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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무드라의 노래 -우주와 하나가 되는 오르가즘 (라즈니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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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아름다운 마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18.♡.224.43), 작성일 08-06-27 09:42, 조회 5,185, 댓글 0

본문


마하무드라는 모든 언어와 상징을 초월한다.

그러나 참으로 진지하고 진실한 그대를 위하여

이것을 말할 수밖에 없도다.

공(空)은 의지처를 필요로 하지 않나니,

마하무드라는 무(無)에 의지한다.

아무 노력도 하지 말고,



유동적이고 자연스러운 상태를 지켜라.

그러면 속박의 사슬을 끊고

자유를 얻으리라.

 

지금까지 이보다 더 중요한 말은 없었다. 틸로빠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뜻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라.

공(空)은 의지처를 필요로 하지 않나니......

어떤 것이 존재하려면 버팀목이 필요하다. 의지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공(空)은 어떤 지원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것이 앎에 도달한 모든 사람들의 가장 깊은 깨달음이다. 그대의 존재는 비존재(非存在)다. 그것을 존재라고 말하는 것도 틀렸다. 그것은 '어떤 것(something)'아니라 '아무 것도 아닌 것(nothing)'이기 때문이다. 경계선 없는 空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아나트마(anatma), 무아(無我)다. 그것은 자아(自我)가 아니다.

자아는 허구적인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모든 동일시가 허구다.

궁극적인 차원에 도달했을 때, 내면의 가장 깊은 핵심에 도달했을 때 그대는 문득 "나는 이도 저도 아니다."라고 깨닫게 된다. 그대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대는 에고가 아니다. 광막한 空이 있을 뿐이다. 눈을 감고 앉아서 자신이 누구인지 느껴보라. 그대가 어디에 있는가? 깊이 들어가면 그대는 두려움을 느낄지도 모른다. 더 깊이 들어갈수록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無다."라는 느낌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명상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명상은 일종의 죽음이다. 명상은 에고의 죽음이다. 그리고 에고는 허구적인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이젠 물리 학자들도 물질의 영역을 과학적으로 파헤침으로써 똑같은 진리에 도달했다. 붓다, 틸로빠, 보디달마가 내적인 통찰에 의해 도달한 차원을 과학은 외부 세계에서 발견했다. 이제 과학자들은 물질적 실체가 없다고 말한다. 물질은 자아와 유사한 개념이다.

 

그대는 바위를 매우 실재적인 것으로 본다. 바위로 누군가의 머리를 치면 피가 흐르고 그가 죽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매우 실재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물리 학자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은 바위가 실체가 아니라고 말한다. 바위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은 바위가 하나의 에너지 현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교차하는 에너지의 흐름이 바위를 실체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종이 위에 여러 갈래로 교차하는 선을 그어보라. 많은 선들이 한 점을 지나간다. 그 점은 없던 것이다. 두 선이 교차하면서 그 점이 생겨난 것이다. 많은 선들이 교차하면서 큰 점이 생겨난다. 그 점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교차하는 여러 선들이 마치 그 점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은 환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닐까?

 

물리 학자들은 교차하는 에너지의 흐름이 물질을 만든다고 말한다. 이 에너지의 흐름은 물질이 아니다. 아무 무게도 없다. 비물질적인 에너지의 선들이 교차하면서 물질이라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 바위처럼 실재로 보이는 물질을 만들어 낸다.

붓다는 아인슈타인보다 2천 5백년이나 앞서 이런 사실을 통찰했다. 그대의 내부에는 아무도 없다. 교차하는 에너지의 선들이 '자아'라는 느낌을 줄뿐이다. 붓다는 자아가 양파와 같다고 말한다. 양파를 한겹 벗기면 다른 껍질이 나타난다. 계속 벗겨 가면 결국 무엇이 남는가? 아무 것도 없다.

 

인간은 양파와 같다. 생각이라는 껍질, 감정이라는 껍질을 벗기고 나면 무엇이 남는가? 아무 것도 없다. 이 無는 버팀목이 필요 없다. 이 無는 스스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붓다는 신이 없다고 말한다. 신은 필요 없다. 신은 하나의 버팀목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창조자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무를 창조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스스로 깨우치지 않는 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 중의 하나다. 그러므로 틸로빠는 이렇게 말한다.

 

마하무드라는 모든 언어와 상징을 초월한다.

 

마하무드라는 무에 대한 체험이다.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경험이다.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고통받겠는가? 누가 아픔과 번뇌를 느끼겠는가? 거기에 슬퍼할 자가 있는가? 행복해 할 자가 있는가? 붓다는 "행복해 하는 자는 다시 고통의 희생 양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아직 '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가 존재하지 않을 때에는 행복도 없고 불행도 없다. 이것이 진정한 지복이다. 이런 경지에 도달하면 결코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무를 얻는 것은 곧 모든 것을 얻는 것과 같다.

나의 모든 노력은 그대를 無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그대를 절대적인 진공 상태로 이끄는 것이 나의 일이다.

 

공(空)은 의지처를 필요로 하지 않으니,

마하무드라는 무(無)에 의지한다.

아무 노력도 하지 말고,

유동적이고 자연스러운 상태를 지켜라.

그러면 속박의 사슬을 끊고

자유를 얻으리라.

 

'자아'라는 개념은 마음의 의해 조작된 것이다. 이것을 제일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대 안에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위대한 각자(覺者)이며 불교 승려인 나가센(Nagasen)이 왕에게 초청 받았다. 와서 가르침을 달라는 것이었다. 그 왕은 알렉산더가 돌아간 후 그를 대신하여 인도의 총독이 된 사람이었다. 그의 인도 이름은 밀란다(Milanda)이다. 밀란다는 나가센에게 궁전으로 와서 가르침을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나가센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 큰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많은 소문이 그의 궁전까지 전해졌다.

"이 나가센은 보기 드문 인물이다. 인간이 이런 경지에 오른 것은 정말 드문 일이다. 그의 주변에는 알 수 없는 향기와 신비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 그는 땅 위를 걸어다니지만 이 세상 사람 같지 않다."

이런 소문을 듣고 흥미를 느낀 밀란다가 나가센을 초대했다. 그러나 나가센을 만나러 갔던 사신(使臣)은 크게 당황해서 돌아왔다. 나가센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좋다, 그가 초청했다면 나가센은 갈 것이다. 그러나 가서 나가센이라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하라. 그가 초청했다면 나는 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라.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을 들은 사신은 혼란스러웠다. 나가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궁전으로 가겠다는 말인가? 이 말을 전해들은 밀린다 또한 어리둥절했다. 그가 말했다.

"이 사람은 수수께끼를 내는가 보다. 어쨌든 가서 그를 데리고 와라."

 

이 밀린다는 그리스인이었다. 그리스적인 마음은 기본적으로 논리적이다. 세상에는 오직 두 종류의 마음이 있다. 하나는 인도적인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적인 마음이다. 그리스인은 논리적이지만 인도인은 비논리적이다. 인도인은 경계선도 없는 깊은 어둠 속, 모든 것이 모호하고 희미해지는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반면, 그리스인들은 곧게 뻗은 논리의 길을 걷는다. 이 길에서는 모든 것이 정확하게 분류되고 정의된다. 그리스적인 마음은 기지(旣知)의 세계에서 움직인다. 그러나 인도적인 마음은 미지의 세계뿐만 아니라 불가지(不可知)의 차원까지 들어간다. 그리스적인 마음이 절대적으로 합리적이라면 인도적인 마음은 절대적으로 모순된다. 그러니 내게서 수많은 모순을 발견한다 해도 크게 염려하지 말라. 동양에서는 모순도 설명의 방편이다.

밀란다가 말했다.

"이 사람은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는 미친 사람 같다. 만일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곳에 올 수 있단 말인가? 어쨌든 그를 이 곳으로 불러라. 그가 존재한다는 것을 내가 증명해 보이겠다. 그가 이 곳으로 온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존재한다는 증거다."

나가센이 궁전에 왔다. 밀란다가 문 앞에서 그를 영접하고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나는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소. 당신은 이 곳에 왔소. 그런데 아직도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참이오?"

나가센이 말했다.

"그렇소. 자, 여기에 앉아서 이 문제를 차근차근 풀어 봅시다."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궁전에 사는 모든 사람이 그 곳에 집결했다. 나가센이 말했다.

"자,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 보시오."

"첫째, 만일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이 올 수 있습니까? 존재하지 않는 것은 올 가능성도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 곳에 왔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존재한다는 증거입니다. 아주 간단한 논리지요."

나가센이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타고 온 이 마차를 보시오. 당신은 이것을 마차라고 부르지요?"

"그렇습니다."

나가센이 사람들을 시켜 마차에서 황소를 떼어 냈다. 그 다음에 나가센이 물었다.

"이 황소가 마차입니까?"

"물론, 아니지요."

그 다음에 마차의 모든 부품이 하나씩 분리되기 시작했다. 바퀴를 떼어 낸 다음 나가센이 물었다.

"이 바퀴가 마차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모든 부품이 제거되고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을 때 나가센이 물었다.

"자, 이제 내가 타고 온 마차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마차를 제거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제거한 모든 것을 당신은 '이것은 마차가 아니다.'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차가 어디로 갔습니까?"

나가센이 계속 말했다.

"나가센은 이런 식으로 존재합니다. 부분들을 제거하면 그는 사라질 것입니다."

 

교차하는 에너지의 선들이 있을 뿐이다. 선들을 제거하면 점은 사라진다. 마차는 부분들의 조합일 뿐이다.

그대 또한 부분들의 조합이다. '나'는 부분들의 결합이다. 부분들을 제거하면 '나'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의식에서 사념이 제거되면 그대는 '나'라고 말할 수 없다.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 텅 빈 진공이 남을 뿐이다. 감정들이 제거되면 자아는 완벽하게 사라진다. 그대는 이 자리에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부재(不在)가 있을 뿐이다. 무한한 공(空)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궁극적인 경지다. 이것이 마하무드라의 차원이다. 이 차원에서 그대는 전체와 하나가 되는 오르가즘을 느낀다. 이제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가 사라졌다. 그대를 구분할 경계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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