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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는 표현할 수 없다 --마하라지 어록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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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아름다운 마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3.♡.183.148), 작성일 08-07-01 17:04, 조회 4,194, 댓글 0

본문


질문자:



        저는 낡은 자아와 별개의 어떤 새로운 자아가



        제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어떻든 공존하고 있습니다.



          낡은 자아는 그 습관적인 방식을 계속하고 있고,



          새로운 자아는 낡은 자아를 내버려두기는 하지만



          자신을 그것과 동일시하지는 않습니다.



마하라지:



          낡은 자아와 새로운 자아의 주된 차이는 무엇입니까?



 



 



 



질문자:



          낡은 자아는 모든 것이 규정되고 설명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사물들이 서로 언어적으로 부합하기를 원합니다.



          새로운 자아는 언어적 설명들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것들을 자신이 기억하는 사물들과 애써 연결시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하라지:



          그대는 습관적인 자아와 영적인 자아 간의 차이를,



          완전히 그리고 부단히 자각하고 있습니까?



          새로운 자아가 낡은 자아에 대해서 갖는 태도는 어떤 것입니까?



 



 



 



질문자:



          새로운 자아는 낡은 자아를 그냥 바라볼 뿐입니다.



          그것은 우호적이지도 않고 적대적이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과 더불어 낡은 자아를 그냥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것은 낡은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의  가치와 타당성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마하라지:



          새로운 자아는 낡은 자아의 완전한 부정입니다.



          관용적인 새로운 자아란 참으로 새로운 자아는 아닙니다.



          그것은 낡은 자아의 새로운 한 태도에 불과합니다.



        참으로 새로운 자아는 낡은 자아를 완전히 지워버립니다.



        그 둘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자기 벌거벗김의 과정이나,



        낡은 관념과 가치들을 부단히 거부하는 자세가 있습니까?



        아니면 그냥 상호관용만 있습니까?



        그들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질문자:



          아무 특별한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공존합니다.



마하라지:



          낡은 자아와 새로운 자아를 이야기할 때,



          그대는 누구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까?



          그 둘 사이에는 각자가 서로를 기억하는 기억의 연속성이 있는데,



          어떻게 두 개의 자아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질문자:



          하나는 습관에 대한 노예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는 개념적으로 사고하고,



          다른 하나는 모든 관념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마하라지:



          왜 두 개의 자아입니까?



          속박된 것과 자유로운 것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공존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들 간의 근본적인 동일성을 말해줍니다.



          오직 하나의 자아가 있을 뿐인데, 그것은 항상 지금 있습니다.



          그대가 다른 자아라고 하는 것 ㅡ 낡은 것이든 새로운것이든ㅡ은 하나의 양상,



          곧 한 자아의 다른 측면일 뿐입니다.



          자아는 단일합니다.



          그대가 그 자아인데, 그대는 이제까지의 그대



          혹은 앞으로 되고 싶은 그대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관념은 자아가 아닙니다.



          바로 지금 그대는 제 앞에 앉아 있는데, 어느 자아가 그대입니까?



          낡은 자아입니까? 새로운 자아입니까?



 



 



 



질문자:



          그 둘은 갈등하고 있습니다.



마하라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에 어떻게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까?



          갈등은 낡은 자아의 특징입니다.



          새로운 자아가 나타날 때, 낡은 자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같은 숨 안에 새로운 숨이 있고,



          낡은 숨과의 갈등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새로운 자아를 얻기 위한 노력조차도 낡은 자아가 하는 것입니다.



          어디든 갈등, 노력, 분투, 애씀, 어떤 변화에 대한



          열망이 있는 곳에는 새로운 자아란 없습니다.



          그대는 갈등을 창조하고 영구화 하려는 습관적인 경향에서



          어느 정도로 벗어나 있습니까?



 



 



 



질문자:



          저는 제가 지금 다른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제가 이전에 알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상태들이어서,



          그것을 새로운 자아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마하라지:



          낡은 자아는 그대 자신의 자아입니다.



          갑자기 이유 없이 불쑥 싹트는 상태는



          아무런 자아의 흔적을 수반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신’이라고 해도 무방하겠지요.



          씨앗도 없고 뿌리도 없는 것,



          싹터서 자라거나 꽃이 피고 열매를 맺지 않는 것,



          갑자기 생겨나서 신비롭고 경이롭게도



          완전한 영광을 구가하는 것을 ‘신’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그것은 전적으로 예기치 못한 것이면서도 불가피한 것이고,



          무한히 친숙하면서도 가장 놀라운 것이며,



          모든 희망을 넘어서 있으면서도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입니다.



          그것은 원인이 없기 때문에 , 장애도 없습니다.



          그것은 단 하나의 법칙, 즉 자유의 법칙을 따를 뿐입니다.



          하나의 연속성, 하나의 계열,



          한 단계에서 단계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것은 실재할 수 없습니다.



          실재 안에는 어떤 진보도 없습니다.



          그것은 최종적이고 완전하며, 어떤 것과도 관계되지 않습니다.



 



 



 



질문자: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습니까?



마하라지:



          그대는 그것을 실현할 아무 방도가 없지만,



          장애를 만들어내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지켜보면서,



          그것이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십시오,



          자신의 마음을 지켜볼 때,



          그대는 자기 자신이 관찰자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움직이지 않고 서서 지켜보기만 할 때,



          그대는 (또한) 자기 자신이 관찰자 이면의 빛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빛의 근원은 어둡고, 앎의 근원은 알려지지 않습니다.



          그 근원만이 존재합니다.



          그 근원으로 들어가 거기에 안주하십시오.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고 일체에 두루한 에테르(空)에 있지도 않습니다.



 



          신은 위대하고 놀라운 모든 것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저에게서 나옵니다.



          그 근원이 저이고, 그 뿌리, 그 원천이 저입니다.



          실재가 그대 안에서 폭발할 때,



          그것을 신의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신이 그대를 체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대가 그대 신을 알 때, 신이 그대를 압니다.



          실재는 어떤 과정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폭발입니다.



          그것은 마음을 확연히 넘어서 있지만,



          그대가 할 수 잇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잘 아는 것이 전부입니다.



          마음이 그대를 도와줄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됨으로써



          그 마음이 그대를 무력화하는 것을 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지 않으면,



          그대의 마음이 그대를 농락합니다.



          그것은 도둑을 감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그대가 도둑에게서 무엇을 얻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도둑맞는 것을 그대가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대는 마음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지만



          거기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아니면 다른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는 깨어나고 잠이 듭니다.



          하루의 일이 끝나면 잠이 옵니다.



          지금 제가 잠을 자러 갑니까,



          아니면  잠의 상태에서 특징적인 부주의함이 저에게 옵니까?



          바꾸어 말해서 우리는 잠들어 있기 때문에 깨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깨어 있는 상태로 깨어나지 못합니다.



          생시의 상태에서는 무지로 인해 세계가 나타나서



          우리를 하나의 ‘생시-꿈 상태’로 데려갑니다.



          잠과 생시 둘 다 잘못된 명칭입니다.



          우리는 꿈을 꾸고 있을 뿐입니다.



          참된 생시와 참된 잠은 진인만이 압니다.



          우리는 우리가 깨어 있다는 꿈을 꾸고,



          우리가 잠들어 있다는 꿈을 꿉니다.



          세 가지 상태란 그 꿈 상태의 다양한 모습일 뿐입니다.



          일체를 하나의 꿈으로 취급함으로써 우리는 해방됩니다.



          꿈에 실재성을 부여하는 한, 그대는 그 꿈의 노예입니다.



          그대는 자신이 (한 사람으로) 태어났고,



          (지금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이러이러한 것의 노예가 됩니다.



          그 노예성의  본질은 그대 자신을 과거와 미래를 가진,



          역사를 가진, 하나의 과정으로 상상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아무 역사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하나의 과정이 아닙니다.



          우리는 발전하지도 않고 쇠퇴하지도 않습니다.



          일체를 하나의 꿈으로 보고 그것과 거리를 두도록 하십시오.



 



 



 



질문자:



          당신의 말씀을 경청하면 제가 어떤 이익을 얻습니까?



마하라지:



          저는 그대를 그대 자신에게로 도로 불러들입니다.



          제가 그대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대 자신을 보고, 그대 자신 쪽을 보고,



          그대 자신 안을 보라는 것이 전부입니다.









 



 



질문자:



          어떤 목적으로 말입니까?



마하라지:



          그대는 살아가고, 느끼고, 생각합니다.



          그대의 살아가기, 느끼기, 생각하기에 주의를 기울이면,



          그대 자신을 그것들로부터 해방하여 그것들을 넘어서게 됩니다.



          그대의 인격이 해체되고 주시자만 남습니다.



          그러면 그 주시자를 넘어 가십시오.



          그 과정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묻지 마십시오.



          그저 그대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십시오.



 



 



 



질문자:



          사람과 주시자 간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하라지:



          둘 다 의식의 양상들입니다.



          전자 안에서 그대는 욕망하고 두려워하며,



          후자 않에서는 쾌락과 고통에 영향받지 않고,



          사건들에 의해 동요되지 않습니다.



          (주시자인) 그대는 그것들이 오고 가게 내버려 둡니다.



 



 



 



질문자:



          그 더 높은 상태,



          순수한 주시하기의 상태 안에 어떻게 자리잡을 수 있습니까?



마하라지:



          의식은 그 자체로는 빛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너머의 어떤 빛에 의해 빛납니다.



          의식의 꿈 같은 성질을 보았으면, 의식이 그 안에서 나타나는 빛,



          의식에 존재성을 부여하는 그 빛을 찾으십시오.



          (이 빛이 있으므로) 의식의 내용도 있고 의식에 대한 자각도 있습니다.



 



질문자:



          저는 알고, 제가 안다는 것도 압니다.



마하라지:



          정말 그렇지요. 단,



          그 두 번째 앎이 무조건적이고 무시간적인 것이라면 말입니다.



          알려지는 것은 잊어버리고, 자신이 아는 자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대의 경험 안에 줄곧 빠져 있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대는 경험자를 넘어서 있고,



          태어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을 기억하는 속에서 순수한 지의 성질,



          곧 무조건적인 자각의 빛이 나타날 것입니다.



 



 



 



질문자: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실재를 체험합니까?



마하라지:



          체험은 변화에 대한 것이고, 오고 갑니다.



          실재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며 체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사건을 지각하듯이 그것을 지각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한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다린다면,



          즉 실재가 오기를 기다린다면, 영원히 기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실재는 결코 오거나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재를 알아차릴 수는 있지만 예상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미리 준비할 수도 없고,



          예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실재를 열망하고 추구한다는 그 자체가



          실재의 운동이자 작용이며 행위입니다.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중심 요점, 즉 실재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어서 일어나지 않으며,



          일어나는 모든 것, 오고 가는 모든 것은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사건을 사건으로만 보고, 찰나적인 것을 찰나적인 것으로 보며,



          체험은 체험에 불과한 것으로 보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대는 실재에 대해 취약해져서,



          더 이상 사건과 체험들에 실재성을 부여하던 때와 같이



          그렇게 실재에 대해 자신을 방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약간의 좋아하고 싫어함이 있기만 해도,



          그대는 (실재에 대해) 바로 하나의 막을 친 것입니다.



 



 



 



질문자:



          실재는 앎에서보다는 행위에서



          그 자신을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느낌입니까?



마하라지:



          행위도, 느낌도, 생각도 실재를 표현해 주지 않습니다.



          실재의 표현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대는 이원성이 없는 곳에 이원성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실재만이 있으며, 다른 아무것도 없습니다.



          생시, 꿈, 잠의 세 가지 상태는 제가 아니고,



          저는 그 상태들 안에 있지도 않습니다.



          제가 죽으면 세상 사람들은  “오, 마하라지가 죽었군!” 하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저에게는 그런 말들이 아무 내용이 없고,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스승의 상像 앞에서 숭배 의식을 거행할 때,



          마치 스승이 깨어나서 목욕을 하고,



          밥을 먹고 휴식하며,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와서,



          모든 사람을 축복하고 잠자리에 드는 것처럼 모든 일이 일어납니다.



          모든 절차가 아주 세밀하게 진행되지만



          그 모든 과정에는 이것이 실재는 아니라는 느낌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필요에 따라 모든 일이 일어나면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일을 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



          삶 자체가 하나의 거짓 시늉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질문자:



          그러면 대체 왜 살아가십니까?



          왜 그 온갖 불필요한 오고 감과, 생시와 잠과,



          식사하고 소화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까?



마하라지: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은 그냥 일어납니다.



          저는 기대하지도 않고 계획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일어나는 사건들을 그냥 지켜볼 뿐입니다.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말입니다.



 



 



 



질문자:



          깨달음을 얻으신 첫 순간부터 항상 그러셨습니까?



마하라지:



          세 가지 상태는 늘 그렇듯이 순환합니다.



          생시가 있고 잠이 있고 다시 생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저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그냥 일어날 뿐입니다.



          저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변치 않고, 움직이지 않으며, 바위같이 움직일 수 없고,



          동요시킬 수 없는 어떤 것,



          순수한 존재-의식-지복의 어떤 견고한 덩어리가 있습니다.



          저는 거기서 결코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 어떤 것도 저를 거기서 끌어낼 수 없습니다.



          어떤 고문도, 어떤 재난도 말입니다.



 



 



 



질문자:



          하지만 당신께서는 의식하십니다!



마하라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지요.



          평안이 있습니다 ㅡ 깊고 광대하고 흔들리지 않는.



          사건들은 기억 속에 기록되지만, 아무런 중요성이 없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거의 자각하지 못합니다.



 



 



 



질문자:



          만약 제가 당신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이 상태는 계발한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마하라지:



          아무것도 오지 않았습니다.



          늘 그러했던 것이지요. 발견이 있었고, 그것은 돌발적이었습니다.



          마치 태어나면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갑자기 발견하듯이,



          저는 자신의 참된 존재를 갑자기 발견할 것입니다.



 



 



 



질문자:



          그것은 구름에 덮여 있었는데



          당신의수행이 그 운무를 걷어버린 것입니까?



          당신의 참된 상태가 당신께 분명해졌을 때,



          그것은 맑게 유지되었습니까,



          아니면 다시 흐려졌습니까?



          당신의 상태는 영구적이었습니까,



          아니면 간헐적이었습니까?



마하라지:



          절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었지요.



          제가 무엇을 하든, 그것은 바위같이 부동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대가 일단 실재의 상태로 깨어나면, 그 안에 안주하게 됩니다.



          아이는 자궁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지요!



          그것은 단순한 상태이고,



          가장 작은 것보다도 작고 가장 큰 것보다도 큽니다.



          그것은 자명한 것이지만, 묘사하기는 어렵습니다.



 



 



 



질문자:



          그것에 도달하는 길이 있습니까?



마하라지:



          그대가 관심이 있기만 하면, 어떤 것도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저 제가 한 말들을 궁금하게 여기면서



          그 완전한 의미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그 벽을 허무는데 충분한 하나의 수행이 됩니다.



          어떤 것도 저에게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저는 문제에 대해 전혀 저항하지 않으며,



          따라서 저에게는 문제가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대 쪽에는 너무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제 쪽으로 오십시오.



          그대는 문제에 취약하지만, 저는 아무 영향도 받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필요한 것은 진지한 관심입니다.



          성실하면 됩니다.



 



 



 



질문자:



          제가 그것을 할 수 있습니까?



마하라지:



          물론이지요.



          그대는 건너가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다만 진지하십시오.




* 운영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8-07-17 09:04)