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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대는 우주의 중심 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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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예랑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2.♡.151.149), 작성일 08-12-29 19:18, 조회 4,612, 댓글 0

본문


5.  그대는 우주의 중심 태양



 



오늘 저녁에는 위대한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이고 어떠한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당신들이 머리로 듣지 않고 가슴으로 듣기를 바랍니다. 자, 이제 위대한 변화에 대해서 영혼의 연금술이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요약해봅시다. 고뇌를 엑스터시로 변화 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요? 아주 쉬운 방법이 있지요. 사랑하는 이여, 아주 쉽습니다. 당신이 절대적으로 당신의 현실을 창조했음을 알고 책임을 지는 겁니다. 당신의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 당신의 개인적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다 공동 창조물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판단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자, 어떻게 판단과 하나가 되지요? 당신이 판단에 길들여져 있음을 알고, 판단 또한 유효하다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판단 역시 신성의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판단 역시 존재하니까요. 그러니 변화를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껴안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래야 비로소 하나됨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나는 판단에 길들여져 있어. 나 자신도 판단하고, 상황도 판단하지. 나와 관련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판단하길 너무 잘해. 아무리 고통스러운 상황이라도 그것을 창조한 것은 나 자신이야. 배움을 얻기 위해서 내가 그런 상황을 창조한 거야.”









이런 식으로 조화를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도, 당신이 그토록 혹독하게 판단했던 고통 속에도, 지혜라는 진주가 감추어져 있음을 아는 겁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판단과 하나가 되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당신이 전정 하고자 하는 바가 살인을 저지르는 것일 때는 말입니다.









실제로 살인이야말로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인 경우가 많으니까요. 책임을 지십시오. 판단과 하나 되어 그 느낌을 받아들이십시오. 다시 한번 상기 시켜 드립니다. 고통은 느낌이 아닙니다. 고통은 느낌에 저항하는 겁니다.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지면 당신 복부에 억압되어 있던 에너지가 방출되면서 태양신경총으로, 가슴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토록 간단한 겁니다. 뭔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허용하는 겁니다. 그 허용 속에서 연금술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이제 최고급 과정으로 가겠습니다. 이토록 원리가 간단하지만 수렁에 빠져들기가 아주 쉽습니다. 모두가 고통을 피하려고 애쓰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저항일 뿐입니다.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려 해선 안 됩니다. 감싸 안아야 합니다. 껴안아야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느낌 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은 느끼는 방법을 잃어 버렸습니다. 당신은 죽게 될까 봐 몹시 두려워합니다. 소위 불가항력이라는 것입니다.









기쁨을 느낄 때, 내면에 기쁨을 창출하는 어떤 것을 경험하려고 할 때, 당신은 그것이 유쾌하지 못한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고, 그러면 즉시 방어벽을 치게 됩니다. 책임을 지십시오. 판단과 하나가 되십시오. 느낌을 느껴 보십시오. 그것이 전부입니다.









당신이 기대하든 기대하지 않든, 당신네 행성에 오게 될 변화는 오고야 맙니다. 당신이 그렇게 되리라고 믿든 믿지 않든, 벗이여, 수확을 거두기 위해서는 당신들이 조화로운 환경을 이루어야 합니다. 당신들 모두가 내면에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만물이 조화로운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시대의 열림입니다. 그것이 앞으로 일어날 일입니다.









당신들이 그렇게 갈망해 마지않는 깨달음은 변화를 향해 작동을 시작한 우주 전체에 의해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 온 것입니다. 특정한 우리를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모든 실체,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모든 존재를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지구 여신의 위대한 변화, 당신네 행성과 관련된 모든 존재의 위대한 변화를 도와줄 모든 존재 말입니다.









지구 인류가 영적인 충만함에 도달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는 이미 말한 바 있습니다. 그래야만 인류가 그들의 행성과 조화를 이룰 수 있고, 또 앞으로의 새로운 기술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은 당신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곧 전체라는 걸 이해하기까지는, 영적으로 성인이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벗이여, 당신이 곧 전체라는 건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닙니다. 당신이 곧 전체라는 충만감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당신이라는 존재의 조각들을, 당신 존재의 모든 면을 다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신 자신이 그토록 가혹한 심판관 노릇을 즐긴다는 사실마저도 다 받아들여서, 당신의 진정한 자아 안에 포용해야 합니다. 고통스러운 상황을 다 받아들이십시오. 현재의 고통이든, 해묵은 과거의 지나가버린 고통이든, 다 받아들이세요. 당신이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있다면, 그것은 결코 처음 당하는 일이 아님을 상기하십시오. 당신이 같은 상황을 반복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야기의 줄거리가 어떻든 상관없습니다. 당신의 영혼이 어떠한 방식으로 그런 상황을 끌어들였든, 그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 스스로 겪어 보고 끌어안도록 하기 위해서 당신의 진정한 자아, 위대한 자아가 그 모든 상황을 불러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 자신의 모든 면을 즐길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당신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벗이여, 당신이 전체로서 존재할 때, 그것이 곧 귀향입니다. 당신네 행성은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 모두가, 당신들을 환영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모든 존재들과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삶 속에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불협화음을 내는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바로 당신들의 믿음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자신이 어떠한 믿음 체계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스스로의 믿음 체계 안에 갇히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이러한 믿음 체계 안에서, 당신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당신들이 갖고 있는 판단을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지구가 변화하게 되더라도 우리 스스로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변화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요?









우리가 변화에 대해 이야기 할 때면, 그런 식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밑바닥에 두려움이 깔려있는 겁니다. 나는 그 등급에 이르지 못할 거라는, 나는 충분치 않으며 뒤에 남겨질 거라는 두려움, 사랑하는 사람만 남겨 질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있습니다. 매우 해봄직한 생각이지만 일이 그런 식으로 진행되진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뒤에 남겨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실제로 그건 뒤에 남겨지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이해하시겠어요?









할 일은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그 과정에서 길을 잃는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변화의 시기가 도래할 때는 지구 전체가 그 변화에 공명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런 변화를 갈망하지 않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그것을 느끼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그런 변화가 일어나기 직전에는 사람들이 동요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의심하게 될 것이고, 두려움에 직면한 사람들은 아주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그 두려움에 반응하기도 할 겁니다.









전쟁이 아주 좋은 예가 되겠지요. 대 파멸에 직면했다고 믿는 사람들과, 자연이 미쳐 돌아가서 이젠 끝장났다고 믿는 사람들은, 비정상적 방식으로 대응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사람들에게서 그런 징조가 보이거든 변화가 다가왔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구의 변화에 대해 말할 때에도, 정치상의 변화, 기술상의 변화, 삶의 모든 국면에 대해 말할 때에도, 여러분들은 항상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다는 운명의 전조 같은 것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는 여러분이 진실로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대 격변처럼 보이는 어떤 일을 볼 때마다, 여러분들은 사실 위대한 변화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선 것임을.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하는 대신, 지금 우리 시대의 죽음과 재앙부터 껴안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 시대의 죽음과 재앙을 뚫고 나갈 수 있다면, 나중에 죽음과 재앙이 몰려오더라도 그때엔 우리에게 힘을 쓸 수 없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여기 온 이유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돌아보게 하기 위하여, 머리의 지식으로만이 아니라 가슴의 지식으로 알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러한 일은 분명 여러분 당대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최근 당신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극과 극을 끌어안는 명상 수행을 하게 되었는데, 저에게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고통, 두통, 죽음에 대한 두려움, 전 죽어도 괜찮다고 느꼈어요. 죽음을 환영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이런 것도 당신이 말하는 그런 과정의 일부인가요. 죽음은 죽음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 말예요. 그런 사고방식은 우리 신념 체계와 상반되는 것인데요. 그렇지 않나요?









죽음 같은 것은 없습니다. 매일 같은 색깔의 옷에 싫증이 낫을 때, 그 옷을 벗어 던진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그렇죠? 당신의 몸은 말하자면 옷과 같은 것입니다. 당신이 옷을 벗는다고 해서 경이로운 보석과 같은 존재인 당신이 끝나는 건 아니지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참으로 이상한 것입니다. 죽음은 단지 의식의 새로운 탐험일 뿐이고, 당신이 진정 죽음을 두려워 않는다면, 사랑하는 이여, 그땐 발걸음을 내디딘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적 연습의 수준을 이미 벗어났다는 뜻이고, 내면 깊숙이에서 깨달았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진실로 위대한 변화입니다. 하지만 의식은 당신이 잊고 있을 때라도 계속 앞으로 앞으로 나갑니다.









사랑하는 프타아, 우리의 참된 실재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이용하고, 우리의 존재 속으로 탐험해 들어가는 것이 매우 유익하다는 글을 최근에 읽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 말씀해주시고 가능하다면 가르쳐 주십시오.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영혼 에너지든 다른 에너지든 당신에겐 항상 유용하니까요. 인류는 훌륭한 책자를 통해 자신들이 에너지들로 둘러싸여 있음을 지적으로 알게 되더라도, 곧잘 혼자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가슴속 깊이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허용해 보세요. 진정으로 할 일이 있다면 긴장을 푸는 것뿐입니다. 그리고는 구해보세요. 그러면 주어질 것입니다.









벗이여, 무엇이 일어나든 받아들이세요. 무슨 일이든 받아들이라는 말은 엄청난 역설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아주 자주 당신은 이렇게 말할 테니까요. “내 머리 속에는 정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우주여 깨달음을 보내주십시오.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정보를 주십시오.” 그리고는 천상의 목소리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하늘이 정보를 보내 준다고 해도, 그것은 천상의 목소리 형태를 취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당신의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아주 평범한 일이 그 대답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의식이 깨어있다면 이렇게 말하겠지요. “아하 이것이 내 질문에 대한 해답이구나.” 이해하시겠습니까? 깨달음이 어떤 식으로 올 것인지에 대한 기대를 갖는 순간, 당신은 즉시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펼쳐지든 개의치 말고, 모든 것을 허용하는 가운데 깨어 있으십시오.









고통은 느낌이 아니며, 고통의 뒤 안에 있는 깊은 느낌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고통이 와서 무슨 일이든 다 받아들이겠다고 말할 경우, 먼저 고통을 느낀 다음 무슨 느낌이 올지를 기다리는 겁니까?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몹시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었습니다. 죽음은 단지 변화일 과정일 뿐이고,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더라도,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의 물리적 실체에 대한 상실감 때문에 슬픔을, 가슴 저린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이 고통은 단순한 분리의 슬픔이 아니라, 영겁의 세월 동안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는 분리의 고통인 것입니다.









그 고통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고통 속에 있기 때문에 등급을 통과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진실로 그 고통을 인정하고, 당신이 그것을 불러들였음을, 키우고 축적했음을 알도록 하십시오.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도 가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신성의 표현임을 알고 껴안아야 합니다. 그것도 괜찮은 겁니다.









고통을 억누르기 위해 합리적인 생각을 하다 보면, 당신은 고통을 밀쳐버리는 것이 되며, 고통을 피하려 하면 위대한 변화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건 마치 몹시 더운 날 바닷가에서 물을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 안에 뛰어 들기 전에는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얼마나 상쾌한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바닷물이 육체의 말초 신경이 어떻게 흥분 시키며, 어떻게 살아 움직이게 하는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고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고통을 판단 없이 껴안는다면, 그 결과는 무더운 여름 날 수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짜릿할 겁니다. 그때 비로소 당신은 느낌이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알게 됩니다. 고통은 느낌에 대한 저항이라고 한 말을 이제 모두 이해하시겠습니까?









프타아, 지난 번 강연 때, 헤어질 무렵 우리의 용기에 대해 존경을 표한다고 하셨습니다. 현존하는 신념 체계를 부수는데, 필요한 용기에 대해 말씀하신 겁니까, 아니면 특별히 뜻하신 바가 있었던 겁니까?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실은 폭넓은 의미로 말한 겁니다. 이 삶을 선택한 것 자체가 매우 용기 있는 일이니까요. 사실 이런 차원 안에 있는 어떠한 생애든 다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각 개인이 믿음의 장 안으로 들어서는 것도 역시 대단한 용기입니다. 사실 벗이여, 믿음의 장, 그것이 곧 실상입니다. 어떠한 보장도 없기 때문에 믿음의 장인 것입니다. 인류는 보장 받는 걸 좋아하고, 투자한 것 이상으로 되돌려 받는 걸 좋아하지요. 모두들 ‘좀 더 좀 더’ 바라고 있습니다. 믿음의 장은 또한, 당신네 시대의 배경음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분위기는 기대하게 되면 더욱 가속화되지요.









인류는 영적인 교육에 더욱 더 마음을 열게 되지 않을까요?









물론이지요. 벗이여, 그것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낙담하여 이렇게 묻곤 합니다.  ‘자, 이 모든 경이로운 현상이 조만간 일어날 거라면, 어째서 모든 것이 그토록 혼란스럽죠? 여전히 전쟁이 있고, 여전히 기아에 허덕이고, 여전히 살인이 행해지고, 여전히 도처에 불협화음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런 증상이 더욱 심해지다가, 그러다가 문득 변화가 오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의식에 분열이 생겨서 그 분열이 극에 달해 밑바닥까지 이르러야 한단 말입니까? 아니면..









벗이여, 의식에 분열이란 건 없습니다.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좋아해서 힘겨운 전투를 벌이는 사람들이 있을 뿐입니다. 지구의 변화가 명확해질 때, 특히 더 심해질 겁니다. 왜냐하면 그땐 무력한 느낌이 만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네 나라가 산산조각이 난다면, 재정을 어떻게 유지하고 관료적 권세를 어떻게 붙들고 있겠습니까? 이 나라에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몇몇 나라들에서 일어날 대재난을 당신들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들 모두 극히 선택을 잘했다고 할 수 있겠죠?









지구의 대재난에 대해선 말들도 많고, 두려움도 팽배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어떠한 의미에선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나의 여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을 바짝 정신 차리게’ 할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더욱 더 자신의 앎에 이르고, 일어나고 있는 일과 더욱 더 조화를 이루면 이룰수록, 대재난의 조짐이 일어날 때, 당신은 거기 있지 않게 됩니다.









당신이 대재난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리게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니 재난이 닥치더라도, 휴가 여행을 취소하지도 말고, 일상생활도 포기하지도 마십시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은 안전한 우주에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이 우주를 창조하고 있는 겁니다. 바로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겁니다. 당신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지고, 당신 행성을 향해서도 사랑을 보여줄 때, 어찌 안전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안전하지 않다는 것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빠져 있는 사람이 무엇을 자기 자신에게로 끌어 들이겠습니까? 바로 재난이지요. 안전함이 아니란 말입니다!









당신이 말씀 하신 것을 저는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안전한 우주에 있다는 것, 죽음이란 변화에 불과하다는 것 말입니다. 저는 그 공간을 경험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제게는 두려워하는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파멸을 두려워하는 부분, 죽음을 두려워하는 부분, 나 자신은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느끼는 부분이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저는 제 인생을 바라봅니다. 아름다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 저는 잠시 동안 극심한 자기 혐오감을 경험했습니다. 그게 거기 있었어요. 그래서..?









사랑하는 이여, 왜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그렇게 다른 거지요? 당신을 좀 놀려주려고 한 말이에요.









네. 저도 알아요. 전 그저 그런 것에 대해 당신이 한 말씀 해주시기를 부탁드리는 겁니다. 우린 이러한 것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내면에는 아직도 뭔가 다른 것이..









물론 있지요. 가장 중요한 것부터 말씀드리죠. 대답이 뭘까요, 벗이여? 실은, 자기 자신의 거짓된 자아를 포기하는 겁니다. 자기 혐오감, 파멸에 대한 공포는 인류의 출발선이나 다름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거짓된 자아를 넘겨주는 것을 더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자, 말해보세요. 자기혐오의 순간, 당신은 무엇을 했죠?









저는 거기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자기 혐오감은 제 머리 속을 계속 맴돌며 떠나지 않았죠. 결국 저는 그것이 가치가 있으며 나 자신의 신성한 국면임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러고 나자 그런 감정이 없어졌어요.









얼마나 희한한 일입니까? 사랑하는 이여, 그냥 그렇게 사라졌다 이거죠. 하지만 이봐요. 그것이 정말로 순간적인 공포였다면, 당신은 그것을 변형 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 순간 당신은 분명 더 이상 자기 자신을 혐오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말씀드립니다. 엄청난 고통을 느낄 때, 아주 간단한 해결책이 있습니다. 머리를 떼어 내어 겨드랑이 밑에 넣어 버리세요. 거기에 있는 편이 훨씬 더 쓸모가 있을 테니까요.









왜냐하면 사랑하는 이들이여, 당신들의 삶이란 진실로 느낌, 정서, 느낌의 창조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느낌의 길이 열리도록 채널을 허락한다면, 그땐 머리 같은 것은 거기에 없습니다. 당신들은 머리로 느끼는 게 아닙니다. 여기로 느끼는 겁니다. (태양신경총을 가르킨다) 그러니 책임지세요. 판단과 하나가 되세요. 머리를 집어 던지고 느낌을 느껴 보세요. 무리 모두 이것을 새로운 규칙들 속에 집어넣는 게 어때요?









우리는 지금껏 영성이라는 틀을 만들고 그 안에 갇혀왔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고통 속에 있게 되면, 죄가 많아서 그렇다고 느끼는 겁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생각을 내던지고, 당신 말씀대로 울어도 괜찮고, 슬픔을 느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사랑하는 이여, 세상에는 성스러운 척을 하는 사람들, 성자인 척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요. 이제 당신은 그런 사람들을 만났을 때도, 그들이 당신 눈앞에서 승천하는 걸 실제로 보지 않는 이상,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을 눈치 챌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삶의 기쁨에 대해서는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친구와 말다툼을 하게 되면 그것 역시 반영이지요. 그래서 우린 그런 일을 겪고 나면 죄책감을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당신도 역시 우리의 반영 아닌가요? 우리가 가치를 반영하지 않은 아름다운 반영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것들에 더욱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다지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은 것들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물론 ‘영성은 진지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영적인 기분에 잠겨있을 때, 당신은 순한 양처럼 선하게 되는 거구요. 당신은 나날의 삶 속에서 수많은 반영물들을 만납니다. 어떨 때는 당신을 미치게 만드는 반영물도 적지 않을 겁니다. 우린 지금 사람들이라는 반영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의 아름다움을 당신에게 반영해 줄 자연이 없었다면, 세상이 어떻게 보였을까요?









우린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당신들 사람이라는 반영물은 너무 음침하고 재미가 없게 느껴지게 때문이죠. 아주 자주 말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에 당신은 자연을 창조하였고, 당신이라는 존재의 장엄함과 아름다움, 경이로운 힘과 권세를 진실로 이해하게 되나 봅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영성은 선하게 되는 것에 관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에 관한 거지요.









상황이 어떠하든, 매 순간에 존재하는 것, 모든 기쁨과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그 순간에 존재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절묘한 것인가를 알아 합니다. 격정과 분노 속에서도 당신은 살아 있고, 당신은 그것을 선택한 겁니다. 격정과 분노, 그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치열한 길입니다. 그것에 감사하십시오. 만약 그런 게 없었다면, 그 길이 당신에겐 몹시 따분했을 겁니다. 그 모든 것에 빠져 드십시오. 격정과 분노에 빠져도 좋습니다. 그것을 사랑하세요. 그것은 경이로운 것이고, 역설적으로 당신을 깨달음에 이르게 해주는 원조자입니다.









두려움은 진실된 느낌인가요? 아니면 느낌의 부재인가요?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두려움은 양극성 중의 하나입니다. 인류는 진정 주권을 갖고 있지요. 자유로운 지배권, 자유를 항상 선택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과 사랑 중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 당신은 스스로를 억압하며 이렇게 말하죠. ‘자, 난 도대체 뭘 원하고 있지?”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후에야 당신은 발견하게 됩니다. 두려움이란 당신 자신에 대한 당신의 믿음에, 현실에 대한 당신의 믿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이 믿음 체계를 바꾸고 당신 자신에 대한 믿음을 바꾸면, 그땐 더 이상 두려움이 없게 됩니다. 하지만 벗이여, 잊지 맙시다. 두려움도 유효한 것이며, 여러분 모두의 또 다른 국면이라는 것을. 사랑이 아닌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두려움 또한 변형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을 억누름으로써, 멀리 떨쳐버림으로써, 또는 그것을 무시함으로써 변형 시키려 들진 마십시오. 다시 말씀드리지만, 당신이 무가치하게 여기면 바로 거기에 힘을 부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든, 사랑이든, 당신이 무엇을 느끼든, 당신은 그것을 우주로 투사하게 됩니다. 따라서 당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든, 당신은 그것을 당신에게로 끌어들이지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잘 의식해야만 합니다. 생각은 곧 힘입니다. 당신은 생각의 전자기적인 에너지입니다. 당신의 생각이 당신의 현실을 창조합니다. 당신의 신념 체계는 당신 우주의 사상 구조물입니다.







벗이여, 당신은 당신이라는 우주의 중심에 있는 태양입니다. 항상, 항상, 당신이 믿고 있는 바를 탐색하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당신의 신념 체계는 감옥의 쇠창살과 같을 때가 많습니다. 당신의 의식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그 감옥의 벽을 이제 허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 확장된 의식, 더 확장된 깨달음의 세계로 옮겨가야 합니다. 유념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러한 소망을 싹 틔우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머잖아 당신이 믿고 있는 바를 이해하고 배울 수 있는 상황을 날이면 날마다 당신 자신에게 불러올 겁니다. 당신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가장 간단하게 말해 이것입니다. 당신 자신에 대해 당신은 무얼 믿고 있습니까? 신념 체계의 어느 부분도 부인하려 들지 말고, 그것이 당신 자신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 식으로 성장해 가는 거지요. 벗이여, 지극히 간단합니다.







어떤 사람이 제 친구 중에서 한 명에게 알코올이야말로 가장 나쁜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그에 대한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나는 알코올을 아주 좋아하는데요. 알코올이 제일 나쁘답니까? 그거 정말 멋진 판단인데요. 당신이 그렇다고 믿으면 정말 그렇게 되지요. 전에 말했듯이, 당신이 조화된 상태에 있다면, 쥐약을 마신다고 해도 괜찮을 겁니다. 자, 잠시 ‘하라’와 ‘하지 마라’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고기를 먹지 말라. 땅에서 자란 것이 아닌, 물속에서 재배한 식물을 먹지 말라. 알코올을 마시지 말라. 담배를 피우지 말라. 그래요, 우리도 우리 여인에게 이 점에 대해 이야기했었지요.









벗이여, 당신을 즐겁게 해준다면 무엇이든 하십시오. 균형이 중요하겠지만 말입니다. 길을 가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한 잔의 포도주 밑바닥에서 깨달음을 얻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무엇이든 지나치게 빠져들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당신 몸을 빛의 몸, 즉 당신 영혼의 확장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의 몸은 고귀하고 아름답습니다. 당신이 자신의 몸을 정중함과 존경으로 대해주지 않는다면 다른 것을 어떻게 정중과 존경으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몸에 정말로 나쁜 어떤 것이 있다고 당신이 믿는다면, 우린 자주 이런 나쁜 말을 듣는데, 그건 당신에게 정말 나쁜 겁니다. 나쁘다고 생각하면 더 나빠집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무도 알코올의 영향으로 죽지 않는다고. 아무도 담배의 영향으로 죽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상처 입은 가슴 때문에 죽는 겁니다. 몸에게 먼저 물어보십시오. 몸이 먼저 불편함을 호소할 것이니, 뭐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몸이 달가워하지 않는 화학물질을 섭취할 때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 현명할 겁니다.









우린 알코올이 가장 나쁜 것이라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그토록 딱딱한 도그마에 빠져들면, 당신은 정보의 흐름을 막아버리는 셈입니다. 항상, 항상 당신의 몸은 당신에게 몸의 상태를 말해줄 겁니다. 몸은 거울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술 마시는 걸 즐겨도 좋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여, 당신이 진실로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지게 되면 당신은 어디에도 영향 받지 않음을 아셔야 합니다. 질문 있습니까?









프타아, 저는 직장에서 순간적으로 엄청난 분노를 느끼곤 합니다. 나 자신에 대한 분노, 타인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 분노를 한 동안 살펴보면 그건 나름대로 유효합니다. 하지만 분노란 무엇입니까? 때때로 그냥 사라져 버리기도 하지만 어쩔 때는 아주 오랫동안 속을 끓이게도 합니다.









분노의 저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판단? 부정적 판단?









두려움은 어떨까요? 상처, 고통은 어떨까요?









거기에 대해선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요?









이제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 말씀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분노, 그것은 사뭇 장엄한 표현이며 전적으로 유효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분노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당신이 분노에 빠져 있다면 그냥 그것을 즐기세요. 멋진 분노를 표현하세요. 당신이 진정으로 분노하게 되면, 몹시 격정적이 되면 당신은 분명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겁니다. 특히 당신이 물건을 집어 던질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웃음)









전에 이런 말을 했었죠. 분노를 표현하는 것은 괜찮다. 하지만 ‘왜?’라고 물어보라. 당신이 이유를 알게 될 때, 고통과 접하게 될 때 그땐 그것을 변형 시킬 수 있습니다. 책임을 지세요. 판단과 하나가 되십시오. 느낌을 느끼세요. 아참 잊었네. 머리를 집어 던지세요. 이해하시겠어요?









당신이 자신의 진동 주파수의 파장을 높임에 따라 이 차원에 존재하는 당신 주변에, 인류 전체의 경이로운 에너지를 당신에게 끌어들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이여, 주파수가 높아지면 당신은 저항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정말 그렇습니다.









프타아, 아침에 일어나면 멋진 하루가 되자고 단단히 각오를 다지곤 합니다. 하지만 장애물 경주처럼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곤 합니다. 뿐만 아니라 생리를 하기 직전이면 특히 어려움이 느껴집니다. 그 상황은 아주 극복하기 힘든 것처럼 보입니다.









자 여기엔 두 가지 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기적으로 균형점이 이동하는 현상이라는 관점입니다. 또 하나는 고정관념으로서 많은 여자들이 그렇다고 믿고 있습니다. 모두가 그렇다고 믿기 때문에 그건 엄청난 선전포고가 되어 버렸습니다. 소위 월경 전의 긴장현상이라는 거지요. 월경의 양이 지나치게 많다면 누군가 당신 앞에 벽돌 몇 장을 갖다 놓아 걸려 넘어지게 했다고 생각하면 그만입니다.









“이런 이 벽돌 때문에 걸려 넘어졌네. 오늘은 재수 없는 날이야.” 그런 다음 긴장을 풀고 그 상태를 즐기세요. 재수 없는 날도 상당히 유효한 겁니다. 아시겠어요? 우리가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 일입니다. 당신이 걸려 넘어진 벽돌을 보고 웃으면서 “이런 재수 없는 날이군” 하고 말할 때 당신은 그 모든 것이 변하게 됨을 발견할 겁니다. 왜냐하면 뱃속에서부터 나오는 웃음을 웃을 때, 당신은 진정 조화로운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큰 소리로 웃을 때, 그땐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오직 현재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순간의 기쁨이요, 충만감이요, 우주와의 공명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린 너무 거창한 것이나 너무 무거운 주제에는 매달리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들 모두가 그런 거창하고 심각한 문제들을 도맡아 고민하느라 항상 바쁘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이 그렇게 대신해 주니 우리는 심각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안 그래요?  자신을 판단하지 마세요. 사랑하는 여인이여, 전에도 말했듯이 인류는 모든 경험으로부터 배워 나가는 생명체입니다. 당신이 높은 차원의 여신이 되어갈 때, 재수 없는 날은 없을 겁니다. 그것도 괜찮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고를 복종 시킨다는 거지요.









저는 꿈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저는 대체로 환상적인 꿈을 꾸는데, 최근엔 거대한 산사태가 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뉴스에서 그런 일이 실제로 중국에서 벌어졌다는 겁니다. 이 생생한 꿈이 실제 상황인지 궁금합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당신은 분명 실제 상황에 들어선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 모두 그렇게 합니다. 꿈에서 자주 이 행성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보게 되는데, 단지 정확한 지식이 없어서 모를 뿐입니다. 물론 당신의 꿈 가운데는 소위 계시적인 내용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신 행성의 입장에선 모든 인류간에 분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이 의식적으로 발을 들여 놓는 모든 현실 차원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는 진실로 분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자연스럽지 못한 건 당신의 분리 개념입니다. 다시 한 번 꿈의 상태에 대해 상기 시켜 드려야겠군요. 당신의 꿈 상태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다차원적입니다. 흔히 흘러 들어온 정보가 당신의 의식적 마음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럴 경우 당신은 자신의 의식이 이해할 수 있는 영상을 창조합니다.









꿈속에서 당신은 하늘을 날기도 하고 바다 속을 헤엄쳐 다니기도 하는데, 그건 당신의 여행을 상징하는 겁니다. 친구들을 만나는 일도 자주 있지요. 때로는 그들이 이번의 삶, 즉 이 의식적 현실에서 알지 못한 친구들이기도 합니다. 그건 다차원적입니다. 인류는 아무리 자주 이야기를 들어도 자신들이 각각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분리가 없음을 진정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하나의 옷감을 짜는 데 쓰여졌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영혼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신성한 근원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당신 자신의 어떤 국면으로부터도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당신 자신은 진실로 경이로운 존재이며, 당신이 자신의 경이로움을 받아들이면 들일수록 자아의 다차원적인 국면을 전부 다 당신의 의식 속에서 더욱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당신 자신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항상 분리의 고통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당신이 자신에게 위대한 변화를 허용할 때, 우주 전체와 하나됨의 절정을 경험할 때, 조금씩 조금씩 그 분리는 줄어들 겁니다. 그것은 오직 자아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사랑함으로써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두려움 속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당신의 본래 모습은 장엄하고 경이롭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진정한 모습은 당신의 우주라는 보석의 한 단면입니다. 당신의 모든 면이 그 단면을 형성한 겁니다.









신성한 근원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당신 모습 그대로 존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존재함 속에서, 당신의 모든 면을 인정하고 껴안는 가운데, 당신이 그토록 열렬히 바라던 변화를 창조하게 됩니다. 당신이 무엇을 함으로써 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존재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각자는 피어나는 꽃봉오리의 한 부분입니다. 여러분의 얼굴을 신성한 빛을 향해 돌리고, 진실로 자신이 신성의 한 표현임을 이해하도록 하세요. 당신의 진정한 모습은 장미 향기 풍기는 신입니다.









오늘 저녁 이 장소를 떠나서 하늘을 바라보고 달의 영광을 바라보세요. 그러면 당신 또한 그런 장엄한 아름다움 속에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달은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압니다. 그것이 그녀에게 위대한 기쁨을 주듯, 당신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명상하다 보면 당신에게도 위대한 기쁨이 찾아들 겁니다. 여러분 모두를 온 마음으로 사랑합니다. 벗들이여,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기쁨이요, 영광입니다. 좋은 저녁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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