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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라마나 마하르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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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아름다운 마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8.♡.225.187), 작성일 08-06-23 23:27, 조회 4,821, 댓글 0

본문


1. 나는 누구입니까?



 



일곱 가지 기질로 이루어진 이 거친 몸은 내가 아닙니다. 



소리를 듣고, 감촉을 느끼고, 색을 보고, 맛을 느끼고, 냄새를 맡는,



다섯 가지 지식 기관은 내가 아닙니다.



말을 하고, 움직이고, 붙잡고, 배설하고, 생식하는



다섯 가지 행위 기관은 내가 아닙니다.



호흡 등의 다섯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 쁘라나 등



다섯 가지 생명 기운은 내가 아닙니다.



생각하는 마음조차도 내가 아닙니다.



대상에 대한 잔류 인상만 지니고 있을 뿐,



아무런 대상도 아무런 기능도 없는 무지 또한 내가 아닙니다.



 



2. 이것이 다 내가 아니라면, 나는 누구입니까?



 



앞에서 말한 것들을 모두 ‘이것도 아니다’라고 부정한 뒤에



단 하나 남는, ‘나는 존재한다’(I am) 하는 자각(Awareness)입니다.



 



3. 그 자각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 자각의 본질은 존재-의식-지복입니다.



 



4. 언제 진아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보이는 대상인 이 세계가 사라졌을 때, 보는 자인 진아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5. 세계가 (실재한다고 여겨져) 눈앞에 존재하는 동안에도



  진아를 깨달을 수는 없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6. 왜 그렇습니까?



 



보는 자(진아)와 보이는 대상(세계)은 밧줄과 뱀의 경우와 같습니다.



환인 뱀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바탕인 밧줄에 대한 앎이 일어날 수 없듯이,



세계가 실재한다는 믿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바탕인 진아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7. 보이는 대상인 세계는 언제 사라집니까?



 



모든 인식과 모든 행위의 원인인 마음이 가라앉을 때, 세계는 사라집니다.



 



8. 마음의 본질(swarupa)은 무엇입니까?



 



‘마음’이라는 것은 진아 안에 자리잡고 있는



하나의 불가사의한 힘입니다.



그것이 모든 생각을 일으킵니다.



생각과 별개인 마음 같은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생각이 곧 마음의 본질입니다.



생각과 별개의 독립된 실체로서의 세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깊은 잠 속에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고,



따라서 세계도 없습니다.



생시와 꿈의 상태에서는 생각들이 있고, 따라서 세계도 있습니다.



거미가 몸 밖으로 거미줄을 뽑아냈다가



다시 몸 안으로 거두어들이듯이,



마음도 자신의 밖으로 세계를 투사했다가



그것을 다시 자신의 안으로 흡수합니다.



마음이 진아 밖으로 나올 때 세계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세계가 (실재하는 것으로) 보일 때 진아는 나타나지 않고,



진아가 나타날 때(빛날 때) 세계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본질을 끈질기게 탐구해 들어가면



마음은 진아만 남겨놓고 소멸됩니다.



여기서 진아라는 것은 바로 아뜨만(atman)입니다.



마음은 항상 어떤 거친 것(육체, 세계 따위)에 의존해서만 존재하며,



홀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미묘한 몸이나 영혼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 마음입니다.



 



9. 마음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탐구의 길은 무엇입니까?



 



이 육체 안에서 ‘나’라는 것으로서 일어나는 것이 마음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나’라고 하는 생각이



몸 안의 어디서 처음 일어나는지를 탐구하면,



그것이 심장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나’, ‘나’를 생각하기만 해도



우리는 그곳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들 중에서



‘나’라는 생각(‘I’-thought)이 첫 번째 생각입니다.



다른 생각들은 이 ‘나’라는 생각이 일어난 뒤에야 일어납니다.



1인칭 대명사가 나타난 뒤에야 2인칭, 3인칭 대명사가 나타납니다.



1인칭 대명사 없이는 2인칭, 3인칭 대명사도 있을 수 없습니다.



 



10. 어떻게 하면 마음이 가라앉습니까?



 



 ‘나는 누구인가?’ 하는 탐구에 의해서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생각은 다른 모든 생각들을 소멸시킨 뒤에,



화장터의 장작불을 쑤시는 막대기처럼 마지막에는 그 자체도 소멸됩니다.



이때 거기서 진아 깨달음(Self-realization)이 일어납니다.



 



11. ‘나는 누구인가?’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착파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다른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을 따라가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 하고 물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생각이 일어나도 상관없습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 하고 꾸준히 물어야 합니다.



이때 나오는 답은 ‘나에게’일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나는 누구인가?’ 하고 탐구해 들어가면,



마음은 그 근원으로 돌아가고 일어났던 생각은 가라앉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수행해 나가면 마음은



그 근원에 머무르는 법을 스스로 익히게 됩니다.



이 미묘한 마음이라는 것이



두뇌와 감각 기관을 통해 밖으로 나갈 때,



거친 이름과 형상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것이 심장 안에 머무르면,



이름과 형상들은 사라집니다.



마음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심장 안에 붙들어 두는 것이 ‘안으로 향하기’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심장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것은 ‘밖으로 향하기’ 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마음이 심장 안에 머무르면,



모든 생각들의 원천인 ‘나’가 사라지고



항상 존재하는 진아가 빛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 ‘나’라는 에고성 없이 그것을 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식으로 행위하면



일체가 쉬바[신]의 성품으로서 나타날 것입니다.



 



12. 마음을 가라앉히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탐구 외에는 마땅한 방법이 없습니다. 다



른 방법으로 마음을 다스리려고 해보면,



마음이 다스려진 듯하다가도 다시 일어납니다.



호흡 제어를 통해서도 마음은 가라앉지만,



그것은 호흡이 제어되는 동안만 그러할 뿐입니다.



호흡을 되돌려 놓으면 마음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여,



잔류 인상(원습)들이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헤매게 됩니다.



마음과 호흡은 근원이 같습니다.



사실 생각이 마음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나’라는 생각이 마음이 일으키는 최초의 생각인데,



이것이 에고성입니다.



에고성이 시작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호흡도 시작됩니다.



따라서 마음이 가라앉으면 호흡이 제어되고,



호흡이 제어되면 마음도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깊은 잠을 잘 때에는 마음이 가라앉아도 호흡은 멈추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때에도 육체가 유지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 육체가 죽었다고



오인하지 않도록 하려는 신의 의지에 따른 것입니다.



생시와 삼매의 상태에서는 마음이 가라앉으면 호흡이 제어됩니다.



호흡은 거친 형태의 마음입니다.



마음은 죽음의 순간까지 육체 안에서 호흡을 유지하다가,



육체가 죽으면 떠나면서 호흡을 가지고 가 버립니다.



따라서 호흡 제어의 수련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방편일 뿐,



 마음을 사라지게하지는 못합니다.



호흡 제어의 수행과 마찬가지로,



신의 형상에 대한 명상이나 진언의 암송,



음식의 절제 등은 모두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한 방편일 뿐입니다.



신의 형상에 대한 명상이나 진언의 염송을 통해서 마음은 일념으로 집중됩니다.



마음이란 항상 헤매기 마련입니다.



코끼리의 코에 사슬을 하나 쥐어 주면



그것을 코로 집느라고 코끼리가 딴 짓을 하지 않듯이,



마음도 하나의 이름이나 형상에 몰두하면 그것 하나만 붙들게 됩니다.



마음이 무수한 생각들로 분산되면



하나 하나의 생각은 그 힘이 약해지지만,



생각들이 해소되면 마음은 일념이 되어 강해집니다.



이러한 마음이 되면 자기탐구가 쉬워집니다.



절제하는 규칙 중에서는,



순수성 식품을 적당량 섭취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이 규칙을 지키면 마음의 순수성이 증장되며,



그것은 자기탐구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13. 대상에 대한 잔류 인상[생각]들이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끝없이 일어납니다.



    이 모든 생각들은 언제나 없어지겠습니까?



 



진아에 대한 명상이 점점 더 높아질수록, 그 생각들은 소멸될 것입니다.



 



14. 말하자면 시작도 없는 옛적부터 계속되어 온 이 대상에 대한 잔류 인상들이



    모두 해소되고, 우리가 순수한 진아로 남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합니까?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을까’를 따지지 말고



진아에 대한 명상을 끈덕지게 붙들고 나가야 합니다.



설사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 나는 죄인이다.



이런 내가 어떻게 구원받겠는가?’



하면서 걱정하고 비통해 하면 안됩니다.



‘나는 죄인이다’ 하는 생각을 완전히 놓아 버리고



진아에 대한 명상에 예리하게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두 가지 마음, 즉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오직 하나입니다.



두 가지로 나뉘는 것은 잔류 인상들입니다.



즉 좋은 인상들과 나쁜 인상들이 그것입니다.



마음이 좋은 인상들의 영향하에 있을 때에는 선이라 하고,



나쁜 인상들의 영향하에 있을 때에는 악이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속적인 대상이나 다른 사람들이 관심 갖는



그런 문제에 쏠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나쁘다 해도



그들에게 증오심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세속적) 욕망과 증오심은 둘 다 피해야 합니다.



자기가 남들에게 주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주는 것입니다.



만약 이 진리를 이해한다면 누가 남에게 베풀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자아(self-에고)가 일어나면 모든 것이 일어나고,



자아가 가라앉으면 모든 것이 가라앉습니다.



우리가 겸허하게 처신하면 하는 만큼 좋은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마음이 가라앉고 나면 우리는 어디에서도 살 수 있습니다.



 



15. 탐구는 얼마나 오랫동안 수행해야 합니까?



 



마음속에 대상에 대한 인상들이 남아 있는 한,



‘나는 누구인가?’ 하는 탐구가 필요합니다.



생각들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 일어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이 탐구를 통해 그것을 소멸시켜야 합니다.



진아를 얻을 때까지 끊임없이



진아에 대한 내관을 밀고 나가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요새 안에 적이 남아 있는 한 그들은 계속 공격해 오겠지만,



그들이 나타나는 족족 없애 버리면 요새는



결국 우리의 수중에 떨어질 것입니다. 



 



16. 진아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진아뿐입니다.



세계, 개인적 영혼 그리고 신은, 마치 진주모(mother-of-pearl)의 은과 같이,



 진아 안에서 나타나는 겉모습들입니다.



이 셋은 동시에 나타났다가 동시에 사라집니다.



진아는 ‘나’라는 생각이 전혀 없는 바로 그곳입니다.



그것을 침묵이라고 합니다.



진아 자체가 세계이고, 진아 자체가 ‘나’이며, 진아 자체가 신입니다.



일체가 쉬바이고, 진아인 것입니다.



 



17. 일체 만물은 신의 작품 아닙니까?



 



아무런 욕망도, 의지도 노력도 없이 태양은 떠오르는데,



단지 태양이 떠 있기만 해도, 일장석(sunstone)은 화기를 뿜어내고,



연꽃은 개화하며, 물은 증발하고,



사람들은 제각기 할 일을 하고 나서 휴식합니다.



자석 앞에서 바늘이 움직이듯이,



세 가지 (우주적) 작용 또는



다섯 가지 신의 활동에 의해 지배되는 영혼들은



그들 각자의 업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하고 휴식합니다.



신은 아무런 의지도 없으며, 아무런 업도 그에게 붙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상 만물의 활동이 태양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과 같고,



다른 4대 원소들의 성질이



일체에 두루한 에테르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18. 헌신자들 중에서 어떤 사람이 가장 훌륭한 헌신자입니까?



 



신, 곧 진아에게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맡기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헌신자입니다.



신에게 자기 자신을 맡긴다는 것은,



진아에 대한 생각 외에는 어떤 생각도 일어날 틈을 주지 않고



진아 안에 끊임없이 머무른다는 뜻입니다.



신에게 어떤 짐을 맡겨도 그는 그 짐을 져 줍니다.



신의 지고한 힘이 일체를 움직이게 하고 있는데,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 힘에 맡기지 못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혹은 무엇을 어떻게 하지 말아야 하나 하는



온갖 생각들로 고민해야 합니까?



우리는 기차가 짐을 다 운반해 준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기차를 타고서도 왜 짐을 기차 안에 내려놓고 편히 쉬지 않고,



불편하게 그것을 머리에 이고 있어야 합니까?



 



19. 어떤 것이 무집착입니까?



 



생각이 일어날 때, 바로 그 일어난 자리에서



그것을 아무런 찌꺼기(마음의 미련)도 없이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 무집착입니다.



진주를 캐는 사람이 허리에 돌을 달고



바다 밑바닥으로 내려가 거기서 진주를 캐내듯이,



우리도 각자 무집착을 갖추고 자신의 내면으로 뛰어들어



진아라는 진주를 캐내야 합니다.



 



20. 신이나 스승이 개인으로 하여금 해탈을 얻도록 해줄 수 없습니까?



 



신과 스승은 해탈에 이르는 길을 보여줄 뿐이지,



그들이 직접 개인에게 해탈의 상태를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사실 신과 스승은 다르지 않습니다.



호랑이의 입안에 떨어진 먹이가 도망칠 수 없듯이,



스승의 자비로운 눈길의 범위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스승에 의해 구원받을 것이며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 자신의 노력으로 신이나



스승이 제시한 길을 따라가서 해탈을 얻어야 합니다.



자신의 지의 눈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알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라마(Rama)라는 사람이 자기가 라마인 것을



알기 위해 거울을 들여다보아야 합니까?



 



21. 해탈을 열망하는 사람은 범주들의 본질을 탐구해야 합니까?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사람이 쓰레기를 낱낱이 살펴보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할 필요가 없듯이,



진아를 알려고 하는 사람은 범주들의 개수를 헤아리거나



그것들의 특성을 탐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진아를 숨기는 범주들을



모조리 내버리는 것입니다.



세계는 하나의 꿈과 같이 보아야 합니다.



 



22. 생시와 꿈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까?



 



생시는 길고 꿈은 짧습니다.



그 외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생시에 일어나는 일들이 생시에는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듯이,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꿈속에서는 역시 그러합니다.



꿈속에서는 마음이 다른 몸을 갖습니다.



생시의 상태에서나 꿈의 상태에서나,



생각과 이름과 형상들이 동시에 나타납니다.



 



23. 해탈을 갈망하는 사람이 책을 읽는 것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모든 경전들은 해탈을 얻으려면 마음을 가라앉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 결론적인 가르침은 마음이 가라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나면 끝도 없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오로지 무엇이 진아인지를 자신의 내면에서 탐구해야 하는데,



이러한 탐구가 어찌 책을 통해서 가능하겠습니까?



누구나 자기의 지혜의 눈으로 자신의 진아를 알아야 합니다.



진아는 다섯 껍질의 안에 있지만,



책은 그것들의 밖에 있습니다.



진아는 다섯 껍질을 내버리고 탐구해야 하는 것이므로,



책 속에서 그것을 찾는다는 것은 헛된 일입니다.



자신이 (책에서) 배운 것을 다 잊어 버려야 할 때가 올 것입니다.



 



24.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행복은 바로 진아의 성품입니다.



행복과 진아는 다르지 않습니다.



세계의 어떤 대상 안에도 행복은 없습니다.



우리는 무지로 인해 우리가 어떤 대상으로부터 행복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밖으로 나가면 불행을 경험합니다.



사실 마음의 욕망이 충족될 때에도,



그것은 마음이 자기의 자리(근원)로 돌아가서



진아인 행복을 즐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깊은) 잠, 삼매, 기절 등의 상태에서나,



마음이 바라는 대상이 얻어졌거나 싫어하는 대상이 없어졌을 때,



 마음은 안으로 향해져서 순수한 진아-행복을 즐깁니다.



이처럼 마음은 진아 밖으로 나왔다가 안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하면서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나무 그늘 아래는 쾌적하고 그늘 밖은 열기가 뜨겁습니다.



뙤약볕 아래에 있던 사람이 그늘로 들어오면 시원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늘 밑을 계속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내내 그늘 아래서 머무릅니다.



마찬가지로, 진리를 아는 사람의 마음은 브라만을 떠나지 않습니다.



이와 반대로 무지한 사람의 마음은



세계 안을 맴돌면서 불행을 느끼는데,



어쩌다 잠시 브라만으로 돌아오면 행복을 경험합니다.



사실 세계라고 하는 것은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계가 사라질 때, 즉 아무런 생각이 없을 때



마음은 행복을 경험하며,



세계가 나타날 때는 불행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25. 무엇이 지견[지혜 안목]입니까?



 



‘고요히 있음’이 지견입니다.



고요히 있다는 것은 마음을 진아 안에 합일시키는 것입니다.



텔레파시나 과거, 현재 또는 미래의 일들을 아는 것,



그리고 투시력 같은 것은 지견에 들지 않습니다.



 



26. 무욕과 지혜의 관계는 어떤 것입니까?



 



무욕이 지혜입니다. 그 둘은 다르지 않고 똑같습니다.



무욕이란 마음이 어떤 대상으로도 쏠리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혜란 (마음에) 어떤 대상도 나타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달리 말해서, 진아 아닌 것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 무집착 또는 무욕이며,



진아를 떠나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27. 탐구와 명상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마음을 진아 안에 붙들어 두는 것이 탐구입니다.



명상은 자기 자신을 브라만,



즉 존재-의식-지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28. 해탈이란 무엇입니까?



 



속박되어 있는 자기 자신의 성품을 탐구하여



자신의 참된 성품을 깨닫는 것이 해탈입니다.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7-17 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