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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기쁨으로 나아가 즐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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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아름다운 마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8.♡.226.174), 작성일 08-12-31 11:02, 조회 4,124, 댓글 1

본문


6. 기쁨으로 나아가 즐겨라









오늘 저녁엔 여러분의 믿음 체계를 살펴보는 걸로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는 그저 여러분과 가볍게 얘기를 나누면서 여러분이 가슴뿐 아니라 두뇌를 활성화하여 질문을 하게하고, 이런 식으로 좀더 명확한 이해에 도달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저녁에 얘기하려는 것은 아주 예민한 주제로, 인간의 성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우린 전에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 사뭇 많은 말을 했습니다.



먼저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살펴봅시다. 특히 당신들의 어린 시절을 다루려고 하는데, 인간은 유아기와 아동기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믿음 체계를 형성하고, 그것이 결국 당신들의 세상을 바라보는 거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성적 존재이고, 당신들도 또한 그러합니다.



당신네 종교에서, 성은 매우 그릇된 것으로 여겨져 왔고, 사악한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음, 사악한 것, 그게 정확한 표현이겠군요.



어릴 때부터 체득해온 문화적 유산 때문에, 당신이 종교적 양육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당신들의 공명 속에는 죄의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당신네 문화에서 인류는 성적 본능을 지닌 것이 원초적이고, 추한 것이라고 이해하도록 양육되었습니다.



성이란 결코 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다가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면 갑자기 섹스를 해도 괜찮다는 겁니다.



 그리고 출산을 위한 섹스는 멋지진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희한하지 않습니까? 당신들은 태어날 때부터 성적 존재입니다.



당신의 몸은 빛 에너지가 머무는 성전입니다. 어째서 신성의 표현이라는 생각은 못하고, 성적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당신들이 아무리 지적으로 각성되었다고 해도, 당신들 안에는 여전히 섹스에 대한 정서적 장애물이 존재합니다.









그 때문에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일정한 나이에 도달하면, 성에 대한 사회적 관습이 난센스임을 지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하고, 그것이 실생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모두가 뛰쳐나가 실험도 해보고,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불만족스럽기만 합니다.



자신들의 능력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문제로 돌아옵니다.



 여자든 남자든, 자신들의 인체를 보고 불만족스러워하고, 사회적인 표준에 미달된다고 여깁니다. 자신들의 완성도에 대해서도 걱정을 하지요.









어느 누구도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지만 당신들은 그 방법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당신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고, 사랑 받을 가치가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들은 여기 저기 기웃거려 보고 뉴 에이지라는 훌륭한 영성을 발견하고 발을 들여 놓기도 합니다.



뉴 에이지의 어떤 파들은 성적으로 관대한 자세를 표명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체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음 그건 괜찮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걸 초월했고, 그걸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섹스보다 더 고차원적으로 되면 섹스는 싱거워져 버립니다.” 허리 부분에 속하는 어떤 것에 너무 깊이 빠져 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줄 아느냐고 경고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나 역시 아무래도 이상하기만 합니다. 그리하여 당신들은 그 부위를 문제시하게 되고 불편하게 여겨 버립니다.



불편함, 그것이 곧 병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성적인 것이 변질되어 끝내는 병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리곤 손을 털면 그만입니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결혼을 하면 되니까요.



 “신은 길 잃은 양을 도와주리라.” 벗이여,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꿰려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우린 지금 가슴의 표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생기 있게 기쁨을 표현하는 것, 서로 통하려는 욕망, 안전한 우주에 살고 있다는 깨달음, 심판은 없다는 것을 아는 것, 당신의 몸은 참으로 빛의 존재의 표현이라는 것, 당신이 몸으로 기쁨을 창출할 때 그것은 진실로 전 우주에 메아리친다는 것..



 진실로 당신은 안전한 우주에 살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믿음대로 창조하고 구현합니다. 그러니 기쁨으로 나아가 즐기십시오. 가슴으로 즐기십시오.









수많은 세월 동안 인류는 성을 권력의 도구로 이용해 왔습니다.



요즈음 들어 당신네 문화권의 사람들은 물질 위주의 사고방식이 팽배하여 성을 물질에 종속 시키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역사 속에서도 여자들이 돈 때문에 노예로 팔려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요즈음 여자들은 팔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자신을 팔고 있습니다.



 남자는 권력과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들이 존경 받고 있다는 심볼로 삼고자 합니다. 그래서 소위 사회적 평판을 높이려고 여자를 취하여 자신이 매우 성공한 사람임을 과시하곤 합니다. 이건 ‘기쁨으로 나아가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이 당신 자신을 어떻게 느끼는지를 반영하는 것뿐입니다. 자신에 대하여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반영하는 것뿐입니다.



 당신이 진실로 주권적 존재임을 알게 될 때, 진실로 신성의 표현임을 알게 될 때, 자유함 속으로 나아가 놀라운 공명을 지닌 누군가를 만나 웃음과 기쁨 속에 있게 될 때, 그때 비로소 당신의 몸은 당신의 가슴속에서 진실한 공명을 일으킵니다.



 이러한 에너지 공명과 더불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당신은 진정 기쁨에 빠질 것입니다. 그 빛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당신이 성적 표현을 권력의 도구로 이용하고, 당신의 가슴은 개입되지 않는다면 그땐 그 이유를 찾아보십시오



. 벗이여, 당신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성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는 판단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동성연애나 이성 연애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의 마음이 끌리는 곳에서 육체적으로 자연스런 표현을 하는 것 그것이 정상이고 그것이 균형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판단입니다.









그러면 판단을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판단에서 벗어날 수 있죠?









판단이 어떻게 작용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판단을 함과 더불어 당신은 무얼 하죠?









모르겠어요. 판단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바라보아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먼저 이유를 알아차려야 하겠죠? 그리고 판단 뒤에는 어떤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여, 그 모든 것을 껴안으면 됩니다.









실제적으로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모르겠어요.









예를 하나 들어 달라는 건가요? 좋습니다.



 당신이 다른 누군가의 행실을 보고 ‘이건 옳지 않아’ 하는 상황이 일어날 때, 당신이 정말로 하게 되는 것은, 당신 역시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걸 하고 싶어 한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그런 생각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은 그런 생각 자체를 두려워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유를 보아야만 합니다.



 그런 판단의 밑바닥에 깔린 근본 신념은 무엇인가? 두려움이 참으로 무엇인지를 정직하게 탐색해 본다면 깜짝 놀라게 될 겁니다.





남자들의 내면에는 동성연애자로 판단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동성연애자로 판단 당한다고 해서 두려워할 건 없습니다. 실제로 동성연애자들은 발각 당하는 것을 그리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 동성연애의 경험이 있고 그것을 즐겼지만 이젠 동성연애를 하지 않는 남자들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들은 발각 당할까봐 정말 두려워하죠.



 이건 무슨 뜻인가요? 정상이 아니라는 두려움, 죄를 지었다는 두려움, 비판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여자들의 경우엔 이런 범주에 속하지 않습니다. 여자들은 동성애의 경험을 보다 잘 다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식을 느끼지 않습니다.



 죄의식이 있다면 그건 아직 배우지 못한 가르침입니다. 두려움? 간단합니다. 두려움을 바꾸기만 하면 됩니다. 어떻게 하느냐고요? 책임을 지고..









머리를 집어 던져라?









그건 나중에 할 일이죠. 먼저 판단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머리를 집어 던지고 느낌을 느끼는 겁니다. 사랑이 아닌 건 모두 두려움입니다.



벗이여, 우리는 당신들에게 누누이 말합니다. 사랑의 표현이 아닌 건 모두 두려움이라고요.



 두려움을 어떻게 변형시키냐고요?



어떤 상황을 창조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그 안에 담긴 지혜의 진주를 발견하십시오.



 당신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에 대한, 그리고 그런 상황에 대한 당신의 판단과 하나가 되십시오.



 당신의 모든 면이, 심지어는 판단조차도, 다 신성의 표현임을 진실로 깨닫고, 그 모든 것을 당신 자신의 빛으로 껴안을 때, 참으로 위대한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느낌을 느끼세요. 그 정도면 충분한 답변이 됐나요. 사랑하는 이여?









네 그런데 질문이 더 있습니다. 판단과 하나가 되는 것, 그건 내 판단이 무엇이건 그저 그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허용하라는 뜻인가요? 아니면?









그렇습니다. 인정, 허용, 이것이 모든 것을 조화로 이끕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가 되는 거지요.









그저 그것을 허용하라고요?









네. 그것이 바로 하나가 되는 방법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당신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 어떠한 모습이건, 당신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무방비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이여. 본래의 위대한 자아에게 가짜의 에고를 넘겨주는 거지요.



 당신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모든 것을 넘겨주는 일 말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자신의 겉사람을 속사람에게 넘겨주는 것, 그것은 당신의 우주에서 가장 장엄한 일입니다. 그런 품성을 지닌 자야말로 가장 강한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당신이 하신 말씀을 이해하고 있다면, 상황을 거부하는 대신 모든 것과 의식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겠네요. 자신을 추스리려고 애쓰기 전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벗이여, 당신이 고통을 피하려고 하면 당신은 그것을 당신에게로 끌어들이게 됩니다.



 저항하는 것은 더욱 끈질기게 달라붙습니다



. 당신은 실제로 경험해 보기 위해 드라마나 혼란, 분열, 부조화의 상태로 사물을 불러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그런 일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영혼은 고집이 매우 세며, 어떤 면에서는 나와 같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고향으로 데려 오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그 길에는 탈출구가 없습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할 테니까요.









프타아, 신념 체계에 관한 건데요. 전생으로부터 현생으로 두려움을 가져오는 건가요? 아니면 현생의 어떤 상황이 두려움을 가져오는 건가요?









양쪽 모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말씀 드려야겠군요.



 전생이 무엇인지에 대해 지나치게 연연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 두려움이 일백 생애 전에서 온 것이건, 바로 전 생애에서 온 것이든, 아니면 모든 전쟁에서 온 것이든, 현생에서 그런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다루어야만 할 것입니다. 따라서 당신이 이 생애로 무엇을 가지고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 시점에서 존재 가능한 현실들로부터 두려움을 가지고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래 생은 어떨까요? 그것도 동시에 존재하는 겁니다.



이 시공 연속체 밖에서는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당신이 다른 생애에 그토록 마음을 빼앗기면 당신은 정말 미쳐버릴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다른 생애에 관심을 갖지 말라고.



 두려움의 속 알맹이가 무엇이든 그것은 당신이 끌어들인 거라고.



 우리는 또 말합니다. 당신이 껴안고, 변형 시키고, 자기 자신과 조화를 이루면, 다른 모든 삶들도 변화 시킬 수 있다고. 그것이 바로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섹스는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섹스의 비중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말입니다. 섹스는 사실 매우 큰 슬픔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프타아, 당신이 상호 작용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는 성적인 교제를 굳이 성교와 연관시키고 있진 않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적 표현은 굳이 말하자면 관능을 포함하지만 반드시 성행위를 포함할 이유는 없습니다.



성행위를 해도 괜찮은 것과 마찬가지로 성행위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인가요?









네 물론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교류가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말하고, 접촉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가운데 실제로는 성적 교환을 한다는 뜻인가요? 우리 자신과 총체적 사랑의 관계를 갖는 것, 즉 우리 자신과 성적 관계를 갖는 것 역시 중요하고요?









그렇고말고요. 당신의 성적 본능은 당신 자신의 다른 국면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자기 자신과 충만하고 멋진 관계를 가지지 못한다면, 어떻게 성관계나 다른 멋진 관계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더 진보된 문명, 가령 플레이아데스 같은 곳은 성본능을 어떻게 다룹니까?









다른 국면과 마찬가지로 성적 표현을 하는 휴먼노이드형 인간들(인간에 가까운 우주인)은, 나날의 삶이 충만한 것처럼, 충만함 속에서 성 표현을 합니다.



 지구인들 모두가 존재의 충만함 속에 있게 된다면 그것이 모든 면에 반영되어 당신들의 성본능은 극히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숙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들 속에 성이라는 전체성 속에 존재하는 걸 막고 있는 두려움과 판단은 무엇인가요?



 어떻게 해서 성이 사람을 조종하기 위한, 권력을 잡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게 되었을까요?



어찌하여 당신들은 불안 속에서, 질투 속에서 소유욕 속에서, 죄책감 속에서, 부끄러움 속에서, 두려움 속에서 성적 교제를 하는 것일까요? 왜 진정한 즐거움이 될 수 없을까요?



다른 국면과 마찬가지로 섹스 또한 생기발랄한 것, 기쁨과 웃음을 선사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진정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자신들을 특별한 관계로 약속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성적으로 충실할 것을 맹세하는 문제에 대해 잠시 조명해 주시겠습니까?









결혼을 할 때는 서로에게 변치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이런 약속은 죄책감과 의무감인 때문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의무감이 어떻게 짐이 되는지, 어떻게 원망으로 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이미 말한 바 있습니다. 진정으로 우러나온 관계에서는 기쁨을 선사해 줍니다.



관계가 문제를 일으키는 결박이 되고 마음이 더 이상 그곳에 없을 때는 모든 면에 반영됩니다.



단지 성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하지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당신들이 성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지켜보도록 하십시오.









성을 따분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건 아닌가요? 당신의 인생이 더 이상 흥미롭지 않기 때문에 재미로 이용하는 건 아닌가요?



당신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혹은 다른 누군가의 관심이나 사랑, 사랑, 욕구를 불러일으킬 만큼 가치 있는 존재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그걸 확인하기 위해 이용하는 건 아닌가요?



그렇다면 성은 더 이상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표현이 아니라 두려움의 발로인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건 이유를 보라는 것입니다. 항상 이유를 보십시오



. 당신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에 제한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근본적인 문제들이 많지만 우린 지금 성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진실한 유대 관계가 있다면, 의무로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본래의 자아와 조화를 이루면 그땐 질투도 없고, 어느 누구도 다른 누구를 소유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무엇을, 누군가를 소유하고 싶어 할 때는 잃을까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류가 모든 것을 떨치고 달려 나가 누구하고든, 어떻게든 성을 경험해보라고 권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이 당신에게 기쁨을 주지 않고 충만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충만감을 느끼지 못하는 건 자신이 진정 누구인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하겠노라고 맹세하는 것은, 조금쯤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자기 자신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사실 당신들은 죽는 날까지도 자기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성을 통해서 당신 존재의 전체성을 느껴보세요. 남성에너지와 여성 에너지의 균형을 경험해보십시오.



우린 당신에게 당신이 하고 있는 게임을 지켜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서로에게 성적으로 성실한 것도 물론 괜찮습니다. 그것 또한 유효하며 실재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당신을 최상의 기쁨으로 데려다 주는 건 아닙니다.









맹세가 오갈 때, 뭔가 자신을 제한하는 느낌이 있다면, 그래서 바람직스럽지 않게 느낀다면, 그건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표시가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을 제한하고 있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관계의 밖을 볼 것이 아니라, 안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당신을 제한하는 것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고, 그건 바로 당신입니다.



 다른 누군가의 관계에서 압박감을 느낀다면 당신 안에 있는 그 압박감을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당신도 그런 압박감의 공동창조자이니까요. 그런 다음 압박감의 정체가 너무도 분명하고, 관계가 만족스럽지 못한다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이여,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야”, 혹은 “당신이 누구인지 보아야 할 시간이야.”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당신은 더 명료해질 수 있고, 책임을 질 수 있게 됩니다.



 바로 당신이 그런 상황을 만들었음을 알게 됩니다.



 당신 삶에 뭔가 제한을 가져오는 누군가를 창조했다면, 벗이여, 그땐 바로 당신이 얼마나 제한적인가를 보여주는 거울을 당신 삶에 끌어당긴 것임을 알도록 하십시오.



 모든 것이 명료해져서 조화를 이루게 되었을 때, 당신은 그러한 제한을 반영하는 어느 누구도 끌어들이지 않게 됩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있으며,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현재 파트너가 없는 걸까요? 아니면 앞으로 나타날 적당한 사람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걸까요?









벗이여, 앞으로 나타날 적당한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요즘엔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이 많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건 아주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당신들 모두 자신을 발견하느라 몹시 바쁘기 때문이며, 정말로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도 괜찮습니다. 파트너가 없다는 건 여러 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관계를 맺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두 번 쓴 맛을 본 사람들은 자아 탐구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다시는 남녀 관계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다시는 상처 받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파트너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느라 바쁘지만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열심히 찾아 헤매면 헤맬수록 더 발견할 수 없게 되곤 합니다.



왜냐하면 파트너가 없다는 자체가 그 사람의 내면 상태의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받아들임은 소위 여성 에너지입니다.



 당신이 깨닫기만 한다면 당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당신 앞에 펼쳐질 것이며, 아무 일을 하지 않고도 삶의 경이로움을 창조하게 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단순히 알기만 하면 당신의 성장, 당신의 기쁨, 당신의 만족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이, 한 때는 원치 않았던 배움들을 위해 요구되는 모든 것들이 때가 무르익으면 당신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우주에는 여기 이 행성에서 사는 우리들처럼 성본능을 지닌 존재나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럼요. 아주 많은 인간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섹스를 생식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에너지 교환이라는 좀더 우아한 수단을 씁니다. 그리고 벗이여, 두 사람의 섹스라는 것은 섹스가 무엇이든, 에너지 교환이라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당신이 창조한 에너지의 빛을 볼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어떠할 지를 상상해 보십시오.



 반드시 섹스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고 당신이 엄청난 분노에 처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감정이 움직이는 곳에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불꽃놀이가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오라 말입니까?









네. 하지만 벗이여, 당신이 오라에 대해 생각할 때에는 당신 주변의 부드러운 빛만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로켓이 발사될 때 나오는 것 같은 장엄한 스파크를 말하는 겁니다.



다중 우주의 다른 부분들에는 다른 종족의 인간들이 살고 있습니다.



정상적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당신네 행성 안에도 다른 종의 인간들이 살고 있습니다. 소위 지구 내부에 살고 있는 위대한 인간 종족 말입니다. 그건 다른 시공 연속체이며 다른 차원의 현실입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지요. 에테르체로 살고 있나요?









우린 그저 지구 내부의 사람들이 당신네 현실과 같은 이런 차원에 속해 있지 않다고만 말한 겁니다.



 하지만 그들의 현실 차원도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에테르 상태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에테르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좀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위대하고 경이로운 문명입니다. 인류 역사보다 오래된, 훨씬 오래된 문명이죠.



 당신네 행성의 선사시대와 비교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네 시간의 역사와 비교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위대한 문명은 기술이 매우 진보되었으며,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항상 별나라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해왔습니다.



 그들은 다른 세계의 인간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은하계에서 은하계로 여행을 다니고 있습니다. 차원들 안을 여행하고 있습니다.



 현실의 차원에 대해 생각을 할 때면 여러분은 수직적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자신들을 3차원의 형편없고 낮은 인류, 밑바닥쯤으로 생각하죠. 그렇지 않나요? (청중들 동의한다)









사실, 이것은 자신을 가치 없게 여기는 문제와 통합니다.



다른 조화로운 주파수도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유효한 현실, 물리적 현실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높은 진동’이라고 말할 때는 그들이 더 높은 단계라는 뜻이 아닙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기술적으로 더 많이 알고 있는 존재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인류, 우주, 빛이 어떻게 작용하는 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더 많이 아는 겁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당신들보다 더 위대한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이여, 진실로 분리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신성의 표현입니다. 양상이 다를 뿐입니다.









난초, 데이지, 장미 중에 어떤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더 좋아하는 꽃이 있을 수가 있겠지요.



 난초가 잡초처럼 많이 자라는 곳에서는 아마도 장미를 더 좋아하겠죠.



 그리고 유럽대륙처럼 난초가 귀한 곳에서는 장미보다는 난초가 특별한 꽃이 되겠지요.



하지만 모두 다 신성의 표현입니다. 근원, 즉 만유의 에너지 안에서는 판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프타아, 이렇게 다른 시공 연속체를 방문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벗이여, 진정 여러 갈래 길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당신도 자주 그 길을 오갑니다.



 의식으로는 기억하지 못할 뿐입니다. 의식을 지닌 채 그들을 방문하는 것은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벗이여, 우리가 당신들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류의 의식이 확장됨에 따라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에 대해 좀더 많이 알게 될수록,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더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껴안을수록 당신들은 이 시대 당신네 행성 전체의 공명을 진실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다중 우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른 변화들, 우리가 전에 얘기했던 은하계적 변화, 주기적 변화들과 조화를 이룰 수가 있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날 때, 당신들은 당신들의 의식 속으로 여행하게 될 겁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당신네 개념과는 다른 방식의 체험을 하게 될 겁니다. 우주를 여행하고 은하계를 여행할 겁니다.









가능할 거라고 여겨집니다. 내면에서. 그러나 아주 아득히 멀게만 느껴집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그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당신이 아직 의식적으로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그건 마치 난생처음으로 서커스에 가기로 한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아이는 날짜를 손꼽으며 기다립니다. 서커스가 흥미진진하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보진 못했지만 들어서 알고 있으니까요. 아이는 솔직히 서커스가 어떤 느낌을 줄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흥분과 기대 속에서 하루하루가 지루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여, 한편으로는 시간이 얼마나 빨리 가는 줄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날이 멀게만 느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서커스가 과연 올 것인지 의구심을 품은 채 서커스가 오기를 갈망하고 있는 징조입니다. 조바심을 내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갈망을 품는 것이 그런 일을 앞당기게 될까요?









벗이여, 모든 일에는 적당한 때가 있는 법입니다. 당신이 재촉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까요. 그건 그 자체의 타이밍을 갖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저 허용하기만 하라?









진실로 그렇습니다.









프타아, 우리가 기쁨 속에 있고, 가슴에서 우러나와 행동한다면 혹시 걸릴지도 모르는 성병에 대한 두려움은 갖지 않아도 되나요?









우리는 특히 에이즈에 대해 애기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 시대의 가장 큰 두려움 증 하나이니까요.



 거기에는 아주 다양한 측면이 있습니다. 당신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으로 나아가 경이로운 공명 속에 있다 할지라도 항상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는 믿음, 그 믿음의 핵심을 이해해야 합니다.



죄책감이 없다면, 무가치하다는 느낌이 없다면, 진실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라면, 벗이여, 도대체 어떻게 병이 생길 수 있겠습니까?



전에도 말씀드린 바 있지만 또 다른 견지에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당신네 행성의 어린이들, 태아 단계에서든, 유아기 때든, 피를 경로로 하여 이런 질병에 감염된 경우를 보면 당신들은 이렇게 말하겠죠.









“저 아이들은 죄가 없다”라고.. 벗이여, 당신들은 그 경험을 위해 수많은 생애를 거쳐 이 행성에 왔음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돌에 새겨진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의 믿음에 따라 모든 걸 바꿀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지구본을 가리키며) 저것이 진짜 형상이 아니라는 걸 아세요? 저건 잘못된 모양입니다. 당신네 지구는 오렌지처럼 둥글지 않아요.









프타아, 당신과의 이 시간을 통해, 저는 진실로 우리 모두의 하나됨을 느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이 피라미드 에너지와 같은 역할을 해주셔서 우리가 배워야만 할 주제에 대해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우리를 매우 도와주시고 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감사합니다.









벗이여, 그렇다니 기쁘군요. 당신이 마음으로 그렇게 느꼈다면 어떤 의미에서 당신은 이 에너지를 연결 통로로 사용한 겁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 자신의 확신을 위해, 무슨 질문이든 하십시오.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니까요. 당신이 이 코스에 참가한 모두에게 그런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다면. 진실로 이 에너지를 사용하여 그렇게 된다면, 사뭇 놀라운 일을 창조하게 될 겁니다.









며칠 전 시골길을 산책하다가 당신이 육체의 눈을 통해 볼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을 어떻게 볼지 궁금했습니다. 전혀 짐작할 수 없더군요. 나는 그 정원의 아름다움을 당신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몇 차례 이런 경험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런 식으로 당신과 뭔가를 함께 나눈 건가요?









그럼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벗이여, 당신이 그 에너지를 부르면 거기에 그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정말 잘 알고 있군요.









프타아, 성과 관능에 대해서 말인데요. 우리의 자녀들에게 느낌의 자유를 누리라고 어떻게 교육할 수 있을까요? 우리 자신은 여전히 한계에 갇혀 싸우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부모를 가르치는 사람은 어쩌면 아이들일지도 모릅니다. 받아들이세요. 그게 전부입니다.



사랑하고 허용하세요. 자녀들에게 자연스런 표현을 허용하면 그들은 당신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줄지도 모릅니다. 단지 성에 대한 것뿐만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매우 성적인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놀라운 것들을 많이 가르쳐줄 겁니다. 앞으로 몇 년 내에는 더욱 더 그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즈음 태어나는 아이들은 상당수가 인류의 변화를 도와주기 위해 왔기 때문입니다.









프타아, 앞으로 일어날 변화의 시기에도 성 본능은 여전히 같은가요? 아니면 그런 변화와 더불어 진보하나요?









변할 겁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모든 표현이 변하게 됩니다.









그래요? 그 변화란 4차원으로의 변화가 맞는가요?









벗이여, 무어라 불리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4차원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죠. 어떤 이들은 5차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지금 이 차원 외의 것을 알지 못하는 한, 거기에 어떤 이름이 주어지든 그건 중요치 않습니다. 이름에 집착하지 말아요.



프타아, 신념체계에 관해서인데, 어떤 신념은 우리 인간 사회에 아주 깊이 뿌리 내린 것처럼 여겨집니다. 이제 우리가 진실로 어떤 신념을 바꾸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벗이여, 무엇보다 신념의 정체부터 밝혀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에게 있어 가장 문제가 되는 신념은 당신이 그런 신념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런 신념들이기 때문입니다



. “나는 정부 관리들이 전부 바보라고 믿어!” “나는 하늘이 파랗다고 믿어.” 라고 말할 때는 신념을 규명하기가 매우 간단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상황들은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그때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합니다.



 이런 반응의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는 거지? 밑바닥에 있는 두려움이 무엇이지? 이런 식으로 당신은 자신의 신념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 신념을 붙들고 있었는지조차 잘 모르는 경우가 많으니, 발전할 것들이 적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지적으로 그런 신념들을 안다고 해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부모나 사회를 토양으로 자란 신념들은 당신을 힘겹게 하는 짐과 같아서, 당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일단 신념이 밝혀지고 나면 간단합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내가 들고 다니던 이 신념은 이제 쓸모가 없어” 그 신념을 껴안음으로써 당신은 변화를 창조하게 됩니다.



 지적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변화가 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념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첫걸음은 내딛은 셈입니다.



 신념을 알아차렸을 때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런, 그런 미친 짓이야!” 그렇게 되면 당신은 앎에 이르고, 모든 걸 인정하며 껴안게 됩니다.



 ‘이걸 믿는 것도 괜찮아, 하지만 이젠 껴안을 시간이야.” 그러면 매우 부드럽게 변화가 일어나도록 허용하게 됩니다.



사회구조 때문에 생겨난 잘못된 신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되면 당신은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당신을 가치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신념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신념 체계는 매우 간단한 겁니다.



당신의 밑바닥에 있는 두려움과 딱 들어맞는 신념이 있으면 신념은 거기에 고리를 걸어 그곳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러면 당신은 의식적 마음으로 신념을 정당화시키게 되는 겁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재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군요.









매우 좋습니다. 이 점에 대해 좀더 얘기하기를 원하는 분 있으세요? 모두 이해하셨습니까? 좋습니다. 어떤 감정적 상황에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경우를 살펴봅시다.



섹스 얘기를 하던 중이니 거기에 대해 말해봅시다.



당신이 막 집에 돌아와 보니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시다. 몹시 화가 나서 파이를 집어 던지고 밖을 나와서 차를 타고 어머니에게로 달려갑니다. 자, 어머니가 말하겠죠. “뭐 그런 자식이 다 있어?” 그러면 당신이 말합니다. ‘



그래요. 하지만 전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말았어요. 파이 접시를 집어 던지고 소리를 질렀거든요.” ‘하지만 그건 너무 정당한 일이었어. 만일 내가 그런 경우를 당했다면 파이접시로 그 녀석 머리를 후려쳤을 거야!” 그러면 당신도 위안이 될 것이고, 당신 친구들도 이렇게 말할 겁니다. “오 맙소사! 야비한 자식 같으니라고”









하지만 벗들이여, 우리가 말하고 싶은 건 그 밑바닥에 있는 절망과 배신감입니다.



 두려움, 충분치 않다는 두려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섰다는 절망과 배신감 말입니다.



그건 질투요. 충분치 않다는 두려움입니다. 그건 소유욕이고 소유하지 못했다는 두려움입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자신의 반응이 사회구조와 들어맞게 되면 사람들은 흔히 그 신념 속으로 들어가 볼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



 당신이 만약 그 두려움을 당장에 변형시킨다면 그런 상황을 다시는 겪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니 벗이여, 항상 기억하십시오. 사랑이 아닌 것은 모두 두려움의 표현인 것을! 그리고 두려움은 얼마든지 변형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 무엇인지 지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세요. “이것이 내가 느끼는 방식이야, 나는 고통을 당하고 있어. 하지만 내가 책임을 지겠어. 내가 판단한 것이라는 걸 인정하겠어. 이젠 머리 따위는 겨드랑이 아래에 집어 넣어버리고 있는 그대로를 느낄 거야!”









하지만 당신은 지적 존재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우주 가운데 질서가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그 모든 것이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의식으로 알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우리가 말하는 이 모든 얘기가 아주 간단하게 압축될 수 있음을 진정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얘기 중에 당신이 알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신은 진실로 그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고픈 말은 이것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이 다 신성의 표현이니, 고통에 빠졌을 때는 그 느낌을 느끼라는 겁니다.









느낌을 느끼라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좀더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인류는 느낌이 무엇인지, 실은 잘 모릅니다.



 고통은 느낌이 아닙니다. 느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저항입니다.



당신이 기쁨 속에 있을 때, 그것이 느낌입니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자면 그렇습니다.



 판단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그저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에게 항복하는 거죠. 그러면 저절로 하나됨을, 균형을 창조하게 됩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잘 못하시는군요.



 고통은 판단에 의해 생기는데 당신은 그 판단을 판단합니다. 다른 건 말할 것도 없고요.



당신이 판단 속에 있는 한, 고통이 있을 겁니다.



우린 당신 삶의 특정한 상황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고통이라는 저항을 해방시키려면 판단을 물리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바는‘예스’하며 받아들이라는 겁니까? 저 사람이 잘못되었다고 판단되었을 때, 그들을 그렇게 판단하는 것도 괜찮다고요? 그러면 어디쯤에서 사람들이 잘못됐다고 판단하는 것을 그쳐야 하는 거죠?









사랑하는 이여, 우리가 말하는 바는, 판단이란 것을 잘못된 것으로 여기면 결코 그것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저항하는 것이 무엇이든,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것이 무엇이든, 떨쳐버리려는 것이 무엇이든, 우주는 아무 판단 없이 당신이 힘을 부여하고 있는 그것을 되 안겨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겁니다.









“나는 변화를 원해.



나 자신에 대한, 상황에 대한,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판단은 나름대로 유효해. 그건 내 존재의 일부분이고, 내 존재는 신성의 표현이니까.



 하지만 난 이제 변화를 원해.”



그러고는 사랑으로, 자비심으로, 판단을 자기 자신에게로 모으는 겁니다.



 그런 방식으로 판단은 하나가 되고, 고통이라는 저항의 발톱이 떨어져 나가며, 에너지 차크라가 열리고, 그 느낌은 가슴을 지나 기쁨의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다소 분명해졌습니까?



당신의 삶 속에서, 당신이 무엇과 하나가 되고 싶건, 그것은 곧 균형을 이루는 길에 다름 아닙니다. 중도를 지키는 거죠.



 당신은 심한 고통을 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고통을 분노나 눈물이나 화로 표현할지 모릅니다. 어떤 식으로도 고통을 표현하지 않고 모두 억눌러 버릴지 모르죠.



 균형이란 그러한 당신을 판단과 하나가 되게 하는 겁니다. 이해하시겠어요? 그러면 당신은 변화를 창조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는 그들이 어떤 길을 가든 판단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거죠? 네 좀더 분명해졌습니다.









다른 사람의 여행길은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도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죠.



 당신이 상관할 일은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당신이 사랑과 자비에 이르고, 자기 자신의 신성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되면, 어떻게 모든 사람들과도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방금 전에 말씀하신 것에 대해선 데요, 전 이 하나됨을 이루려고 시도를 해왔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것에 부합되는지 분명히 알고 싶습니다.



저는 이곳(여인이 가슴 중앙부위를 가리킨다)을 이용하여 그 당시 불일치를 가져오는 어떤 감정에 대해서든, 그 느낌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상황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느낌 속으로 들어갔더니, 마음속의 영상이 내가 느끼기를 원하는 긍정적인 영상으로 바뀌었습니다.









벗이여, 그건 매우 유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변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변형이란 ‘무엇인가를 하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걸 ‘할’ 수 없습니다. 그저 그것이 일어나도록 허용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건 시간낭비라는 건가요?









벗이여, 시간낭비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마음에 긍정적인 영상이 그려졌다면 놀라운 일이지요. 당신은 분명 안도감을 느꼈을 겁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건, 변화를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껴안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당신은 당신이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에 힘을 부여하게 됩니다.



다시 한번 말하죠. 우주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습니다. 옳은 것도 없고 그른 것도 없습니다.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니 변화를 창조하고 싶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이 원하는 바를 마음속에 그리십시오. 현실을 창조하는 것은 언제나 생각이니까요.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근본적인 수준에서 얘기하고 있고, 변형이란 근본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이니까요.



 자, 당신은 변형에 대한 토의를 하려고 여기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린 지금 토의할 생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임을 끝낼 시간이니까요



. 그리고 우리는 변형에 대해서는 다시 언급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논의들은 원고 작성을 위해 순서가 잡혀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린 제한을 받고 있는 셈이지요.









하지만 당신은 그것에 대해 얘기를 들을 수도 있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당신이 거기에 대해 알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지만 염려하지 마세요. 여기 있는 어느 누구도 거기에 대해 실제로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변하게 될 겁니다. 여러분 모두 거기에 대해 알게 될 겁니다.



여러분 모두 각자의 가슴 속에서 깨닫게 되는 거죠. 꽃을 피우고 그 연꽃 안에서 보석을 창조하는 겁니다.



 그 보석이란 자신의 신성을 진정으로 아는 것이요, 자기가 곧 신임을 아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당신이 존재해야 할 방식이죠.









모두 가슴에 단단히 새기셨나요? 여러분 모두가 지금 당장 자신들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기를, 자신들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알 수 있게 되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 벗들이여, 우리의 사랑과 감사를 여러분께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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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마음님의 댓글

no_profile 아름다운 마음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3.♡.182.16,

  가슴이 노래 부르게 하라는 더이상 복사를 해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배움터 사랑터에 들리셔서 나머지 글들을 읽을 수 밖에 없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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