가 까다롭고 모호한 언어로 쓰여져 있어서 (그것은 일반적인 라틴어가 아니라 교회에서만 쓰이는 끔찍한 라틴어였다.) 주교들만이 성서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들은 무엇이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성서가 다른 사람들들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되어서 잃혀졌다면 이런저런 질문에 대답해야 했을 것이므로 그것은 교회로써는 문제였을 것이다.


(출처: 지금여기 1998년 5/6월호, 통권3-3호)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 | 출처: Leonardo da Vinci 作



홀리 그레일(聖盃)의 숨은 역사 2편

로렌스 가드너 / 주혜명 옮김


계보학자인 로렌스 가드너 경은 라는 책을 썼다. 올해 글로벌 사이언스 회의에서 발표된 자료이기도 한 이 내용은 기독교를 비판하거나 기존 질서에 해를 입히기 위함이 아니라 좀더 객관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볼 수 있게 할 것이다. 덧붙여 성배의 진정한 의미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영어 판 성경이 번역된 것은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 때인 17세기 초이다.

이것은 권위 있는 성경으로 그후 대부분의 영어 판 성경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직접 번역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 판과 라틴어 판, 그리고 그밖의 암암리에 이루어졌던 다른 언어 판에서 번역돼 나온 것이다.


신약 성서를 만들 때 제임스 왕의 역자들은 신교와 카톨릭 모두를 만족시키려고 노력했다. 이것이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성경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양쪽 모두를 만족시키려 했던 그들의 시도는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다. 카톨릭은 역자들이 신교의 편에 섰다고 생각했고 신교들 또한 그들이 카톨릭 세력의 입장을 옹호한다고 여겼다.


어쨋든 성서는 번역돼 나왔지만 역자들은 어느 쪽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정치적인 수정'을 가해야 했다. 우리는 오늘날 많은 구절에서 이러한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그 중 한 예로, 직접 번역을 한 성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을 '하늘의 병사들'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탐탁치 않게 여기던 역자들이 그것을 지우고 '하늘의 군대(army)'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또 다른 역자가 나타나 이것도 적절하지 않다고 지워버렸다. 그리고는 여러 세기 동안 사용되지 않은 영어 단어로 대치해 버렸다. 그래서 결국 '하늘의 군대(host)'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하늘의 군대가 무엇인지 모른다. 사실 제임스 왕 당시에 만들어 진 성경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불분명한 말이나 고어들이 적지 않게 사용되었다. 월리엄 셰익스피어도 자신의 작품에 이런 말들을 썼다.


제임스 왕과 셰익스피어 이전과 이후에 존재하던 책들을 비교해 보면 영어 단어가 50 퍼센트 이상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 시대의 작가들이 새로운 말들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그 단어들 대부분의 정확한 의미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어 판 성경의 언어는 시적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영어와는 매우 다르다. 그것은 영어로 번역 되기 전의 언어인 그리스어나 라틴어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어떤 사제가 말한 것처럼 하느님의 언어도 아니다.

그러나 이 영어 판 번역에서 다양한 성경이 나왔다.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원래의 그리스 어 판에서 나온 것들 중에 가장 원전에 가까운 것이다. 그밖의 성서 판들은 상당히 왜곡되어 있으며 특정한 문화와 관련돼 번역되기도 했기 때문에 성서 연구에 적합하지 않다.


그런 예로 남태평양의 파푸아 뉴기니의 성경을 들 수 있다. 파푸아 뉴기니 부족들의 삶은 돼지와 많은 관련을 맺고 있다. 현재 파푸아 뉴기니에서 나오는 성경에는 원래 소, 사자, 당나귀, 양 등이 모두 돼지로 번역돼 있다. 심지어 '하느님의 양도'도 이 성경에는 '하느님의 돼지'로 번역돼 있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정확한 성경을 보고자 한다면 히브리어와 아람어(역주: 북서 샘어족에 속함. 예수와 그 제자들의 모국어)가 섞여 있는 그리스 어 판을 살펴봐야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예수의 탄생 이야기가 그랬듯이 많은 부분이 잘못 이해되고 번역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때로는 원전의 단어가 번역되는 언어의 단어에는 없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예수의 아버지가 목수라고 배웠다. 그러나 원전에는 그렇게 쓰여 있지 않다. 원전을 가장 잘 번역하면 요셉은 수공품을 만드는 장인(master of craft)이었다. 역자는 '목수'라는 단어를 '장인'으로 이해한 것이다. 중세의 장인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목수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원전은 단지 요셉이 장인이었으며 학식있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또 다른 예는 원죄 없이 잉태된 예수의 탄생에 관련된 것이다. 우리의 영어판 성경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동정녀라고 말한다. '처녀'라는 말을 한 번 살펴보자. 우리는 이 말을 이해한다. 그것은 그녀가 성적인 관계를 경험한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원래 그리스어가 아니라 라틴어에서 번역되었다. 라틴어로 'virgo'라고 돼 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는 처녀의 의미가 아니다. virgo는 단지 '젊은 여자'라는 의미이다. 오늘날 우리가 처녀의 의미로 여기는 것은 라틴어로 virgo intacta에 해당한다.


라틴어 판 이전의 성경을 살펴보자. 왜 라틴어 판에서 마리아를 젊은 여자라고 했을까? 어쩌면 그들은 후에 사람들이 왜곡한 점을 옳게 이야기 했는 지도 모른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젊은 여자들 의미하는 단어인 almh로 돼 있다. 이 단어는 성적인 관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만약 마리아가 그런 관계를 경험하지 않은 동정녀였다면 히브리어로 bethula로 쓰였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완전히 잘못 인도했는가? 그것은 아니다. 영어 판 성경을 번역한 역자들이 우리를 잘못 인도했을 뿐이다. 그리고 성서 안의 여성들에게 평범한 생활을 허용하지 않았던 교회에 의해 잘못 인도되었을 뿐이다. 신약에 나오는 여성들은 처녀이거나 매춘부이거나 때때로 과부이다. 결코 평범한 어머니이거나 가정 주부인 법이 없다. 물론 여사제인 경우도 없다.

뿐만 아니라 성서는 예수가 다윗 왕의 자손이라고 말한다. 사도행전에서 바울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의 아버지는 목수이며 어머니는 동정녀라고 배웠다. 그런데 원전에는 이 두 가지 사실 모두를 발견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로 우리는 성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대 언어로 번역된 것 보다는 원전에 쓰여진 것을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네 개의 주요 복음서가 언제 쓰여졌는 지는 확실치 않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일세기 후반에 처음 출판되었다는 사실뿐이다. 처음에는 이 네 복음서 모두 예수가 나자렛인이었다고 말한다. 사실상 이것은 로마의 기록에도 나와 있다. 그리고 일 세기의 이스라엘 인들의 기록과 예수의 제자들이 남긴 성서 기록을 보면 예수의 남자 형제인 제임스와 바울이 나자렛의 지도자였다고 한다.


성배의 이야기에 있어서 '나자렛(Nazarene)'의 정의는 의미 심장하다. 예수가 나자렛 마을에서 온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지난 100년 간 영어 복음서는 '나자렌 예수'를 '나자렛의 예수'로 잘못 번역함으로써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나자렌과 나자렛 마을 사이에는 아무 연관도 없다. 사실 나자렛에 사람이 정착한 것은 예수가 돌아가신 30년 후인 서기 60년 경이다. 예수가 살았던 당시에는 아무도 나자렛에 살지 않았다.

나자렌이란 바리세 인의 지배에 완강히 저항한 당시의 진보 세력이었다. 나자렌의 문화와 언어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공동체는 남녀 평등 사상을 존중했다. 기록은 나자렛이 아니라 나자렌 문화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여자 사제들과 남자 사제들은 평등했다. 이것은 남성 중심 사회였던 히브리 문화나 로마 문화와는 사뭇 다른 것들이었다.



예수가 크리스찬이 아니라 급진적인 유태인인 나자렌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크리스찬'이라는 단어는 AD 44년 시리아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이 단어는 예수를 지칭하게 위해서 쓰인다. 이 단어는 '수호자'라는 뜻이다.


예수가 돌아가신 후 베드로와 그의 친구 바울은 안티오키카로 갔다가 후에 로마로 갔다. 그리고 그들은 크리스찬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기록을 보면 예수와 예수의 형제인 제임스, 그리고 다른 제자들은 나자렌 운동을 계속 해나갔고 유럽에까지 그것을 밀고 나갔다. 그것이 켈트 교회가 된 것이다. 쿄회로써의 나자렌 운동은 켈트 교회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로마 교회는 바울과 베드로의 크리스찬 운동이 3세기 동안이나 지속된 300년 후에서야 형성되었다.


여러 세기가 지나는 동안 나자렌에 기반을 둔 켈트 교회는 로마 교회의 반대에 직접적으로 부딪혔다. 이 둘의 차이점은 단순하다. 나자렌의 신앙은 예수 자신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것이다. 로마 기독교는 '교회주의(Churchianity)'이다. 그것은 예수가 전한 메시지는 아니다. <다시 말해서 나자렌 교회는 사회를 위한 진정한 교회이며 로마 교회는 교황과 제왕들을 위한 교회이다.>


오해와 오역, 잘못된 번역의 문제 말고도 복음서는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여러번 개정되었다. 그래서 어떤 부분에서는 원래의 의미가 바뀌거나 누락되었다. 그리고 교회가 의도한 바에 따라서 첨가된 것도 있다. 성격이 원래의 그리스어에서 번역되었던 4세기에 많은 개정이 이루어졌다.

심지어 그 이전인 AD 195년(1800년 전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먼트 주교는 복음서를 처음으로 개정했다. 그는 100년 이상 전에 쓰여진 헤로데 복음서의 상당 부분을 삭제했다. 그리고 한 편지에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그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할 지라도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것에 동의하면 안된다. 모든 진리가 모든 사람에게 공개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재미 있는 생각이다.


오늘날까지도 클레먼트 주교가 삭제한 부분은 마가 복음서에서 빠져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원래의 마가 복음과 부분적으로 삭제된 현재의 복음을 비교해 보면 현재의 것이 오히려 더 길다는 것이다. 첨가된 부분 중에는 부활에 대한 것도 들어 있다. 이 내용은 16개의 절 정도가 된다.




그리스도 부활교회

성 페테르부르크(Sankt Peterburg)에 소재한 그리스도 부활교회(피의 성당) | 출처: press.sac.or.kr




예수의 죽음 후의 내용은 14세기 말에 교회 주교들에 의해 첨가 되었다는 것이 오늘날에 밝혀 지고 있다. 이것이 바티칸의 문서에 있다고 하더라고 일반 사람들이 그 문서를 접하기는 어렵고 만약 접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오래된 그리스어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마가 복음서에서 클레먼트 주교가 삭제한 부분은 정확하게 무엇일까? 그것은 나사로(역주: 예수가 죽음에서 살린 남자)를 다룬 부분이다. 원래의 마가 복음에서는 나사로는 추방의 상태로 묘사되었다.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에 가까웠던 것이다. 여기에서는 나사로와 예수가 무덤에 가기 전에 서로를 불렀다고 되어 있다. 주교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을 단순히 추방 상태가 해제된 것이 아니라 기적으로 묘사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마가 복음에서 삭제된 부분은 더 있다. 왜냐하면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마가는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결혼한 상태였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요한복음에 있는 나사로의 이야기는 좀 이상한다. 이 이야기에서는 마르타(역주: 라자로의 누이)가 나사로의 집에서 나와 예수에게 인사를 했으며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부를 때까지 집 안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원래 마가 복음은 막달라 마리아가 마르타와 함께 그 집으로 왔으며 제자들이 그녀를 책망하자 집 안으로 들어가 예수의 지시를 기다렸다고 되어 있다. 유대 법은 아내는 어떤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남편의 지시가 있기 전에는 집에 나타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부부였다는 것은 성서 밖의 많은 곳에 명시돼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성서는 어디에도 그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이 복음서에는 있었을까?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가나에서 결혼했다고 한다. 이들의 결혼이 복음서에 나와있기는 하지만 성서에서는 이것을 보통의 결혼식으로 묘사하지는 않았다. 이 결혼은 베다니(역주: 예루살렘 근처의 올리브 산 밑에 있는 마을. 신약성서에서 라자로가 살던 마을로 예수는 예루살렘의 마지막 시기에 종종 체류했었음.)에서 의 기름을 발라 주는 것이 나와 있다. 이것은 두 번째로 기름을 바르기 이년 반 전의 일이다.


'메시아'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기름 바르다'에서 왔다. 또 이것은 이집트 말 masseh, 즉 '신성한 악어'에서 왔다. 이것은 파라오의 여자 형제들이 결혼을 할 때 남편들에게 악어 기름을 발라준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구약 성서의 솔로몬의 노래에서도 우리는 왕에게 기름을 발라 주는 신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신약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에게 기름을 발라 주는 것은 신부가 남편에게 해주는 의식을 의미한다. 그런 다음에 마리아는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을 닦는다.


메시아를 기름으로 닦아 주는 다른 경우에는 항상 남자들에 의해서 였다. 그럴때에 사용되는 기름은 올리브 오일이다. 이럴 때 감송유를 쓰는 경우는 없다. 감송유는 메시아의 신부였던 막달라 마리아만이 사용했다.

메시아의 결혼은 항상 두 단계로 이루어졌다. 첫 단계는 누가 복음서에 나오는 기름 바름인데 이것은 법적인 결혼을 말한다. 두 번째 단계는 마태 복음, 마가 복음, 요한 복음에 나오는 기름 바름인데 이것은 두 사람의 결합을 굳게 하는 것이었다.


복음서의 많은 부분이 원래는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동안 우리는 피상적인 것을 넘어서 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이 문제에 관련해서 우리는 사해사본(Dead Sea Scrolls, 역주: 사해 북서부의 동굴 등에서 발견된 구약 성서 기타를 포함한 고사본의 총칭)과 오스트레일리아 신학자 바바라 시어팅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사해 사본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 주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스라엘의 메시아 위원회에 대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이 문서들에 따르면 열 두명의 사도들이 정부 직책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그들의 이름 뿐만 아니라 그들에 대해서, 그들의 가족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의 의무와 직책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복음서 안에 어떤 비유가 들어 있음을 이해한다. 그것은 오늘날에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다. 이제 우리는 세례를 주는 사제를 '어부'라고 부른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예비 세례자들이 '물고기'라고 불렸던 사실도 이해한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어부'였었고 예수는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드리라"라고 말했다.


이제 우리의 복음서 시대에 쓰이던 특정한 용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일 세기에 복음서가 쓰여졌을 때는 로마가 통치하던 시기이다. 그래서 그 내용은 로마의 검열 때문에 쓰여졌을 때는 로마가 통치하던 시기이다. 그래서 그 내용은 로마의 검열 때문에 바뀌기도 했다. 성경에 쓰인 내용은 정치적인 것도 많았다. 중요한 부분에서는 이러한 말이 앞에 나오기도 했다. "이것은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들을 위해서이다." - 이것은 이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만약 복음서들이 쓰여진 대로 읽힌다면 예수는 당시 로마 제국의 압제에 대항해서 사람들을 규합하는 급진적인 지배자로 비칠 것이다. 당시의 유대는 2차 대전 당시 독일 치하의 프랑스와도 같았다. 정부는 군대의 통치를 받았고 저항운동이 일반적이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기다렸고 그를 메시아로 추앙했다. 1세기에는 예수가 '현명한 사람', '스승', '왕'으로 불렸다. 그러나 신의 존재라고 하지는 않았다.

사해 사본은 이스라엘의 메시아를 이스라엘 최고의 군사 사령관과 동일시한다. 당시에 사도들이 무기를 지녔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예수는 그들 모두가 칼을 지니도록 했다.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베드로는 말커스에 대항에 칼을 휘두른다.


예루살렘의 많은 지식층 유대인들은 외국의 군사 통치에 의해 유지되는 권력에 만족하고 있었다.

히브리인들 사이에서도 파벌 주의가 강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여호와 신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하지 않았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 사람들(역주: 유대교의 내세를 부정한 파)에게 유대인들은 선택받은 민족이었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속해 있었고 그들은 하느님에게 속해 있었다. 그러나 더 진보적인 유대인들이 있었다. 이 두 세력의 격차는 매우 컸다.


예수에게 형을 내린 것은 로마 총독 빌라도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사실 상 산헤드린(역주: 71명으로 이루어지는 유대의 최대 의회, 종교 문제, 민사, 형사를 담당.)에서 형을 선고 받고 추방되었다. 예수에 대한 처벌은 미리 예정된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에게 반항하는 다른 사람들도 처헝할 계획이었던 로마 총독에 의해 처형당했던 것이다.

산헤드린이 밤 시간에 회의를 하거나 유월절에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은 불법이었다. 그래서 타이밍도 완벽했다. 그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미안합니다. 우리는 이 일을 집행할 수 없어요. 로마 총독님, 당신이 해주세요."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신체적인 죽임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사실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릴 때에 이미 거의 죽은 상태였다. 그는 비난 받고, 매질 당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제명'이라고 한다. 삼일 동안 예수는 아팠다. 그리고 사일 째에 죽게 된다.


우리는 예수의 신체적 죽음을 증명하는 것은 그가 창에 찔릴 때 쏟았던 피라고 배웠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번역이다. 원래의 단어는 '찔리다'의 뜻이 아니라 '찔린 상처'이다. 이 단어가 라틴어로 '열리다', 그리고 영어로 '찔리다'라는 동사로 번역된 것이다.

이것은 원시 시대에 있었던 일이 아니다. 당시에는 의사와 의술이 있었으며 병원도 있었다. 반사 행동을 시험해 보려면 날카로운 도구로 사람을 찌르거나 건드려 본다.


나에게는 영국 의료 위원회에서 온 편지가 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의학적으로 죽은 몸에서 혈액이 분출하는 것은 설명하기 불가능합니다. 찔린 상처에서 혈액이 나오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의 증거입니다. 죽은 몸에서 피가 솟게 하기 위해서는 아주 큰 상처를 내야 합니다. 죽은 몸에서는 혈관 작용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복음서에는 어떻게 쓰여 있는지 보도골 하자. 요셉은 예수의 몸을 십자가에서 내려 놓는다. 사실, 영어로 번역된 단어, "body'라는 라틴어로 soma 죽, 살아 있는 몸이라는 뜻이다. 죽은 몸은 ptoma라고 한다.

예수는 살아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책들에도 나와 있다. 심지어 코란도 예수가 십자가에서 살아 남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던 금요일 오후, 세 시간 앞당겨진 시간 변화가 있었다. 시간은 해시계와 사제들에 의해서 기록되었는데 그것은 기도 시간의 경과에 따라 시간을 표시한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낮 시간과 밤 시간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하루에 24시간이 있다고 한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는 "낮에는 열 두 시간이 있지 않은가?"라고 말한다. 그렇다. 낮에는 열 두 시간이 있고 밤에도 열 두 시간이 있다. 그리고 낮 시간은 해 뜨는 시각과 함께 시작된다. 때때로 이 낮이 시작되는 시각이 달랐다. 그래서 밤이 시작되는 시간도 바뀐 것이다. 삼월에 낮 시간이 시작되는 것은 오전 여섯 시 정도이다.


우리는 아리마데에서 요셉이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리기 위해서 빌라도와 타협한 것을 알고 있다. 복음서들은 이 사건의 시간 순서에 대해서 똑같이 말하고 있지 않다. 어떤 복음서는 낮 시간이 바뀌기 전의 시간을 이야기하고 어떤 복음서는 낮 시간이 바뀐 이후의 시간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세 시간이 낮 시간에서 사라졌다. 그것은 세 시간의 밤 시간으로 대체되었다. 밝은 대낮의 시간들이 어두웠다고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복음서는 세 시간 동안 깜깜했다고 전한다. 오늘날 우리는 세 시간의 밤 시간을 낮 시간으로 바꾸어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 잇달은 사건에서도 이 세 사건이 매우 중요한다. 히브루에서 음력을 주장하던 에세네와 마기 사람들은 낮 동안에 시간을 바꿨기 때문이다. 태양력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자정이 될 때까지 시간을 바꾸지 않았다. 이것은 복음서에 따르면 히브루 시간으로는 예수는 세 시에 처형되었는데 그것은 태양력 시간으로는 여섯 시에 해당한다.


그날 저녁 히브루 인들은 아홉시에 안식일(Sabbath: 유태력의 주말로 금요일의 일몰부터 토요일의 일몰까지의 하루)을 시작했다. 그러나 양력을 쓰던 에세네와 마기 사람들은 안식일이 시작될 때까지 아직 세 시간이 남아 있었다. 안식일에는 어느 누구도 육체적인 일을 하도록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태양력 사용으로 안식일까지 남은 이 세 시간 동안 그들은 예수를 위한 일을 할 수 있었다. 그 시간동안 다른 누구도 예수의 몸에 손을 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 이제 성서에서 가장 잘못 이해되고 있는 부분을 말할 때가 온 것 같다. 그것은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아기가 AD 33년 9월에 태어난 것이다. 예수의 세 자녀가 태어난 사실은 예수의 승천과 함께 성서에서 잘못 이야기 되고 있는 사건 중의 하나이다.


(출처: 지금여기 1998년 7/8월호, 통권3-4호)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 | 출처: Leonardo da Vinci 作



홀리 그레일(聖盃)의 숨은 역사 3편

로렌스 가드너 / 주혜명 옮김


계보학자인 로렌스 가드너 경은 라는 책을 썼다. 올해 글로벌 사이언스 회의에서 발표된 자료이기도 한 이 내용은 기독교를 비판하거나 기존 질서에 해를 입히기 위함이 아니라 좀더 객관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볼 수 있게 할 것이다. 덧붙여 성배의 진정한 의미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수가 처형될 당시 막달라 마리아는 임신 3개월이었고, 9월에 아기를 출산할 예정이었다. 그렇다면 성서는 기원 전 33년 9월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사실 성서는 표면적으로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사도행전 안에 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는 '승천'이라고 알려져 있다. 승천은 3세기 후에 로마 교회가 세워졌을 때 행해졌던 의식에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성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그가 이것들을 말할 때 그는 들어 올려 졌고 구름이 그를 감싸서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계속된다. '흰옷을 입은 사람이 사도들에게 말했다. 왜 너희는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가? 너희 앞에서 사라져버렸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이 올 것이다.' 또 사도행전은 <하늘>은 예수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적고 있다.


그때는 막달라 마리아의 아이가 태어날 달이었다. 마리아의 해산과 '승천'은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물론 그렇다. <다시 돌아올 때>라는 말이 그 연결고리이다. 당시에는 메시아 후계자의 결혼 의식을 관장하는 규칙뿐만 아니라 그 결혼 자체를 관장하는 규칙이 있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일반 유대인들의 평상적인 생활 규범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메시아의 부모들은 아이가 출생할 때 헤어졌다. 왕가의 남편과 아내들은 12월에만 관계를 갖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래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언제나 9월이었다. 9월은 유대교의 달력으로는 가장 신성한 달이다.

예수의 부모(마리아와 요셉)가 헤어진 것도 바로 그 규칙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유대인들 사이에 예수가 진정한 메시아냐 아니냐에 대해 의견이 나눠진 것도 이 때문이다.


왕가의 아이가 잘못된 시기에 임신이 되면 어머니는 남의 눈을 피해서 은둔하게 된다. 마리아의 임신이 알려졌을 때를 마태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공정한 사람이었지만 아내가 대중 앞에 서는 것을 원치 않았던 요셉은 그녀를 은밀히 보내 사람들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는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AD 32년 12월에 임신해서 AD 33년 9월에 아이를 출산했다.


왕가에서는 아이가 태어난 때로부터 남자 아이라면 6년, 여자 아이라면 3년 동안 부모가 서로 떨어져 있게 된다. 그래서 어머니와 아이는 수도원에 들어가고 아버지는 '하늘의 왕국'에 들어갔다. 사실상 하늘의 왕국은 사해 근처의 수도원이었다. 그리고 수도원에 들어갈 때의 의식은 순례자의 리더가 감독하는 가운데 천사 사제들에 의해서 거행됐다.


그래서 예수는 구름(순례자의 리더)에 의해서 하늘의 왕국(수도원)으로 들어올려졌고 흰옷을 입은 사람(천사의 사제)은 예수가 다시 돌아온다고 말했다(그의 세속에서의 결혼 생활이 시작될 때).


그래서 AD 33년 9월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첫 아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예수는 '하늘의 왕국'으로 들어갔다. 예수가 AD 36년에 다시 돌아온 것으로 보아서(3년만에 돌아왔으므로) 이 아이는 딸이었다.


연대기에 의하면 AD 37년에 예수의 두 번째 아이가 태어난다. 그리고 AD 44년에 세 번째 아이를 낳는다. 그것이 6년의 간격을 두고 이루어진 것을 보면 두 번째 아이는 남자 아이였다. 그리고 세 번째 아이도 남자 아이였다.


사해 사본(사해 북서부의 동굴 속에서 발굴된 구약 성서 등을 포함한 고사본의 총칭)에 기록된 필사본에 따르면 신약 성서 안에 모든 비의(秘意)적인 내용은 '들을 귀 있는 자들을 위하여'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러한 코드와 비유가 이해된다면 그것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늘 같은 뜻으로 사용되며 이해될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의 두 번째 아들이 태어나기 전, 그녀는 정치적인 소요를 피하기 위해서 유대를 탈출했다. 필립, 라자로스 그리고 몇몇 사람들과 함께 그녀는 가울(현재의 프랑스)의 리용 근처로 갔다.


프랑스에서 그녀의 삶은 유럽 역사뿐 아니라, 바티칸이 그녀에 대한 언급을 금하기 전에는 로마 교회사에도 나타난다.


막달라 마리아의 탈출은 요한 계시록에도 나와 있다. 요한 계시록은 로마 당국이 어떻게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을 박해했는지도 말한다. '임신을 한 그녀는 출산의 고통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머리가 아홉 개 달리고 일곱 개의 왕관을 쓴 용을 보았다. 그 용은 그녀의 아이를 잡아 먹으려고 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고 나서 숲으로 도망쳤다.'




티히빈의 성모
티히빈의 성모 성상화(聖像畵; икона) | 출처: 러시아 정교회 수도원

예수 그리스도의 비전 사항(피라밋, 히란야, 샤론의 장미(무궁화(Rose of Sharon), 히란야)을 드러내고 있는 성상화

17세기 초 스웨덴이 러시아를 공격하려고 했을 때, 러시아를 수호한다는 그림. 성모와 아기 예수의 복장이 이채롭고

얼굴의 표현이 대단히 사실적이다. 옷 주름 처리와 외각의 문양 또한 솜씨가 뛰어난 금속타공에 의해서 제작되었다.




이제 예수의 성혈을 담고 있는 잔인 성배의 전통적인 상징으로 돌아가보자. 그것은 BC 3500년경인 암흑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성배 혹은 잔이 오랫동안 여성의 상징이었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신성한 그릇 즉 자궁을 나타낸다.


마리아가 프랑스로 도망갈 때 그는 신성한 잔, 자궁 안에 아기를 갖고 있었다.

두 번째 아들의 이름은 요셉이었다.


15세기 초 예수와 마리아의 후손인 피셔 킹은 시캄브리안 프랑크와 결혼했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새로운 왕조가 생겨났는데 메로빙거 왕조이다. 그들은 프랑스 군주제를 마련하고 fleur-de-lys(고대 유대인들의 그리스도 할례제 상징)을 프랑스 왕실의 문장에 도입했다.


메로빙거 왕조(역주: 프랑크 왕국 전반부 500년부터 751년까지)의 계승으로부터 또 다른 가계가 남부 프랑스에 완전히 독립된 가계를 형성했다. 우리가 랑구에독이라고 알고 있는 셉티 메니아 왕국이 그것이다. 그리고 토우로스, 아퀴테인, 프로방스의 초기 왕자들은 모두 성배, 곧 메시아 혈통의 후예들이다.


피셔 킹으로부터 또 다른 중요한 가계가 나왔다. 메로빙거 왕들이 예수 쪽의 부계 혈통을 잇는 반면에 또 다른 가계는 막달라 마리아의 모계 혈통을 잇고 있었다. 그들은 버건디의 아발롱 여왕들이었다.


아더 왕과 성배의 전설에 익숙한 사람들은 피셔 왕의 메시아 가계가 가진 중요성을 인식했을 것이다.


예수의 후손들은 로마 교회에 위협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자리아 교회의 진정한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로마 교회는 본래 존재하지도 않았었다. 그것은 유대교를 기반으로 다양한 이교도 사상을 접목해서 구성된 종교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BC 7세기에 태어났으며, 그의 생일은 3월 1일이지만 왕조의 전통에 따라서 그의 '공식적'인 생일은 9월 15일로 되어 있다. 그러나 4세기에 로마 교회가 설립될 때 콘스탄틴 대제는 이 두 날짜 모두를 무시하고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정했는데, 이것은 이교도의 태양 축제일과 일치한다.


후에 664년 휘트비의 시노드에서는 주교들이 켈트족의 부활절 축제에 기독교적 의미를 부여했다. 이렇게 하면서 그들은 유월절과 관련된 켈트족 축제일의 전통적인 관계를 끊기 위해서 켈트족 축제일을 변경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다양한 요소가 섞여서 발달했다. 예수가 촉매 작용을 한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통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지 않다. 기독교는 로마교회의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다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예수가 베드로와 바울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있다는 데에 있다. 그들의 가르침은 예수의 나자렛 교회와 그의 형제 제임스에 의해 비난받은 것이었다.


예수의 가르침을 무시할 때 교황과 주교들은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제정되었을 때 콘스탄틴은 예수가 아니라 그 자신이 메시아라고 선언했다.


로마 교회가 막달라 마리아의 자손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의 존재와 그녀가 예수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의 형제 제임스는 어떻게 됐을까? 그 역시 자손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형제들, 사이몬 요세스, 쥬드로 마찬가지였다. 교회는 성서에서 예수가, 마리아의 여러 아들 중 첫 번째 아들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래서 교회는 마리아를 처녀로,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묘사했다. 이 두 가지는 성서원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날조된 이야기는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초기에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믿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막달라 마리아, 마사, 메리 제콥 클레오파스, 헬레나 사로메 같은 나자렛 여성들이 지중해 전역에서 학교를 운영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었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절친한 친구였다.


<교회가 택한 유일한 해결책은 성서의 모든 여성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여성의 성직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지위까지도 거부했다. 그래서 교회는 여성들을 모두 이도교나 마녀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성차별에도 불구하고 메시아의 자손들은 로마 교회 밖에서 자신의 사회적인 위치를 공고히 해나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나자렛과 켈트 교회 운동을 전개하고 영국과 유럽에 데스포지닉 왕국을 세웠다. 그들은 로마 교회와 교회의 힘에 의해 유지되는 군주들에게는 끊임없는 위협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잔인한 이교도 심문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교회가 요구하는 것과 반하는 도덕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규범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성들에 대한 존경을 표했던 기사도 시대에 특히 두드러졌다. 이 시대의 템플 기사단은 선서를 할 때 '성배의 어머니' 막달라 마리아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왜 끔찍한 이교도 심문이 시작되었을까? 그것은 템플 기사단이 로마 교회에 반대해서 그들 자신의 시토 수도회 교회를 설립했기 때문이다. 이 건물들은 다른 교회와는 달랐다.


이 건물들은 서구 세계의 스카이라인(하늘을 배경으로 한 건물들의 윤곽)을 우아하게 만든 가장 위대한 종교적 기념물이었다.


현재의 이미지와는 달리 이 장엄한 고딕 성당은 기독교 교회 건물과 아무 관계가 없다. 이 성당들은 템플 기사단에 의해 설립되었고 막달라 마리아에게 바쳐졌다. 물론 이들은 로마 교회가 장려하던 것과 맞섰다. 그래서 로마 교회 주교들은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많은 교회를 바침으로써 앙갚음을 했다.


그들은 모든 초상에서 마리아에게 푸른 색과 흰 색의 옷만 입게 했다. 남성만이 사제가 될 수 있는 교회는 그녀에게 어떤 성직도 주지 않은 것이다.


반면에 막달라 마리아는 추기경 급의 옷인 붉은 색 망토나 나자렛 여사제의 옷인 검정색 의상을 입었다. 로마 교회는 여기에 대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주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종교가 사악하고 이교도적이라고 주장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관할 밖에 있었던 막달라 마리아와 그녀의 자손을 무시했다.


1100년대부터 강력한 템플 기사단과 그들의 대성당은 예수와 막달마 마리아의 유산을 대중 앞에 끌어냄으로써 '남성만이 대우받는' 교회를 위협했다.


대성당은 메시아의 후예들이 지배권을 갖게 되면 교회의 기반 자체가 흔들릴 것임을 알았다.


교회는 그들을 박해해야만 했다. 그래서 무자비한 이교도 심문이 자행되었다. 그것은 모두 교황 이노센트 3세가 1208년 30,000명의 군인을 보냈던 남부 프랑스의 랑구에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곳은 케사의 고향이었다. 그는 정통 기독교를 뒤엎을 수도 있는 비밀인 '위대하고 신성한 보물'의 수호자로 알려져 있다. 소위 교황의 알비젠샨 십자군 원정은 36년간 계속됐다. 이 기간 동안 수만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그러나 그 보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교도 심문은 1231년, 대학살의 기간 동안 교황 그레고리 4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성배이단론(성배의 전통에 어긋나는 것을 이단으로 하는 것)'을 지지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1252년경 이교도를 고문하고 화형에 처하는 것은 공공연하게 인정되었다.


이단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교회만이 할 수 있었다. 희생자들은 자백할 때까지 고문당했고 자백하고 난 다음에는 처형을 당했다. 만약 그들이 자백하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고문을 당했다. 고문의 한 방식은 사람을 눕혀놓고 산 채로 불 위에서 몸의 한 부분씩 태우는 것이었다.


이 야만적인 고문과 처형은 400년 이상 계속되었다. 그리고 유대인들, 이슬람교도,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에게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교도 심문은 끝나지 않았다. 최근인 1965년 그것은 '신성한 모임'이라고 다시 이름 붙여졌고 그 힘은 오늘날에도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교도 심문에도 불구하고 나자렌 운동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혈통에 대한 이야기는 '성배', '성배의 역사' 등과 같은 문학 속에서 계속 살아 있었다. 이 글은 프랑스의 성배 궁정(샹파뉴, 앤죠우와 그 밖의 궁정) 템플 기사단에 의해 지원을 받았다. 이 이야기에서 아서 왕의 로멘스는 성배 이야기에 인기를 더해 주었다.


1307년, 교황 5세의 추종자와 프랑스의 필립 6세가 자신들의 행로를 결정했을 때 템플 기사단은 이교도 심문의 표적이 되었다. 로마 교황의 군대는 템플의 문서와 보물을 찾아 유럽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기사들이 고문을 당하고 처형당했다. 그리고 또 많은 기사들이 교황의 영향력 밖에 있는 나라들로 도망쳤다.


그러나 바티칸 밀사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보물과 서류는 파리의 지하 금고실에 잘 보관돼 있었다. 그것들은 성 안토니의 템플 대기사의 보호 아래 있었다. 성 안토니는 왕족의 비밀을 수호하는 왕자였다.


새벽 무렵 보물을 실은 성 안토니의 함대가 스코틀랜드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은 로버트 왕의 환영을 받았다. 로버트 왕은 당시 영국의 카톨릭 왕 에드워드에게 도전했다는 이유로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스코틀랜드에 들어간 템플 기사단은 1314년, 베녹번에서 스코틀랜의 싸움을 도왔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찾기 위한 베녹번의 전투 후 브루스와 성 안토니 템플은 1317년, 장미 십자군의 새로운 질서를 세웠다.


내가 <성배의 혈통>이라는 책을 펴낸 후에 자주 받는 질문은 '왜 이 모든 정보들이 지금 이 시기에 세상에 알려지고 있느냐'이다.


사실 이 정보는 관계된 사람들에 의해서 감춰졌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자신의 이익을 쫓는 외부의 권력 추구자에 의하여 감춰져 왔다. 이들에게는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보다는 권력을 잡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만연하는 도그마에 환멸을 느끼는 가운데 새로운 '탐구'의 시대를 맞고 있다. 우리는 인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