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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대의 느낌을 끌어 안아라 --프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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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아름다운 마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8.♡.224.197), 작성일 08-12-29 11:06, 조회 4,24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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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저녁입니다. 오늘 저녁은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할까 합니다. 겉사람과 속사람의 관계, 무슨 이유에서든 당신들이 자신의 삶 속으로 끌어들인 사람들과의 관계.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현실을 창조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당신 자신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연한 사건이나 우연의 일치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개인적인 현실이든, 집단적인 현실이든 모두 믿음의 체계에 근거한다는 것도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자아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자신에 대해 믿고 있는 바를 정확히 자기 자신에게로 끌어들입니다.









잠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해봅시다.



당신들 모두가 그토록 사무치게 바라는데도 사랑은 왜 그렇게 달아나기를 잘하는 걸까요?



 당신들 자신이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다고 믿게 되면, 당신들은 자신들의 삶에 그것을 창조하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당신 자신, 본래의 자신과 진실로 사랑에 빠지게 되면, 자신이 신성한 표현이란 걸 전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면, 모든 관계는 정말로 사랑의 관계가 될 겁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당신 자신의 본래의 자아에 덧칠한 자아를 그대로 되비추기 때문입니다. 외부의 모든 것은 당신의 관점을 고스란히 되비출 뿐입니다.









사랑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우 제한된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는 처음에는 굉장한 사랑과 애정을 품고 있습니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천진난만한 모습이 놀랍도록 애정과 자비를 불러일으키지요.



 아이가 자라 자신의 뜻을 지닌 어른이 되면, 사회적 요구가 그 아이를 짓누르게 됩니다. 부모는 아이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되어주기를 바라죠. 아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는 상관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이런 것들이 아이에게는 사랑의 결핍으로 느껴집니다.



 부모가 얼마나 훌륭한 분인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이가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라고 느끼게 되고, 부모와 진정한 대화가 없이 자람에 따라, 오해가 싹트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자라기 때문에 나중에도 자신의 사랑을 마음껏 펴지 못하고 스스로 제한을 두게 됩니다.



 이성간의 사랑이든, 남자와 여자, 여자와 여자의 사랑이든 다 마찬가지 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십시오. 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당신의 믿음과 그 생각은 우주를 통해 멀리 퍼져 나갑니다.



생각은 당신의 가장 강력한 도구 이상이고, 그 자체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가 내보낸 것을 자기에게로 다시 끌어들이는 이 에너지를 우리는 전자기적인 에너지라고 부릅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만약 당신이 사랑을 고통이라고 믿으면, 사랑의 관계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것이라고 믿으면, 자신이 사랑 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진심으로 믿으면, 그때는 반드시 이런 것을 당신에게로 끌어들입니다.



 누군가가, 어떤 상황인가가 나타나서 당신이 믿는 바를 반영해주는 것입니다. 매우 간단합니다.









또 하나 생각해 볼 거리가 있습니다.



조건 없이 샘솟는 순수한 사랑은 당신 자신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건 일종의 가르침이지요. 일종의 반영입니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의 당신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는, 자기 자신의 모든 면을 다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는,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알고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은 모든 현실의 지평에 반영되고, 전 우주로 널리 퍼져나갑니다.



본래의 자기와 더불어 경이로운 사랑 안에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런 방식으로 겉사람과 속사람 사이의, 당신이 지금껏 자신이라고 생각해 온 가짜의 자기와 진정한 자아 사이의 분리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도록 허용하는 가운데, 자아 안에 깃들어 있는 남성 에너지와 여성 에너지가 균형을 이루는 겁니다.



 그러한 균형은 당신의 우주 전체로 반영되지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여, 당신이 무슨 책을 읽던, 무엇을 추구하든, 누구의 말을 듣든, 어떤 대단한 선생이나 구루를 추종하든, 항상, 항상, 항상, 그것은 당신 자신에게로 되돌아옵니다.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항상 저쪽 세계에 대한 대단한 호기심을 보입니다.



그렇죠? 관심의 대상은 다른 세계의 존재일 수도 있고, 다른 별에 사는 존재일 수도 있고, 지구 내부의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항상 말씀 드렸듯이, 당신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 알게 될 때까지는 지금 이 시점의 인간 의식을 초월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진정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벗들이여,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들 어깨 위에 놓인 책임이 무겁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각자가 위대한 이해의 경지에 도달하는 넓이와 깊이만큼, 전 인류의 앎에 이바지할 수 있는 넓이와 깊이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지식은 이른바 집단 공명이라 불리우는 것 안에 존재하며, 집단의식의 산물입니다.



 이러한 공통된 울림은 일정한 에너지 수준에 이르면, 다시 말해 앎의 진동수가 일정한 수준이 되면, 엄청난 도약이 일어나게 되고, 그래서 인류의 의식 전체가 그러한 앎을 향해 뛰어오르게 됩니다.



깨달은 사람의 숫자가 일정한 수준에 이르게 되면 그러한 현상이 일어날 거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건 단순한 숫자를 넘어서서 더 많은 진동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약은 지적 이해에 의해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우리는 지성을 비난하는 게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지적 이해는 여러분 각자의 가슴속에서 영적인 이해가 앞서지 않는 한 결코 생길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지금껏 여러분이 알아온 모든 것은 모두 균형이 잡혀 있지 않은 것들입니다.



 지금 당신네 문화 속에서 당신들이 알고 있는 것은, 감정과 느낌이 될수록 배제된 지성입니다.



 하지만 당신이란 존재는 느낌에 의해 힘을 얻는 진동 주파수라는 걸 아십시오. 당신이라는 존재는 느낌에 의해 힘을 얻는, 신의 생각 자체입니다.









오늘날 당신네의 문화에선 느낌, 감정, 상상력 같은 것을 경멸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당신의 상상력은 당신이 지니고 있는 가장 위대한 도구입니다. 가장 위대한 창조의 힘입니다. 당신이란 존재가 본래 창조적이지요.



 당신의 물리적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원자, 모든 분자가 창조적이고 무한한 힘을 지녔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여기 존재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상상력은 당신을 시간과 공간 너머로 데려갈 수도 있습니다. 느낌 또한 당신을 시간과 공간 너머로 데려갑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여성적 에너지를 느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더 깊이 있게 이해하게 해줍니다. 받아들이고, 느끼고 직관적이게 합니다.









직관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난 이러저러한 일을 하고 싶어. 그냥 느낌이 그래.” 여자들이 그렇게 말하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비웃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논리적이지 않으며, 지성적이지도 못하고, 말도 안 된다는 것이죠. 그것이 여자들의 특징이기도 하구요. 그렇죠?



인류는 직감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점차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직감을 따르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직감은 아주 순식간에만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지요.



 일상사를 쫓느라 바쁘기만 한데, 여러 가지 결정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은데, 어느 짧은 순간에 어떤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안 돼’ 라는 말일 수도 있고, ‘맞아, 이걸 해’라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너무 바쁘고 조화된 상태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 목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소위 직감이라는 것은 여성 에너지입니다. 당신들 모두는 내면의 속삭임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직감과 만나기 위해서는, 전에도 말하였지만 자신의 몸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몸에 어떠한 불편이 오는 것은 당신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인류는 느낌을 두려워합니다.



인류는 고통이라 불리는 것에, 절망이라 불리는 것에 꽁꽁 묶여 있습니다.



 탄생의 순간부터, 최초로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고뇌를 경험한 순간부터, 당신들은 각자 자기 주변에 불가항력이라는 장벽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당신들 모두는 또 다시 상처 받을까 봐 두려운 겁니다.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실망과 슬픔과 고통을 당신들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거기에 단련된 당신들은 그 때문에 고통과 느낌을 혼동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들이여, 고통은 느낌이 아닙니다. 고통이라는 것은 느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저항입니다. 이걸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고통은 느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저항입니다.





삶에 즐거운 상황이 일어나면 ‘뱃속에 있는 느낌의 중심부’가 열립니다. 크게 웃을 때는 복부가 흔들리지 않습니까? 상황이 아주 즐겁다고 느끼거나 크게 웃을 때면, 몸 안의 에너지 센터가 열립니다.



 그리하여 복부에서 시작된 기쁨은 아무런 저항 없이 당신의 열린 에너지 센터를 통해 전신을 여행하고, 당신의 가슴은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즐거운 사람은 몸에 병이 없습니다.









당신이 고통스럽다고 여기는 상황이 나타나 두려움과 전율을 느끼게 되면 그때 복부의 에너지 센터가 닫힙니다.



 여러분 각자가 모두 알고 있듯이, 그런 상황이 일어나서 충격과 고통 속에 있게 되면 그건 바로 복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따금씩은 마치 걷어차인 듯 배가 아픈 느낌을 경험하게 되나요? 판단이란 복부에 꽂힌 날카로운 쇠 발톱과 같아서 에너지는 더 이상 갈 곳을 잃고 맙니다. 그것이 소위 고통이 되는 겁니다.









무엇이 고통을 창조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판단입니다. 고통을 일으키는 다른 원인은 없습니다.



 고통이라는 저항을 창조하는 것은 바로 판단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고통은 누적됩니다.



 수억 겁을 통해, 수많은 생애를 통해, 당신은 그것을 습득해 왔습니다.



 당신들 모두 그것에 매우 익숙해 있습니다. 당신들의 삶을 거슬려 올라가보십시오. 어린 시절의 언제인가 당신은 자신을 무가치하고 여기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대단한’ 어떤 일일 필요도 없습니다.









무슨 일에선가 당신은 ‘돼 먹지 못한 것’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가슴속에선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만 그 소리는 너무 작습니다. ‘너는 아름답지 않다’, ‘너는 어리석다.’는 소리가 가슴속의 속삭임보다 압도적으로 큽니다



. 그렇게 되면 자신을 충분치 않은 존재로 판단하게 되고, 자신을 충분치 않다고 판단하게 되면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장함에 따라 그것을 다룰 수 있게 되지만, 다룰 줄 안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당신 주변에 불가항력적인 벽을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상처를 받게 되고, 그렇게 되면 더 높고 더 두꺼운 벽을 쌓게 됩니다.



당신이 성인이 될 무렵에는 그 벽이 매우 높고 두터워서 자신의 감정을 나타내 보이지 않게 됩니다.



 마음을 보여주었다가는 상처 받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고통 받을 때마다 그것을 극복하지만, 고통은 다시 반복하여 나타나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 더, 더 당신은 자기 자신을 판단하게 되고, 다른 인간에 대해서도 더, 더, 더 판단하게 됩니다.



‘나는 정부의 희생양’, ‘타인들에게 이용만 당한다’ 등의 관념에 갇히게 되고 그것은 두려움이 커질수록 더 심해집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정확히 되 비추어 줄 상황과 사람들을 더, 더, 더 자기 자신에게로 끌어당기게 되는 겁니다.



 자 이제 그것이 어째서 돌고 도는 원이 되는지 이해하시겠습니까?



당신들 모두가 상처 받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나는 두렵다’, ‘나는 상처 받고 있다’고 말하길 두려워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당신들은 입 밖에 낼 수 없는 가슴속의 상처로 인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절망을 바라보길 두려워하고, 자기 자신을 인정하길 두려워합니다.









당신들은 자신이 충분치 못함을 두려워하고 있지만, 감히 그렇게 말하지도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정답을 알고 있는데 자기만 모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들의 마음 은밀한 한쪽에서는 자기만 못났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자기만의 은밀한 생각들과, 자기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행동들, 자신의 삶 구석구석을 돌아보고는 자신을 가치 없는 존재로 규정해 버리고, 자신은 결코 이곳저곳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살아가는 형태가 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당신들은 모두 완전함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의 발단은 자기 자신이 본래 신성의 표현임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옵니다.



 당신의 본래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경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신들은 만유의 생각 자체, 근원의 생각 자체라고 말해주면, 당신들은 즉시 ‘만유’라는 것을 인격화 시켜 생각해 버립니다.



 우리가 신/여신이라고 말하면 당신들은 즉시 인격화된 신이 존재한다고 상상해버립니다. 그것은 제 1원인의 본질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오는 겁니다.









제 1원인은 진실로 인격화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만유라고 하는 것이 결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님을 진실로 상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 그때에야 비로소 당신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 속에서 만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성의 은줄은 모든 원자와 분자 속에, 모든 우주 속에 깃들여 있습니다. 그 힘이 만물 가운데 깃들여 있으니 만물을 바라보면 진정으로 알게 될 겁니다. 모든 풀잎, 모든 새와 꽃, 나무와 생물, 모든 바위, 심지어 인간이 만든 것이라 여겨졌던 것까지, 그 모든 것이 진실로는 ‘만유’ 자체임을.









당신 바깥의 이러한 반영물을 이해하게 되면, 그땐 그것, 아니 진실로는 이것 역시 바로 당신 자신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때로는 당신 바깥에 보이는 그림에 사로잡히기가 훨씬 쉽지요. 당신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에 대한 그림에 사로잡히기보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실로 바라는 것은, 당신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여자) 감사합니다. 프타아, 그러니까 당신이 지금까지 하신 말씀은 완전한 모델이라는 것은 없다고 해석될 수도 있겠네요.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완전한 모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요.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자, 우리는 당신들의 시대 이전에 있었던 당신들의 문화 사회에서의 역할 모델에 대해서 이미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그것들이 바로 당신들을 가치 없는 존재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 현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상 구조물이 당신들에게 전해졌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법칙의 차원에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문화권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권에서도 모든 경이로움을 한 몸에 구현한 존재, 완벽한 존재가 있어 왔습니다. 그래서 당신들 모두는 진정으로, 감성적으로 이러한 역할 모델을 열망합니다.









구세주라는 예수의 예를 들어야겠군요. 우리는 이러한 일이 당신네 문화에서는 아주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지성적으로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당신들은 이러한 모델을 감성적으로 열망하고 있습니다. 당신네 문화의 집단적 공명, 집단의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이 그 점을 이해하든 않든, 당신은 그 속으로 발을 내디딘 것입니다.









당신들 모두가 되고 싶어 하는, 그토록 갈망하는 완벽한 존재라는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분열을 만들어 냅니다.



당신이 완벽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소위 완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당신은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결코 끝날 수 없으며, 지금 이러한 현실 차원에서도 이 점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것이 일단 끝나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모든 것은 창조의 동기를 지니고 있고, 성장과 확장의 상태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그러합니다.



 당신 몸 안의 모든 세포도 창조성으로 꽃 피어나고 있으며, 가만히 멈춰있지 않습니다. 가만히 멈춰있는 분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극미의 세계를 보든, 우주를 보든 가만히 멈춰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완성품이 있으리라고 믿고, 그것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넌센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신이 깨달은 스승이 되면 어떨까요? 그러면 모든 것이 다 끝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말씀드리죠.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의 차원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제 1원인의 에너지는 가만히 멈춰있는 법이 없습니다. 계속적으로 확장하고 있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여기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고,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그러니 바로 보고,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역할 모델로서 당신들에게 진열되어온 것들은, 실은 노예화를 위한 놀랍도록 효과적인 도구였던 셈입니다.



당신들의 현실에서 당신들이 소위 종교라고 부르는 것은, 당신들을 얽어 매기 위한 도구였고, 지금도 그 점은 마찬가지 입니다. 당신들로 하여금 주권과 자유의 권리를 알지 못하도록 조정하기 위한 도구 말입니다.









(남자) 예수가 자신의 가르침이 어떤 식으로 변형되었는가를 알게 된다면 실망이 크겠네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이 예수라 부르는 존재는 사실 생각의 구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은, 그 사람 자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그 사람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생각의 구조물이 되었지만, 생각의 구조물 역시 현실성과 타당성을 갖습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이 현실에 참여하고 안 하고는 당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여기 아닌 저 멀리에 심판관이 있는 건 아닙니다.









우주에는 심판관이 없습니다. 저 구름 속에 예수가 있는 게 아닙니다. 구름 속에서 당신을 계속 주시하는 신이 있는 게 아닙니다.



매일매일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을 당신에게로 끌어들이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일단 배우고 나면 또 다시 이 가르침들을 경험할 필요는 없습니다.



 판단이란 것이 더 조화로운 길을 가는 데에 방해가 되는 것 같군요. 어떻게 하면 판단을 떠날 수 있습니까? 늘 판단하게 되는 데요.









벗이여, 판단을 사리분별과 혼동하지 맙시다. 그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판단은 다음과 같이 말하죠.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이건 좋고 저건 나쁘다’. 사실은 옳고 그른 것도 없고 좋고 나쁜 것도 없습니다.



 존재할 뿐이죠.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근래에는 의식 확장을 열망하는 뉴 에이지 사상가들과 추종자들이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뉴 에이지 운동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낡고 위선적인 종교로부터 성스럽게 보이는 요소들만 취한 다음, 그것을 뉴 에이지 사상이라고 떠들어 댑니다.



 성스러운 척 하는 것으로는 의식 확장을 꾀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이건 그르고, 이게 옳아. 이 길을 따르면 당신은 뉴 에이지가 아냐’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이게 기본적인 판단들이지요.



 오랜 세월 동안 당신네 문화에 자리 잡아 온 것들을 극복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생애에서 생애로 건너뛰며 당신들은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른 것에 익숙해져 왔습니다. 하지만 판단이 아닌 분별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것도 하나의 방식이고, 저것도 또 다른 방식이다. 그런데 나는 이 길을 택하겠다.’









나의 여인(자니 킹)은 종종 ‘나쁜 자식!’이라는 욕을 할 때가 있는데, 그러면 사람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 이런 경이로운 일에 관련된 사람이 어떻게 그 같은 말을 할 수 있느냐는 거죠. 하지만 그녀가 하는 욕설이 이것만인 줄 아십니까? 훨씬 더 원색적인 경우도 없지 않아요. 하지만 그런 말 따위엔 신경 쓰지 마세요. 그건 소위 취향에 불과하니까요.



 뉴 에이지입네 자처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정작 가슴속에서는 분노가 들끓는 판단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그것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깨어 있어야 하고, 깨어 있으면 있을수록 판단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벗들이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심각한 증상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그들은 판단이 쓸데없는 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탈입니다. 판단이란 ‘나쁜’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판단해선 안 돼. 판단은 나쁜 것이니까. 판단을 하면 그건 깨달음이 아니야.” 하고 말합니다. 어리석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이여, 판단을 나쁜 거로 만들면, 또 다시 원래의 굴레 속으로 곧장 되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니 어리석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판단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판단 또한 유효합니다.



판단은 당신 자신의 신성한 한 국면이고, 판단을 하지 않는 변화를 창출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껴안는 것입니다.



 당신이 판단에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죠. 당신이 그 같은 변화를 바라고, 판단에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을 당신의 일부로서 받아들이게 되면 당신은 변화를 창조하게 됩니다.









하지만 가치 없다고 믿게 되면 판단은 더욱 기승을 부립니다. 진실로 기억해야 합니다.



 당신이 가치 없다고 여기는 것에 당신은 오히려 힘을 부여한다는 사실을. 당신은 당신이 가치 없다고 여기는 그것을 정확히 끌어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대단한 패러독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너무 심각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벗들이여, 내가 비밀을 말해 줄 거니까요.



모든 것을 가장 훌륭하게 화합 시키는 것은 바로 웃음입니다. 뱃속으로부터 나오는 진정한 웃음 말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고 많은 일이 벌어지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심각한 일 가운데서도 웃음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당신이 웃으면서 그 안에 있는 기쁨을 발견하면 할수록, 심지어 패러독스에서조차 기쁨을 찾아 낼 수 있다면, 당신은 과거도 미래도 없이 바로 그 순간을 사는 것이고 이런 식으로 기쁨을 창조하게 되는 겁니다.









웃음과 그 웃음이 만들어 내는 화합에 관한 건데요. 당신의 의식 차원에선 진심으로 어린 애처럼 어리석을 수가 있나요?









실제가 그렇습니다. 어린애 같다는 건, 함축적인 의미에서 보면 어린애 같지 않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경이로운 의미에서의 어린애 같다는 뜻을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그같이 경이로운 의미에서는 모든 것이 새롭답니다. 그런 경이로움 속에서는 뭔가 알아차림이 있고, 놀라운 외경심이 있고, 경건한 마음으로 우주를 바라보게 됩니다. 만물의 신성함을 깨닫게 되는 거죠.









즐거운 냉소주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음, 사실 벗이여, 그것도 괜찮습니다. 냉소적인 것, 인류의 결점에 대해 아는 것, 하지만 다른 사람의 결점에 대해 비웃는 것은 사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비웃는 것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거기에 잘못된 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 차원을 보고 웃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내가 이 차원을 보고는 웃지 않는 줄 아십니까? 우리를 매우 심각한 존재들로, 웃거나 농담을 즐길 줄도 모르는 존재들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여러분을 미워할 거예요. 하지만 그런 것들도 다 기쁨의 일부분들입니다. 당신에게는 웃음이 절망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마지못해 웃는 상황이라는 것도 있을 수 있지요. 웃지 않으면 그땐 울어버릴 테니까요. 웃음이란 눈물의 방향을 돌려놓는 놀라운 전향 장치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세요? 어떤 감정이든, 온 몸으로 그런 감정을 체험할 때는 당신이 그 순간을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걸. 모든 것은 유효합니다. 하지만 제일 좋은 것은 역시 기쁨의 감정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당신은 우리가 내면에 쌓아둔 고통스런 감정의 기억들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런 감정을 해방 시키는 것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인지 알고 싶습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인류는 느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느낌의 에너지가 체내에 축적되면 표출되기도 하고, 억압되기도 합니다. 느낌의 발산이 억제되면 몸은 불편을 호소합니다.



최근 들어 등장한 새로운 치료법들은 사람들이 표현하도록 장려하고, 과거의 삶 속으로 돌아가 몹시 고통스러웠던 것을 재 경험하면서, 거기에 대한 표현을 맘껏 하도록 합니다. 매우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끓는 주전자에서 김이 나가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해답은 표현과 억압이라는 양극의 중간에 놓여있습니다. 인정과 포용으로 중용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인정하고 포용하는 가운데 고통이 기쁨으로 바뀌는 변화가 오게 되는 겁니다.









꿈에 대하여 묻고 싶습니다. 에너지가 차크라를 통해 자유롭게 흐르게 하려면, 웃음과 더불어 상상력과 느낌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상상력 말인데요. 꿈을 꿀 때, 저는 때로 잡다한 일상사를 다시 경험하곤 합니다. 제가 했던 일들, 하려고 생각했던 일들, 아직 하지 못한 일들, 이 모든 것들을 꿈에서 경험합니다. 우리가 잠들었을 때 나타나는 이 모든 것이 다 상상력인가요?









그건 그 모든 것 이상입니다. 당신의 꿈꾸는 상태는 다차원의 현실입니다. 그날 있었던 일들을 질서 정연하게 재배치하는 것 이상입니다. 상상력을 경험하는 것 이상입니다. 꿈은 매우 많은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꿈을 꿀 때는 여행을 하기 때문입니다. 잠의 상태에 있을 때는 하나의 현실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여러 차원의 현실에 있게 됩니다.



 영혼에너지라고 불러도 좋을 전체로서의 자기 자신이 영혼에너지의 다른 부분들과 자주 결합하게 됩니다. 이 행성 내에서 같은 시간과 공간의 틀 안에 거주하는 영혼 에너지의 다른 부분들과 만나는 거지요.









초의식 세계에서는 다른 영역을 여행하기도 합니다. 다른 영역이란 다른 행성이 될 수도 있고, 다른 차원의 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있는 다른 차원의 현실 말입니다.



그것 역시 엄연한 현실이고 유효한 것임을 아십니까? 당신이 이처럼 꿈의 상태에 있을 때는 무언가 다른 교훈을 배우는 것이고, 그런 경험들은 지금의 이 현실 가운데에 있는 당신의 삶에 유익한 것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당신의 현재 의식적 이해를 넘어선 진정한 가르침이요, 배움이요, 이해인 것입니다.









따라서 의식적 마음이 당신으로 하여금 의식적 이해 안에 있을 수 있도록 그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이 차원에 있으면서 의식은 당신이 원한다면 이런 그림들을 포착하기도 합니다.



그건 유익한 일입니다. 이미 말씀 드렸듯이, 잠자리 옆에 노트를 두었다가 깨어나자마자 꿈을 기록하는 겁니다. 아주 상세할 필요는 없습니다. 떠오르는 한 두 마디도 좋습니다. 계속 그렇게 해나가는 거죠. 이런 식으로 매일 해나가다 보면 하나의 패턴이 보일 것이고, 그러면 무의식 상태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바를 의식적 수준에서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꿈은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의식을 넘어선 꿈속에서 체험하는 것들도 가짜가 아닙니다.



 현실의 다른 영역에서 현재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벗이여, 다른 차원의 현실에서는 꿈속의 상태가 꿈이 아닌 현실인 것입니다.



 그건 당신을 위한 멋진 놀이터이지요. 이런 꿈이나 상상이 당신이 보기에는 무척 떨어진 것으로 보이겠지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현실만큼이나 실제적이며 타당한 것이며, 의식으로 알 수도 있는 것입니다. 됐습니까? 벗이여?









저는 제가 신성한 존재임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열쇠가 있지 않을까요?









매순간이 열쇠입니다. 벗이여, 그건 정말이지 너무도 간단합니다.



너무 간단한데도 인류에게는 그토록 어렵게 느껴질 뿐입니다. 무엇이 열쇠일까요?



진리에 이르는 열쇠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겁니다.



당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보세요. 당신의 신념체계가 바로 열쇱니다.



 당신이 믿는 것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들을 믿어왔는지 깨닫게 될 때, 심지어는 자신이 그런 것들을 믿어 왔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때, 그래서 당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가리고 있는 켜켜이 쌓인 껍질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될 때, 자신의 모든 면을 진실로 껴안게 될 때, 그 때에 비로소 당신은 자신의 신성을 인지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당신 자신이 바로 신임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처럼 간단합니다.



 간단한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당신들에게는 그렇지 않음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당신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에서부터 한 계단씩 올라가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면에서 증폭작용이 일어나게 되고, 마침내는 앎에 이르게 되는 거지요.



 벗이여, 그것이 우리가 하려는 일입니다. 깨달음이란 선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존재에 대한 겁니다. (부드럽게 반복한다) 그건 존재에 관한 겁니다.









잠과 꿈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가끔 저는 갑자기, 별다른 이유도 없이 잠을 깨곤 하는데, 이점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나요?









모든 사람이 그러합니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육체가 이완상태가 되면 몇몇 근육들이 경련을 일으키는 경우로, 이런 현상은 흔히 일어납니다. 이건 비교적 현세적 이유들 중 하나지요.



 다른 경우는 의식이 육체를 떠나는 전조로서 육체의 진동이 증가하는 경우입니다. 그런 진동으로 말미암아 육체가 깨어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의식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몸을 떠날 때가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의식이 몸으로 돌아오는데 그건 마치 쇼크와 같기 때문에 깨어나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이유들 중에도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몸 안에서 여러 가지 다른 차원의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고, 또 의식과 육체의 관계 때문이기도 합니다



.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의식과 육체는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몸 밖으로의 여행은 항상 여러분이 하는 일입니다. 몸 밖으로의 여행과 모험에 관하여는 의식적인 확장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말입니다.









여러분 중 몇몇은 의식이 알고 있는 상태에서 몸 밖으로 여행하기도 하는데, 그때는 의식이 잠자는 상태가 아니라 깨어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거의 반수면 상태로, 마치 잠들기 직전에 온 몸이 이완되어 있을 때와 같습니다. 명상 수행을 할 때 이런 상태가 되기도 하는데, 뇌파가 알파 상태라고 언급되며 이런 상태에서는 사람들이 가끔 몸 밖으로의 여행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고통을 가볍게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생활의 여유가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래도 낫습니다. 하지만 우리보다 불행해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죽음, 질병, 재난과 마주치게 되면, 이들은 고통을 겪고 있는데 나만 즐거울 수는 없지 않느냐는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죄책감은 책임감과 연결되어 있지요. 죄책감은 아직 배우지 못한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책임감은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이여? 책임감이란 당신의 가슴이 노래 부르고 싶어 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가슴의 노래에 반응하는 겁니다. 책임감은 의무가 아닙니다. 당신의 가슴이 시키는 대로 노래 부를 때 그것이 곧 자기 자신에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다른 누구의 행복도 책임질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삶만 책임지면 됩니다. 사람이란 모든 존재의 공동 창조물이니까요. 하지만 다음과 같이 말할 사람이 있겠죠?



“하지만 프타아, 우리의 소망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소망과 일치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사랑하는 이여, 당신이 누구인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땐 그들을 기쁘게 해주길 바라지요



.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면 자신을 위한 기쁨을 바라게 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가운데 결정이 이루어지면, 그건 조화와 안녕과 기쁨을 창조합니다.



사랑이 아닌 의무감에서 무엇인가를 하면, 그땐 원망이 생기게 됩니다.



 사람들이 그걸 모르리라 생각합니까? 당신이 아무리 얼마나 많이 미소를 짓든, 무슨 근사한 말을 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가슴에 의무로 인한 원망감이 있다면, 모두가 그걸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해보십시오.



“당신이 나에게 무얼 원하는지 충분히 이해하지만, 사실 내 가슴 속에선 이러저러한 걸 바란다오.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오. 실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오. 하지만 나는 내 인생을 기쁨 속에서 살아야겠소.”









누군가가 그걸 언짢게 여긴다 해도, 당신 책임이 아닙니다. 그건 그들의 창조니까요. 다른 사람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두려움과 자기 자신의 판단에 따라 반응하게 마련이니까요. 누군가가, 특히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면 슬프겠지요. 하지만 벗이여, 당신은 이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에도 마지막은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몹시 애닲아하는 것은 관습적인 행동입니다.



고대 문화권에서는 사람이 죽어서 또 다른 현실로 옮겨가는 것은 축하할 일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랑에는 끝이 없음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진실로 분리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보다 불행한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곤 합니다. 그들의 죽음과 질병을 바라보면서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건 저의 판단인가요?









영혼의 차원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현실을 선택합니다.



 현실의 모습이 어떠하든, 그들 스스로 그 현실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지구와 같은 차원의 현실을 이해하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지구와 같은 차원의 현실에 사로잡혀 있는 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어째서 태어나자마자 굶어 죽는 삶을 선택하는 거죠? 불구로 태어나거나, 전쟁과 파괴와 절망 속에서 태어나는 것은 무엇 때문이죠? 폭력과 증오가 가득 찬 가정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또 어째서 그런 상황을 선택하는 거죠?”









하지만 아십니까? 그 모든 것이 환상임을!

당신 스스로 경험을 위해 창조한 한 편의 영화라는 것을.



인생은 단 한번만의 사건이 아닙니다. 당신이 조화와 풍요로움과 기쁨의 환경 속에서 태어났다고 확신하고 있다면, 이 모든 걸 누리지 못했던 당신의 다른 인생도 많았음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당신은 그 모든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이 행성 위를 걷는 모든 존재, 모든 국면입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그렇게 경험을 위해 자신의 현실을 창조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다 환상입니다.









프타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존재의 충만함 속에서 살 수 있는지 설명해주시겠어요?









벗이여, 그 이야기를 하게 되어 기쁩니다.



존재 자체로서 충만해 지는 것, ‘하는 사람’이 아닌 ‘존재하는 사람’이 되는 것, 지금이라는 매순간을 충만함 속에서 사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



과거에 마음을 빼앗기지도 말고 미래를 걱정하지도 마십시오. 그런 건 ‘지금 여기’를 사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이 판단 속에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 하면 당신이 기대를 덜하게 될까요? 어떻게 하면 당신이 돌고래처럼, 어린애처럼 될 수 있을까요?









수행을 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하지만 당신은 곧잘 과거에 대해 마음을 빼앗기거나 미래의 일로 걱정하곤 하지요. 그럴 땐 그저 이렇게 말해보세요.



 “또 그러는 군” 그리곤 이렇게 말하세요. “지금 난 무엇을 하려는 거지?” 조금씩, 조금씩 쉬워질 것입니다.



 걱정하지도 말고 자신을 판단하지도 마십시오. 때때로 다시 사로잡힐지 모르지만, 그땐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미래를 생각하느라 바쁘다 바빠, 이제부턴 그저 존재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당신들은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법을 교육 받지 못했습니다.



이 사회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미래를 생각하느라 가르치죠.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과거 때문에 고통을 맛보게 됩니다.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죠.



당신들은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억누르려고 하지만 그건 없어지지 않습니다.



 죄책감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껴안아 버리면 그땐 그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과거를 바꿔버리면 당신은 강해집니다. 원리는 모두 같습니다.









생각이란 도구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씀 하신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 더 많은 내용이 있을 것 같은데, 좀더 상세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당신의 우주를 창조하는 것은 진정 생각 자체입니다.



 생각이란 실현의 도구지요. 당신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생각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전쟁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전쟁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3차원의 현실에선 어떤 것이 물리적 실체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각이 앞서야 합니다. 당신은 생각의 산물입니다. 물리적 실체는 곧 의식이고, 의식은 바로 생각 자체입니다.









그러나 생각은 힘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지금보다 훨씬 앞선 기술의 세계에서는 그렇습니다. 여기에 대해 너무 깊이 들어가는 건 이 시점에선 적절치 않습니다.



 위대한 기술의 세계에서는 생각이 동력으로써, 달리 표현하면, 연료로써 사용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에도 잠깐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들의 위대한 컴퓨터는 전기에 의해 동력을 얻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기술의 세계에서는 생각으로 동력을 얻을 것입니다.





생각에 대해 뭔가 더 깊은 내용이 있을 거라는 제 느낌이 맞군요.









그렇습니다 .벗이여, 당신네 물리학자들은 이제야 비로소 물질을 창조한 것이 생각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라는 존재는 소위 위대한 근원의 ‘한 생각’이라는 것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이란 빛보다 더 빠른 진동을 지닌 스펙트럼입니다. 과거 물리학자들은 빛보다 더 빠른 것은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빛보다 빨리 여행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이 빛보다 더 빠른 진동을 지녔다면, 단 한번의 집중된 생각으로 사물을 보낼 수도 있겠네요. 심지어는 우리 자신을 이동시키는 것도 가능하고요?









실제로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려고 애써도 할 수 없는 건 무엇 때문이죠?









순수한 생각이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당신이 할 수 있음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벗이여, 당신의 신념 체계가 당신이 서 있는 현실의 반석이라는 걸 아시나요?



전에도 여러 차례 이 말을 했고, 앞으로도 더 말하겠지만, 당신이 딱딱한 벽을 통해 걸어가길 원하면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할 수 없다고 믿으면 그땐 정말 할 수 없는 겁니다.









프타아, 과거의 모든 영적 지도자들, 붓다나 예수 같은 분들이나, 또 당신 같은 존재들이 어째서 모두 남성인지를 설명해주시겠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네 역사는 소위 남성 위주로 쓰여졌기 때문에 여성이 간과 되거나 감추어져 왔을 뿐입니다.



남성이란 존재는 여성을 몹시 무서워하는 데, 남성들에게는 역사상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이 여성들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창조자인 여성은 당신들의 지구 여신에 더 가까웠습니다.









당신네 역사에서 남성들은 항상 여성의 권능을 두려워하여 왔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여성들에게 종속되는 것이 그토록 무서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변화가 오고 있습니다. 우리처럼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실체는, 진실을 말하자면, 남성에너지가 아닙니다.



사람들과 관계 맺는데 있어 여성 에너지를 지닌 것보다 더 쉽기 때문에 남성 에너지로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인류의 의식 속에서 줄곧 권위와 지식을 지닌 것은 남성 에너지였습니다. 이해하시겠어요? 그래서 남성 에너지가 나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 자신을 포함한 우리의 신념 체계 때문에 남성 에너지에 더 잘 반응하므로 남성에너지를 불러들이게 되었다고요?









벗이여, 여성들은 줄곧 지배를 받아왔습니다. 힘없는 걸 두려워하는 남성들이 힘을 내세우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신네 문화에서는 남성들이 모든 앎과 지혜가 여성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에너지의 본질은 아시다시피 그다지 남성적이지 않습니다.









자웅동체 에너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벗이여, 영혼에는 성별이 없습니다.









성을 초월했나요?









사실은 영혼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당신의 영혼은 성별이 없지만 수많은 생애를 거듭하면서 남자가 되기도 했고 여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영혼은 모든 걸 초월해 있다기보다는 모든 걸 하나로 통합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매 생애마다 남자나 여자로 태어날 수 있다면 어째서 호모나 레즈비언이 있는 겁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인류는 실제로는 양성입니다.



 성별에 상관없이 육체적으로 사랑을 확장시키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인류는 여기에 대한 인식이 부족합니다.



동성연애를 이상한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준엄한 심판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약간은 혼란이 있을 수도 있겠고요. 우린 지금 이곳의 물리적 신체, 소위 염색체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동성연애는 대부분 정신적 충격으로 말미암아 시작됩니다.



 영혼 에너지에 성별이 없다는 것은 성적 표현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동성연애에 대해서도 판단을 내려선 안 됩니다. 동성연애든 이성 연애든, 상대방을 가둬 놓으려고 하는 성향은 마찬가지입니다. 둘 다 사랑과 기쁨을 육체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일 뿐입니다.



 아시다시피 성이란 단순히 생식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성은 인류에게 있어 노예화를 위한 또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습니다. 성이 단지 생식만을 위한 것이라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을 겁니다.









벗이여, 시간이 다 된 것 같습니다. 사랑과 더불어 감사와 존경을 여러분 모두에게 드립니다. 늘 그랬듯이 여러분과 함께 하는 것이 저에겐 큰 기쁨이고 즐거움입니다. 좋은 저녁시간 되시기를 바라며, 사랑과 기쁨 속에, 빛과 웃음 속에 나아가길 바랍니다. 제가 진실로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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