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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 하나의 장애 --마하라지어록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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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아름다운 마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3.♡.178.226), 작성일 08-06-26 16:26, 조회 4,741, 댓글 0

본문


질문자:



        제가 보기에는 세상은 하나의 요가 학교이고 삶 자체가 요가 수행입니다.



        누구나 완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노력 말고 무엇이 요가이겠습니까.



        소위 '보통' 사람들과 그들의 '보통' 삶에 대해 괄시할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요기만큼이나 힘들게 노력하면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의 참된 목적을 의식하지 못할 뿐입니다.



마하라지:



        그대가 말하는 보통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요기입니까?



 



 



 



질문자: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동일합니다.



        요기가 포기에 의해서 확보하는 것을 보통 사람은 경험(향유)을 통해서 깨닫습니다.



        향유의 길은 무의식적이며, 따라서 수차 되풀이해야 하고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한편 요가의 길은 의도적이고 강렬하며, 따라서 더 빠를 수 있습니다.



마하라지:



        아마 요가의 시기와 향유의 시기가 번갈아들겠지요.



        먼저 향유자였다가 나중에 요기가 되고,



        다시 향유자가 되었다가 또다시 요기가 됩니다.



 



 



 



질문자: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마하라지:



        약한 욕망들은 성찰과 명상에 의해 제거될 수 있지만,



        강하고 뿌리 깊은 욕망들은 충족될 수밖에 없어,



        달거나 쓴 그 열매를 맛보게 됩니다.



 



 



 



질문자:



        그러면 왜 우리는 요기들에게는



        공양을 올리면서 향유자들은 얕잡아보면서 말합니까?



        모두가 어떤 의미에서는 요기인데요.



마하라지:



        인간의 가치 척도상 의도적인 노력은 찬양할 만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실제로는 요기와 향유자 둘 다 환경과 기회에 따라



        자기 나름의 본성을 따르고 있습니다.



        요기의 삶은 단 하나의 욕망, 즉 진리를 발견하겠다는 욕망의 의해 지배됩니다.



        향유자는 많은 스승들에게 봉사합니다.



        그러나 향유자가 요기가 되고 요기도 향유와의 싸움 속에서 원숙해집니다.



        최종 결과는 동일합니다.



 



 



 



질문자:



        붓다는 깨달음, 의식 안에서의 완전한 역전과 변환 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을 듣는 것이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희소식은 산더미 같은 솜에 당긴 불꽃에 비유됩니다.



        천천히 그러나 가차 없이 솜더미 전체가 타서 재가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깨달음에 대한 희소식은 조만간 어떤 변환을 가져올 것입니다.



마하라지:



        그렇지요.



        먼저 청문을 하고, 그 다음에 기억을 하고, 성찰을 하는 식입니다.



        우리는 친숙한 토대 위에 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람은 요기가 되고,



        그 외의 사람들은 향유의 삶을 계속합니다.



 



 



 



질문자:



        그러나 당신께서는 사람이 산다는 것, 그저 태어나서 죽고,



        죽으면 또 태어나는 세간의 단조로운 삶을 그냥 사는 것도,



        그 순전한 양에 의해 사람을 진보시킨다는 데 동의하십니다.



        마치 강이 순전히 자기가 끌어 모으는 물의 양에 의해 바다로 향해 가듯이 말입니다.



마하라지:



        세계가 있기 전에 의식이 있었습니다.



        의식 안에서 세계가 생겨나고, 의식 안에서 그것이 지속되며,



        순수한 의식 속으로 그것이 해소됩니다.



        만물의 뿌리에는 '내가 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세계가 있다' 하는 마음의 상태는 ('내가 있다'에 비해) 2차적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존재하기 위해 세계가 필요하지 않지만,



        세계는 존재하기 위해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질문자:



        살려고 하는 욕망은 엄청난 것입니다.



마하라지:



        그보더 더 큰 것은 살려는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질문자:



        돌의 자유(무생물의 자유) 말입니까?



마하라지:



        그렇지요. 돌의 자유지요.



        그리고 그 훨씬 이상입니다.



        무한하면서도 의식하는 자유입니다.



 



 



 



질문자:



        경험을 쌓으려면 인격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마하라지:



        지금 그대가 있으니, 그 인격은 하나의 장애물일 뿐입니다.



        욕체와의 자기 동일시는 유아에게나 좋겠지요.



        그러나 참된 성장은 육체라는 방해물을 지워버리는 데 달려 있습니다.



        정상적으로는 우리가 이른 시기에 육체에 기초한 욕망들을 넘어서야 합니다.



        쾌락을 거부하지 않는 향유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맛본 욕망들을 갈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습관, 곧 반복하려는 욕망은 요기와 향유자를 다 좌절시킵니다.



 



 



 



질문자:



        왜 당신께서는 사람을 아무 중요성이 없는 것으로 계속 무시하십니까?



        인격은 우리 존재의 1차적 사실입니다.



        그것은 (삶이라고 하는) 무대 전체를 점거하고 있습니다.



마하라지:



        그것이 기억 위에 건립되고 욕망에 의해 촉발되는



        하나의 습習일 뿐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는 한,



        그대는 자신을, 살아 있고, 느끼고, 생각하고,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이고,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는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대 자신을 문제 삼고, 그대 자신에게 물으십시오.



        '과연 그런가?' '나는 누구인가?'



        '이 모든 것의 이면에 그리고 너머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이내 그대의 오류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류임을 알기만 하면 그것이 사라지는 것이 바로 오류의 본질에 속합니다.



 



 



 



질문자:



        살아가기의 요가, 삶 자체의 요가를



        우리는 자연 요가(nisarga yoga)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 말은 리그 베다에서 말하는 원초적  요가라는 말을 생각나게 하는데,



        그것은 삶을 마음과 결혼시키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마하라지:



        완전한 자각을 가지고 사려 깊게 살아가는 삶은



        그 자체로 자연 요가(Nisarga yoga)입니다.



 



 



 



질문자:



        삶과 마음이 걸혼이란 무엇을 뜻합니까?



마하라지:



        자발적인 자각 안에서 사는 것, 애씀 없이 살아가는 의식,



        자신의 삶에 완전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ㅡ 이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지요.



 



 



 



질문자:



        어떤 스승은 제자들에게 너무 노력을 많이 한다고 질책하곤 했습니다.



        그들을, 채 익기도 전에 나무에서 따내는 망고에 비유했습니다.



        그는 곧잘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왜 서둘러요? 완전히 익어서 달콤하고 감미로워질 때까지 기다려요."



마하라지:



        정말 맞는 말이지요! 새벽을 대낮으로 여기고,



        일시적인 체험을 완전한 깨달음으로 착각하여 지나치게 자만하다가,



        자신이 얻은 얼마 안 되는 소득마저 망쳐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무리 진보한 수행자라 할지라도, 겸손과 침묵이 필수적입니다.



        완전히 성숙한 진인만이 자신에게 온전한 자발성을 허용할 수 있습니다.



 



 



 



질문자:



        배우는 이가 깨침을 얻고 나면 7년이나 12년, 15년,



        혹은 심지어 25년 동안 묵언을 해야 하는 요가학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바가반 스리 라마나 마하르쉬조차도



        20년이나 침묵을 지킨 뒤에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마하라지:



        그렇지요. 내적인 열매가 익어야 합니다.



        그러기 전까지는 규율과, 자각 안에서 삶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점차 수행이 더욱 더 미세해지다가, 그것이 완전히 형상 없는 것으로 됩니다.



 



 



 



질문자:



        크리슈나무르티도 자각 안에서 사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마하라지:



        그는 항상 '궁극적'인 것을 직접 목표하지요.



        그렇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요가가 그대가 말하는 원초적 요가, 즉



        의식[신부]과 삶[신랑]의 결혼으로 끝납니다.



        의식과 존재가 지복 안에서 만납니다.



        지복이 일어나려면 만남과 접촉이 있어야 합니다.



        곧, 이원성 안에서 단일성이 일어나야 합니다.



 



 



 



질문자:



        붓다도 우리가 열반을 성취하려면 중생에게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의식이 성장하려면 삶이 필요합니다.



마하라지:



        세계 자체가 접촉입니다.



        즉, 의식 안에서 현실화하는 모든 접촉의 총합이지요.



        영혼이 물질을 건드리면 의식이 일어납니다.



        그러한 의식이 기억과 기대에 의해 오염되면 속박이 됩니다.



        순수한 체험은 속박하지 않습니다.



        욕망과 공포 사이에 낀 체험은 순수하지 못하며 업을 만들어냅니다.



 



 



 



질문자:



        단일성 안에 행복이 있을 수 있습니까?



        모든 행복은 반드시 접촉이 있음을 함축하고,



        따라서 이원성을 함축하지 않습니까?



마하라지:



        갈등을 야기하지 않는 한, 이원성에 아무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갈등없는 다수성과 다양성은 기쁨입니다.



        순수 의식 안에는 빛이 있습니다.



        온기를 얻으려면 접촉이 필요합니다.



        존재의 단일성 위에는 사랑의 합일이 있습니다.



        사랑은 이원성의 의미이자 목적입니다.



 



 



 



질문자:



        저는 양자인데, 친아버지를 모릅니다.



        어머니는 제가 태어났을 때 돌아가셨습니다.



        제 양아버지는 자식이 없던 양어머니를  기쁘게 해 주려고 저를 입양했는데



        거의 우발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양아버지는 단순한 분으로 트럭 소유자이자 운전수이십니다.



        양어머니는 집에서 살림을 하십니다.



        저는 지금 24살인데, 지난 2년 반 동안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여기저기 돌아다녔습니다.



        저는 선한 삶, 성스러운 삶을 살고 싶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하라지:



        집으로 가서 부친의 가업을 맡고, 연로하신 부모님을 돌봐드리십시오.



        그대를 기다리고 있는 처녀와 결혼해서 충실하고,



        단순하고, 겸손하게 사십시오.



        자신의 덕은 감추고, 말없이 사십시오.



        다섯 가지 감관과 세 가지 성질은 그대가 요가를 하는  여덟 가지 단계입니다.



        그리고 '내가 있다'는 큰 상기물(큰 진언)입니다.



        주의 깊게 살피면서 부단히 탐구하십시오.



        (그대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질문자:



        자신의 삶을 그냥 사는 것이 해탈하는 방법이라면,



        왜 모든 사람이 해탈하지 않습니까?



마하라지:



        해탈하고 있지요.



        어떤 삶을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깨달음에 대한 관념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관점 전체가 바뀝니다.



        그것은 톱밥의 산더미에 던진 불붙은 성냥개비와 같이 작용합니다.



        모든 큰 스승들은 바로 이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진리의 불꽃 하나가 산더미 같은 거짓을 태워버립니다.



        그러나 그 반대도 성립됩니다.



        진리의 태양이 육체와의 자기 동일시라는 구름 뒤에 가려져 있습니다.



 



 



 



질문자:



        이런 깨달음의 희소식이 전파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일 것 같습니다.



마하라지:



        그런 소식을 듣는 것 자체가 깨달음의 한 약속입니다.



        한 스승과의 만남 자체가 해탈의 보증입니다.



        완전자(완전한 실재, 혹은 그러한 실재인 스승)는 생기를 주며 창조적입니다.



 



 



 



질문자:



        깨달은 사람이 '나는 깨달았다'하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까?



        사람들이 자신을 대단하게 여길 때 그는 놀라지 않습니까?



        그는 자신을 평범한 한 인간으로 여기지는 않습니까?



마하라지:



        평범하지도 않고 비범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자각하고 있고, 자애롭지요 ㅡ 강렬하게 말입니다.



        그는 자기규정이나 자기 동일시에 빠지지 않고 자신을 바라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세계와 별개의 어떤 것으로 알지 않습니다.



        그가 바로 세계입니다.



        그는 그 자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데,



        마치 아주 부자이지만 자신의 부를 끊임없이 나누어주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부자가 아닙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가난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풍성하게 베풀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저 재산이 없을 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깨달은 사람은 에고가 없습니다.



        그는 자신을 어떤 것과 동일시하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그는 있는 곳이 없어, 무처소이며,



        공간과 시간을 넘어서 있고, 세계를 넘어서 있지요.



 



 



 



질문자:



        여하튼 그것은 저에게는 신비입니다.



        저는 단순한 사람입니다.



마하라지:



        깊고, 복잡하고, 신비하고, 어려운 것은 그대입니다.



        그대와 비교할 때, 저는 단순함 그 자체입니다.



        저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안과 밖, 내 것과 네 것, 좋고 나쁜 것으로 구분하는 일이 전혀 없는 실재 말입니다.



        세계인 것, 그것이 저이고, 저인 것, 그것이 세계입니다.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7-17 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