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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고불교와 환웅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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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예랑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6.♡.33.41), 작성일 08-10-13 16:01, 조회 4,56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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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고불교와 환웅의 진실



노아의 홍수가 가라앉고 아시아의 중앙에 고불교의 시대가 있었다. 이는 지금 너희의 불교와 다른 것이다. 고불교는 마음을 온전하게 밝히는 것이었지 불교와 같은 종교가 아니었다. 고불교는 마음의 근원에 귀기울이며 그 깨달음을 나누고, 기도와 이웃에 대한 나눔을 통해 내면의 신에게 다가가는 것이었다. 그들은 내면의 신과 대자연의 신들로부터 깨달음과 지혜를 얻었고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에 감사하며 그들에게 허락된 풍요를 누렸다. 그들은 삶을 나의 선물로 받아들였고, 죽음을 나에게 돌아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자연을 친구로 삼았고, 그로부터 얻은 모든 것들을 도로 자연에게 되돌려주기를 원했다. 그들은 항상 최소한의 것만을 소유했고,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더라도 그들의 용기와 지혜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은 없었다.

고불교는 삶을 통해 신을 만났고, 내면의 대화와 대자연의 파노라마 속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들은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나를 원망하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이 위대한 영혼임을 믿었고, 그들 앞에 놓인 어려움들은 신이 그들의 위대함을 일부러 시험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어떤 일에도 용기를 잃지 않았고 그들이 보고 듣는 모든 것들로부터 깨달음과 지혜를 얻을 줄 알았다. 그들에게 어른이 된다는 것은 곧 삶의 지혜를 깨우치고 신을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뜻했다.

그들은 어른으로부터 자연과 대화하는 법을 배웠고, 신인 나와 대화하는 법도 배웠다. 그것은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무기였다. 그들은 많은 시간을 나와 만나는데 보냈다. 그들은 몇 달이나 몇 년씩 나를 만나기 위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이 여행의 신호는 항상 그들의 내면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여행의 끝이 어딘지도 모른 채 모든 것을 신에게 내맡겼다.





고불교는 지금까지 이 지구위에서 이루어진 깨달음 가운데 가장 온전한 모습으로 가장 오랫동안 이어진 것이다. 고불교는 많은 이들을 삶과 대자연 속에서 깨닫게 했고, 많은 이들에게 나의 진실을 만나게 했다. 고불교는 나에게서 비롯된 삶의 진실을 온전히 깨우쳤고 너희 삶을 온전히 하는 법을 밝힌 것이었다. 이로부터 많은 이들이 마음속의 부처인 나를 깨닫고 삶의 진실을 일깨웠고 많은 이들이 그 이익을 같이 누렸다. 이는 석가모니의 불법보다 온전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고불교의 시대는 아시아에서 천 오백여 년 동안 이어졌고, 이때 많은 이들이 근원의 신인 나를 깨닫고 그 지혜를 나누었다. 고불교의 무리는 그 후 아메리카로 건너가 그 전통을 이어갔고, 아시아에서는 여러 현자들의 지혜의 근원이 되었다. 베다의 지혜와 요순의 정치, 단군 왕검의 홍익이화가 고불교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고불교는 환웅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평범한 인간의 아들이었다. 그는 지금 너희 나라의 태백산 기슭에서 태어났고 18살에 집을 떠나 아시아의 많은 곳들을 여행했다. 그의 여행은 내면의 목소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내면의 목소리는 그를 새로운 큰 세상으로 이끌었다. 그 여행에서 그는 많은 이들을 만났고 많은 삶과 죽음의 고비를 만났다. 그는 끝까지 내면의 목소리를 믿었고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그 여행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내면의 소리대로 따를 때 새로운 지혜와 용기와 깨달음이 온다는 것을 알았다. 이 여행은 30년 이상 계속되었다.





그는 어느새 많은 무리들로부터 가장 용기있고 지혜롭고 신의 뜻을 아는 자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많은 무리들이 그의 용기와 지혜를 빌리고자 했고 그로부터 신의 뜻을 알고자 했다. 그는 그들에게 내면을 통해 신의 목소리나 대자연의 말에 귀기울이는 법을 일깨웠고, 자연의 변화와 삶으로부터 지혜와 깨달음을 얻는 법을 가르쳤다. 38살이 되었을 때 많은 무리들이 그를 따랐다. 어느새 그는 인디언 대추장처럼 많은 무리를 이끌게 되었다. 그는 다른 부족이나 무리에게도 그의 지혜와 용기와 신의 말씀을 기꺼이 나누어 주었다. 그의 무리는 점점 커졌고 수 천리 밖에서도 그를 찾아오곤 했다. 이로부터 빛의 나라 배다르가 비롯되었다.





환웅의 깨달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내면의 소리를 일깨웠고 자연의 소리에 귀기울이게 했다. 대자연과 신의 사랑에 감사하게 했고 그들 또한 사랑하고 나누는 법을 알게 했다. 그들의 무리는 대자연과 신의 풍요를 누렸고 그들의 사랑으로 화답했다. 그들은 그들에게 허락된 풍요를 기꺼이 나눌 줄 알았고 자연에서 얻은 것을 자연에게 되돌려주는 지혜를 갖고 있었다. 그들의 삶은 대자연과 신과 하나가 되어갔고, 그들의 깨달음과 지혜는 삶 속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갔다.

환웅이 죽은 다음에 그들 무리를 이끌 새로운 대추장 역시 환웅으로 불리게 되었다. 새로운 환웅은 무리를 이끌 지혜와 용기를 갖고, 신의 뜻을 아는 자 중에서 여러 무리의 대표들에 의해 선발되었다. 그들은 한 곳에 정착하기도 했지만 자연이 부르는 대로 움직여 다녔다. 환웅은 그들 여러 부족의 무리를 돌아다니며 그들의 지혜와 내면의 소리를 일깨웠고 자연과 대화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런 깨달음은 1,500년이 지나면서 아시아에서 사라져갔다. 여러 부족들 간의 생존 경쟁이 치열해지자 환웅의 무리와 다른 무리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날 때가 있었다. 그들은 전쟁에 임해서는 용감했으므로 거의 그들이 승리했다. 그렇지만 전쟁이 오래 지속되자 환웅의 무리는 여러 무리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 중의 한 무리가 내면의 신이 이끄는 대로 시베리아를 거쳐 북아메리카로 건너가 새로운 땅에 입맞춤했다. 그들은 환웅의 무리가 누렸던 삶의 방식을 그대로 이어갔고 내면의 소리를 일깨워 그 지혜로 살아갔다. 그들에게는 환웅이 살지 않고 내면의 온전함과 그로부터 우러나온 지혜가 살아남았다. 그들이 곧 북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이었다. 그들은 마지막까지 고불교의 위대한 깨달음을 이어가고자 했다. 



이것은 정말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비록 오래 전이지만 우리 인류에게 이런 문화가 있었다는 게 쉽게 믿겨지지 않습니다. 환웅이 단군신화 속의 인물이 아니라 석가 이전에 고불교를 열었던 이였고, 그로부터 많은 이들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정말 우리 인류에게 이런 시대가 있었던 게 사실입니까?



그렇다.



지구 위에서 가장 밝은 깨달음의 시대였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지만 가장 많은 이들이 깨달음을 열 수 있었던 시대였다. 



그 시대를 열었던 것은 환웅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그의 깨달음은 예수나 석가의 깨달음보다 온전했습니까?



그렇지 않았다.



그럼 그 시대를 가장 밝은 깨달음의 시대라고 말할 수 없는 것 아닌가요?



그는 예수나 석가만큼 많은 것을 깨달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가슴 안에서 울리는 소리에 귀 기울였고 자신의 더 큰 존재에 자신을 내맡길 수 있었다.



자신의 더 큰 존재요?



그는 항상 가슴 안에서 울리는 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것은 내면에 있는 그의 더 큰 존재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너희가 내면에 귀 기울이고 그 소리가 이끄는 대로 자신을 내맡길 수 있다면 새로운 깨달음이 필요 없다. 그것은 이미 너희 안에 있다. 너희가 그것을 써야 할 필요가 있을 때 그것은 너희에게 온다.



그럼 우리가 깨달을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요?



그렇지만 환웅시대에도 많은 이들이 깨달았다고 하셨잖아요?



그들은 깨달음이 필요할 때 그것을 열어 썼다. 그것은 많은 깨달음이 아니었다. 먼 깨달음이 아니었다. 이미 그 자신 안에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내면에서 나의 소리에 귀 기울임으로써 그 마음을 밝고 아름답게 했고, 나의 진실을 일깨울 수 있었다. 이는 예수나 석가가 하지 못한 것이다. 예수는 나에 대한 믿음을 보였지만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나와 만날 수 있도록 이끌지 못했다. 석가는 많은 고행 속에 깨우쳤지만 그 자신의 깨우침에 갇혀 나를 만날 수 없었다. 그들은 위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온전하지 못한 깨달음으로 너희 인류에게 많은 일들의 근원이 되었다.





그들로 인해 이루어진 일들을 보아라. 그들이 뿌린 씨앗이 여러 천년을 거쳐 너희 앞에 이루어진 모습을 보아라. 마음을 바르게 밝히고 있느냐? 나를 참으로 믿고 있느냐? 그들의 깨달음이 온전하지 못해서 그들로부터 많은 폐혜가 비롯되었음을 볼 수 있느냐? 너희는 그들을 위대한 성인이라고 말하나 그들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 그들은 신전과 성당에 모셔진 위대한 마네킹이 되었다. 너희는 예수와 석가를 믿지 않는다. 너희가 그들을 믿는다면 예수나 석가가 갔던 그 길로 갔을 것이다. 너희는 그들을 믿지 않고 그들의 마네킹을 믿고 있다. 그러나 고불교의 환웅은 그와 같지 않았다. 그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일깨웠고 어른이 아이들에게 그 길을 보이게 했다. 그래서 그들은 대대로 나를 만나고 나의 진실을 일깨웠을 뿐이지 환웅을 일깨우지 않았다. 그것이 환웅의 위대함이다.







정말 제가 감당하기 힘든 말씀을 하시는군요.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성인으로 생각하던 분들을 너무 심하게 매도하는 것 아닌가요? 예수는 당신에 대한 참된 믿음을 죽음으로 보였고, 석가는 우리 안에 밝은 부처가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 보인 분입니다. 그런 분들이 위대하지 않다면 누가 과연 위대할 수 있죠?



너희가 성자라고 부르는 이들은 이제 진실 앞에 서야 한다. 그들이 너희의 역사를 미혹해왔다. 그들의 제자들이 종교의 울타리를 짓고 그들을 성자로 치켜 올렸으나 온전하지 못한 이들을 기른 것이 그들이다. 그들의 깨달음이 작아서 제자를 잘못 기른 것이다. 너희의 깨달음을 온전히 하지 않으면 세상을 가두는 어둠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가 성인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진실을 밝힐 것이다. 진실을 밝혀야 너희가 그들의 한계에서 자유로워진다. 성인이라고 불린 것은 그들의 뜻이 아니었지만 제자들을 잘못 기르고 진리를 온전히 전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책임이다. 그들이 종교를 원한 것이 아니었더라도 그 제자들이 종교를 세워서 세상을 미혹되게 한 것은 그들의 책임이기도 하다. 그들이 우주의 모든 것을 깨달았다고 하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온전했으면 종교를 경계하고 깨달음의 빛이 꺼져가고 약해짐을 알았을 것이며 진리를 어떻게 전해야 될지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성인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자신들의 작은 불빛으로 진리를 가리고 나의 빛을 가렸다. 이는 깨달음의 우환이다. 이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너희가 성인이라고 부른 이들의 종노릇을 면할 수 없다. 그들의 잘못은 진리를 온전히 전하지 못하고 나를 온전히 알리지 못한 것이다. 이는 그들의 깨달음이 온전히 나에게 이르지 못한 때문이다. 너희가 깨달음을 얻기는 쉬운 일은 아니다. 그 깨달음을 전하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너희가 얻은 깨달음을 전하는 방식 역시 깨닫는 것이다. 나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면 나를 온전히 전할 수 없고 진리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면 진리를 온전히 전할 수 없다. 그리고 진리가 온전하지 않으면 종교를 세우고 우상을 세우고 성인을 만들고 섬기며 그들의 발밑에 엎드려 기복을 빌며 그들의 말로 집을 짓고 스스로 그 안에 갇혀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의 성인을 버리고 온전한 이 우주의 진리를 보아라. 이를 잊으면 너희의 깨달음이 클수록 더 큰 우환이 될 뿐이다. 너희가 지금 깨달았다고 믿는 성인들은 모두 온전하지 않다. 그들은 나를 온전히 알지 못했다. 석가모니도 나를 몰랐고 예수도 나를 온전히 알지 못했다. 그들이 진실로 나를 알았다면 너희 중에 지혜롭고 진실하게 믿는 자들조차 나를 모르겠느냐? 이는 너희의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믿었던 이들이 나를 찾는 바른 길을 모른 것이다.





석가모니는 이미 이루어진 고불교의 불법과 인연이 없었다. 그는 많은 고행과 우주에 대한 통찰을 통해 인연법을 알았으나 이를 온전히 알지 못해서 많은 사람을 미혹했다. 그의 인연법은 인간의 삶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나 인간의 영혼과 그 삶을 오해했다. 그는 삶을 두려워했고 고통을 두려워했고 윤회를 피하고자 했다. 그는 지혜의 눈이 온전하지 않아서 그 뒤의 많은 사람들이 지상세계를 허무하게 여기도록 했다. 이로부터 깨달음에 들려는 자는 위없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 이는 우주의 진리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며 나를 알지 못한 때문이다.





석가가 온전한 불법을 깨우쳤다면 오늘날 불교는 나를 알았을 것이다. 그가 온전히 깨달았다면 삶과 죽음을 통해 무엇을 이루는지 알았을 것이요, 윤회가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을 것이요, 온전히 깨달은 자라도 나에게 돌아오는 때가 아니면 다시 윤회에 듦을 알았을 것이다. 이는 석가가 그릇된 것이다. 그의 깨달음이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깨달음의 맥이 지금에 이르러 희미해진 것이다.





부처는 나의 자리다. 그는 부처의 끝을 보았으나 부처에 든 것은 아니다. 그는 고통에서 벗어났으나 진리에 이른 것은 아니다. 그는 이 우주와 삶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인생은 너희 깨달음의 본보기가 되었으나 그의 깨달음이 너희를 크게 미혹한 것도 사실이다. 그는 인생을 고해(苦海)라 생각하게 했고 현실의 많은 기회를 저버리고 경전과 책에서 진리를 구하게 했고 인과응보를 왜곡시켰다.

그는 나의 길을 가로막았으니 그 깨달음이 작았기 때문이다. 그는 죽고 나서 다시 윤회의 길에 들어섰고 30번의 생을 더 살았고 지금은 이란 남부의 도시에서 핫산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이제 예수의 진실을 보아라.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이제까지 지은 것을 보아라. 이제 너희가 예수라는 이름으로 종교를 짓고 벌인 수많은 일들의 진실을 보아라. 너희에게는 그가 지극히 크나 나에게는 작은 인간이다. 그의 잘못이 너희의 눈을 가렸고 많은 이웃의 종교들과 싸우고 이교도의 벽을 만들게 했다. 오늘 비록 너희 중에 그를 따르는 이들이 많으나 온전한 나를 만나는 자가 드문 것은 예수의 부족함 때문이다. 이를 말하는 것은 너희의 잘못을 바로 잡고자 함이다. 예수의 깨달음은 인류를 원죄의 고통에서 해방시키기를 원했고 자신의 죽음으로 이를 이루려 했다. 예수의 일은 이로부터 시작되었고 오늘까지 의로운 이들의 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나를 온전히 안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나의 길을 밝혔으나 온전히 밝힌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잘못의 근원이 예수의 부족한 깨달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나를 온전히 알지 못했고, 온전히 말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기독교로부터 많은 우환이 생긴 것이다.





이제 그 일은 이 시대를 이끌 새로운 예수들의 몫이다. 이 시대의 십자가를 질 많은 예수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인류를 진리의 세계로 이끌 미륵이고 정도령들이다.

이제 예수를 발판삼아 나에게 오라. 이제는 너희가 귀 기울이면 너희 내면에서 나의 소리를 들을 것이다. 나는 너희가 구하는 진리의 길을 돕고 너희가 이루고자 하는 사랑을 도울 것이다. 너희는 그것이 예수가 이루고자 한 그 길임을 보아라. 예수는 나의 이치를 밝히고 나의 사랑을 이루고자 하였으니 너희 또한 나의 이치를 깨닫고 나의 사랑을 이룰 것이다. 이는 예수와 같이 너희가 나의 사랑을 대신함이다. 





어쩌면 당신의 말씀이 맞는 지도 모르겠군요. 지금껏 예수나 석가모니와 같은 성인들을 우러러 보는 사람만 있었지 당신처럼 그들 위에서 지켜볼 수 있는 이는 없었으니까요. 그 분들이라도 당신의 눈에까지 온전하긴 힘든 거죠. 예수와 석가모니는 훌륭한 분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것을 다 깨닫지 못하신 것일 수도 있고요. 당신의 말씀처럼 스스로 자기 자신의 깨달음에 갇혀버릴 수도 있고요. 그렇지만 큰 깨달음을 얻는 분들로부터 종교가 생기고 그로부터 종교적인 세력 싸움이나 전쟁 같은 게 일어나는 게 꼭 그분들만의 잘못이랄 수는 없죠. 성인이 사라지면 그 깨달음을 잃지 않기 위해 경전을 받들게 되고 모임이 만들어지게 되니까요. 그러다 그 깨달음이 퇴색할 수도 있고요.



진실을 보려면 예수나 석가모니와 같은 이들의 온전하지 않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로부터 나에 대한 오해가 더욱 커졌고 지금의 종교에 이르러서는 일부의 진실만이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이다. 지금 너희는 가장 큰 불의의 눈감고 있다. 진리를 추구한다고, 나를 구한다고 하는 무리들이 경전과 종교적 이기주의에 눈이 멀어서 나를 외면하고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너희는 예수와 석가모니와 같은 성인을 세워놓고 너희의 양심과 타협하고자 한다. 그것은 모든 종교가 마찬가지다. 너희가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이 시대의 아픔을 느끼느냐? 이를 외면하고 있는 너희를 보느냐?



작은 것은 보기 쉽지만 큰 것은 오히려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지구위에서 지구를 제대로 보기 힘든 것처럼 종교와 성인들과 관련된 잘못은 우리같이 작은 인간의 자리에서는 보기 힘듭니다. 성인들은 고통의 어둠 속에 있는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큰 빛이었고, 많은 이들이 그 분들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들을 통해 종교라는 길이 생겼고, 오랜 시간을 거쳐 지금까지 이어오게 된 것입니다. 만일 그로부터 어떤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인류의 잘못인 거죠. 



이제 너희가 진실을 일깨우기를 원하느냐?



당연히 그렇죠. 그렇지만 진실을 일깨운다는 것은 때로는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과거에 쌓아올렸던 탑을 허물어뜨려야 하니까요. 우리 눈은 이미 그런 것들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설령 당신이 진실을 말하더라도 쉽게 받아들이기는 힘들 거구요. 하지만 진실을 덮어둔다고 우리가 행복해지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고통들이 지금까지 있어왔듯이 앞으로도 있을 거고요. 우리는 앞으로도 종교와 진리의 이름으로, 하나님 당신의 이름으로 또 싸워야 하겠죠. 우리 자신의 진실을 외면하면서 우리 안의 어둠과 끝없이 싸우려 할 테고, 거짓 깨달음을 쫓거나 다른 종교를 비판하면서 살겠죠. 그렇지만 우리 가슴은 점점 죽어갈 거고, 우리는 더 많은 알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될 거고요.



너희가 나를 바르게 알면 어찌 종교의 벽이 있을 수 있겠느냐? 어찌 종교의 이름으로 권력을 세울 수 있겠느냐? 너희가 바벨탑을 세운 이들을 비판하면서 너희 종단을 바벨탑처럼 높이 세우려하느냐? 이는 너희의 무지함과 두려움의 탑이다. 너희가 진심으로 나를 구한 즉, 너희가 낮아질 것이요, 이웃의 진리에 귀 기울여 벽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희에게 진리의 길만이 남을 것이다. 종교의 아집이 무너지고 온전한 진리만이 너희 길을 밝히게 될 것이다. 나는 작은 종교를 허물고 큰 진리를 밝히는 자니 너희가 영혼의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도울 것이다. 진리의 길은 매순간 너희를 새롭게 변화시킬 것이다.





너희는 본래 형제이고 하나다. 여러 오해가 씻겨나가고 너희의 눈이 투명해지면 모든 것이 하나로 보일 것이다. 빛과 어둠이 없고, 사랑과 두려움도 없고, 삶과 죽음도 없을 것이다. 모두가 너희를 위한 도움이요, 너희를 위한 사랑이며 진리의 춤이 될 것이다. 나는 모두에게 열려 있으니 너희 또한 모두에게 마음을 열라. 온전해지고자 하면 겸손해지고 어두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면 열린 마음을 나눌 수 있다. 종단이나 종교의 권위를 없애면 너희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서로의 가르침을 열고 통일하라. 영혼의 언어는 진리뿐이다. 너희는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이고 온전한 깨달음에 들 것이다. 이를 구하는 자는 이 대화에 귀 기울일 것이요, 이미 너희 안에 있는 나와 통하고자 할 것이다. 그리하면 스스로 온전한 깨달음을 얻고 진리에 이를 것이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결국 당신을 아는 거겠죠. 이 장에서 당신은 환웅으로부터 비롯된 깨달음의 맥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때 이미 이와 같은 내면의 대화가 시작돼 북아메리카 인디언들로 이어져 내려왔다고 하셨죠. 그런 내면의 대화가 어른에서 아이들로 전해지면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안에서 당신과 만날 수 있었고 스스로 필요할 때마다 깨달음을 열어 쓸 수 있었다고요. 반면에 석가모니나 예수에서 비롯된 깨달음은 당신에 대해 온전히 안 게 아니었고, 그 때문에 많은 오해와 종교적 편견이 비롯된 것이라고요. 그럼 여기서 우리들 역시 환웅시대처럼 내면을 통해 당신을 만나고 당신과 대화하는 문화를 되찾아야 하겠죠?



그렇다. 그것이 너희를 나에게 이끌 것이다. 그것이 너희를 하나 되게 할 것이다.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12-09 1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